로버트 A. 존슨 책

 

1.
Product Details

Inner Gold: Understanding Psychological Projection by Robert A. Johnson and Arnie Kotler (Paperback - Aug. 15, 2008)
 
 
 

마음 속의 황금,내면의 황금(가제)

 

[Inner Gold]

 


로버트 A. 존슨 저/ 박종일 역

제 1 장

 


내면의 황금

 



내가 심리분석을 처음으로 배웠던 프리츠 쿤켈은 심리학을 공부하는 데는 세 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그리스 신화를 읽을 것, 융을 읽을 것, 그리고 관찰할 것.” 나는 관찰을 통해 아주 많은 것을 배웠는데, 가장 주의 깊게 관찰한 것은 우리 내면의 연금술로 만들어진 황금의 교환이었다. 내면의 황금은 최고 가치의 인간정신이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 자아, 우리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이다. 그것은 우리가 지선에 이르렀을 때이며 우리에게 주어진 24금 선물이다. 내면의 황금은 또한 신에 관한 얘기이기도 하다. 이것은 하나의 신비를 설명하는 두 가지 방식이다.

삶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그 가능성을 다른 사람에게서 먼저 보게 되는 경우가 많다. 숨겨져 있던 우리의 한 부분은 드러날 때는 무의식에서 의식 가운데로 곧장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중개자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는 우리의 황금을 누군가에게 투사하며 그러면 한 순간에 그 사람에게 몰두하게 된다. 몰두의 첫 번째 증상은 그(또는 그 여자)가 어둠속에서도 빛을 발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내부에서 무언가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의 황금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있다는 뚜렷한 신호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특징과 속성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 자신의 깊이와 의미를 깨닫는다. 우리의 황금은 처음에 우리에게서 나와 그들에게로 옮겨졌다가 마침내 우리에게로 되돌아온다. 우리 내면의 황금을 투사하는 것은 깨달음이 깊어지는 최상의 기회이다.

 


중세의 정신

 


중세에 연금술이란 흔한 금속을 황금으로 변화시키려는 일이었다. 실제로 황금을 만들려는 협잡꾼도 있었지만 최고의 연금술사는 영혼의 황금을 다루는 사람이었다.

연금술은 중세의 정신이 만개했을 때 나왔다. 중세 사람들은 현실을 안과 밖으로 나누지 않았으며 심지어 둘 사이의 차이를 인식하지도 않았다. 그들에게는 내면과 외면이 같은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도달한 것을 이루기 위해 우리는 세계를 둘로 나누어야 했다. 이점에 있어서 우리는 중세 사람들에게 미치지 못한다. 이만큼 성취하기 위해 우리는 외로움이란 대가를 치렀고 사랑할 줄 아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나는 사람들에게 외면과 내면을 구분하도록 가르치는 일에 오랫동안 종사했다.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다. 당신 남편은 당신 남편이다. 우리는 아직도 현대적 정신으로의 전환을 끝내지 못했다. 많은 심리문제는 바깥 그곳안쪽 여기를 구분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인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외부세계는 마야, 즉 환영(幻影)이다. 외부세계는 바깥 그곳에 있는 게 아니라 실재로는 내부에 있기 때문에 우리가 보는 것은 헛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투사한 “만물”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고대 중국에서 노자는 꿈에 나비를 보았는데, 이후로 노자는 자신이 나비를 꿈꾸었는지 나비가 자신을 꿈꾸었는지 구분하지 못했다.

서구에서 황금은 자아의 상징이지만 동양에서는 내적 신성(神性)의 상징은 다이아몬드이다. 내적 의미는 같지만 이미지는 다르다. 다이아몬드는 지상에서 가장 단단한 물체이며 비세속적, 비인격적, 천상의 것이다. 이에 반해 황금은 훨씬 무르며 관계로 맺어진 자아이다. 우리가 다루어야 할 것이 황금이라서 행운이라 할 수 있다.

 


당신 눈 속의 광채

 


우리 영혼의 황금을 누군가에게 나누어줄 때는 몇 가지 반응방식이 있다. 우리는 그 또는 그녀에게 다가가 이렇게 말한다. “내 삶의 의미가 당신 눈의 광채 속에 홀연히 나타납니다. 내가 그걸 좀 설명할까요?” 또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내 내면의 황금을 당신에게 주었습니다. 당분간 나를 위해 지니고 계실래요?” 그러나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우리는 방 가운데 떨어져 서서 상대에게 등을 돌린 채 더할 수 없는 두려움에 휩싸여 안절부절못한다. 우리는 아침 커피타임에 커피포트 주변에 모여 시시덕거린다. 농담을 건네고 웃음을 터뜨리며 활기찬 장난도 한다. 그리고 각자 자리로 돌아가면 에너지가 충만하고 즐거운 느낌으로 그날 하루를 보낸다. 이때 함께 나눈 것은 한 잔의 커피가 아니라 내면의 연금술로 만들어진 황금이다.

황금의 교환은 신비한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황금은 우리들 것이지만 너무나 무거워 얼마동안 함께 나누어 짊어질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 사람은 의미와 동의어가 된다. 그가 어디를 가든 우리는 놓치지 않고 그를 따라간다. 그가 미소 지을 때 우리는 하늘 끝까지 올라가고 올리고 그가 얼굴을 찌푸리면 우리는 지옥의 밑바닥까지 떨어진다.


영웅숭배

 


황금의 나눔은 때로는 영웅숭배의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열 살짜리 아이에게 이웃집 열두 살짜리는 영웅이다. 열 살짜리는 열두 살짜리를 닮으려 한다. 걸음걸이도 그 아이처럼, 신발도 같은 것을 신는다. 열두 살짜리가 사용하는 말투를 따라하고 가능한 한 그의 주변을 맴돌려 한다. 우리는 유행의 힘, 특히 한동네에 사는 청소년 사이에서 유행이 어떻게 번지는지를 안다. 같은 모양의 신발, 죄수복 같은 바지, 누구든 이런 것을 갖고 있어야 한다. 누군가 영웅숭배 하는 것을 보면 외경심이 들기도 하고 또한 재미있기도 하다.

2년 후면 열 살짜리는 열두 살이 되고 2년 전에 자신이 열두 살짜리에게 투사했던 바로 그 인물이 된다. 열 살짜리는 열두 살짜리에 완전히 동화되었다. 이제 그는 열네 살짜리를 숭배하는 새로운 사다리를 오른다.

유년기의 나 자신의 영웅숭배가 생생하게 생각난다. 영웅숭배는 매우 강한 유혹이다. 천천히, 그리고 고통스럽게 나는 영웅숭배—나 자신의 잠재력을 다른 사람에게서 찾아내는 —과정을 밟아갔다. 그 동안에 나는 백발이 되었고 내가 숭배했던 그 영웅이 되었다.

 


황금을 찾아서

 


열네 살이었을 때 나는 할머니와 함께 친척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워싱턴 주 스포케인으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사촌 누이의 남편을 처음 만났다. 만나자 마자 그는 나의 영웅이 되었다. 그 무렵 나는 정서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였다. 나는 다리가 불편하여 남자들의 세계에 제대로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런 방면에는 나는 별 재능이 없었다.

그의 이름은 토르였다. 그는 노르웨이 혈통이었고 20대 초반의 나이에 건장하고 큰 체구를 갖고 있었다. 그는 신체를 움직여 하는 일에는 압도적인 주인공이었다. 이 사람이 내게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일을 친절하게 가르쳐주었다. 장례식 다음날 그는 가족모임에서 나를 억지로 끌어내어 사냥하러 숲으로 데리고 갔다. 그때의 사냥은 내 생애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내가 어떤 사람이며, 내게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의 빠르기로 나를 가르쳐야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내게 총구를 어디로 향해야하는지를 요령 있게 가르쳐 주었다. 내게는 그는 신인(神人), 무한히 높은 가치를 지닌 존재였다. 나는 그를 흠모했고 말 그대로 그에게 빠져들었다. 숲을 헤치고 지나가면서 나는 그가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 밟고 갔다. 그의 거대한 존재에 취해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갑자기 그가 멈추어 내게 말했다. “저기 봐, 다람쥐가 있어.” 10~20 야드 앞 소나무 가지 위에 다람쥐가 앉아 있었다. “잘 봐.” 그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정확하게 가르쳐 주었다. “여기를 다람쥐와 일직선으로 일치시켜. 방아쇠를 부드럽게 당겨, 그래야 총이 흔들리지 않아 바로 맞힐 수 있거든. ‘빵’하는 소리가 날거야. 겁내지 마.” 나는 그가 시키는 대로 했지만 당연히 빗맞혔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 가보자.” 나는 그의 뒤를 따라 다람쥐가 앉았던 나무쪽으로 다가갔다. 그런데 보라, 나는 빗맞히지 않았다! 나뭇가지 아래에 피투성이 헝겊 같은 다람쥐가 떨어져 있었다. 나는 자랑스러움과 함께 공포를 느꼈다. 그 순간 나는 영웅숭배로 무엇을 성취할 수 있고 아울러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를 깨달았다. 나는 늠름한 남자가 되었지만 감당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다람쥐를 쏘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우울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유쾌한 기분이 앞섰다.

 


돌려주기

 


40년이 지나 토르의 아내, 사촌누이에게서 편지 한통을 받았다. "네가 맞지, 로버트. 손녀가 집에 가져온 심리학 교과서에 보니까 저자가 로버트 존슨이더라. 틀림없이 바로 너라고 생각했지." 40년이나 넘게 사촌누이의 소식을 듣지 못했다. 우리는 곧바로 전화로 얘기를 나누었고 누이는 자신의 예순 살 생일에 나를 찾아오겠다고 했다.

정말 뜻 깊은 만남이었다. 누이는 작은 무리의 수행원들을 데리고 왔는데 그 가운데는 나의 영웅 토르의 손자도 있었다. 손자 토르는 내가 할아버지 토르를 처음 만났을 때의 내 나이와 같았다. 그도 그 무렵의 나처럼 비쩍 마르고 현대세계의 소용돌이 속으로 느닷없이 끌려나온지라 두려움에 빠져 있었다. 내 머릿속에는 어떻게 그를 가르칠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어린 토르를 안정시키려 나는 내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사냥얘기를 들려주면서 그의 할아버지가 내게 준 놀라운 가르침을 말해주었다. 유감스럽게도 할아버지 토르는 술을 너무 마셔 일직 죽었고 그의 인생은 실패작이었다. 사촌누이는 그와 이혼하였고 그 후 그는 곧바로 어려운 형편에 빠졌다. 이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한 때 나의 영웅이었으니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있는 손자 토르에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해주었다. "난 내 할아버지에게 큰 빚을 지고 있어. 그 빚을 네게 갚아주마. 네가 나한테서 무엇을 바라든 그건 모두 내가 갚아야할 빚이야." 어린 토르는 이내 나와 친해졌고 나는 그의 영웅이 되었다. 그건 아름다운 황금의 나눔이었다.

내면의 연금술로 만들어진 황금이란 이런 것이다. 당신 자신의 황금을 스스로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맡겨둔다. 열네 살이었을 때 나는 토르가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없었다. 그때 그는 스물 네댓 살이었고 그래서 나는 나의 황금을 그에게 맡겼다. 그때 내가 맡긴 황금은 남자다움, 강인함, 용기, 독립심, 이런 것들이었는데 내게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많이 갖고 있었다.

40년이란 세월을 넘겨 나는 나의 황금을 되찾아왔다. 황금을 찾아올 때 나는 총 쏘는 방법을 가르치지 않았다.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 사냥 이후로 총을 쏜 적이 없으니까. 어린 토르와 함께 앉아 있을 때 나는 모든 것을 또렷하게 알 수 있었다. 어린 토르에게 내가 말했다. "내게 줄 황금이 있어." 물론 그것은 그의 황금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을 테니까. 내가 어린 토르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가 나를 선택한다면 나는 그의 황금을 맡아둘 수 있었다. 어린 토르는 그렇게 선택했다. 나는 그보다 더 그다웠고 그는 나보다 더 나다웠다. 우리 두 사람과 그의 할아버지와의 관계보다 더 많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나는 나름대로 몇 가지 특별한 황금을 짊어지고 왔다. 알피니스트가 암벽에 못을 박아 로프를 고정시키고 그 로프를 붙잡고 올라가 새로운 못을 박고 그 못에 로프를 걸듯 나는 몇몇 영웅들의 도움을 받아 앞으로 나아갔다. 이것이 우리가 성장하는 과정이다. 우리가 지금 되어 있는 이 모습은 어느 정도는 황금의 나눔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다.

 


때로 다툼은 피할 수 없다.

 


황금의 교환하는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우리는 성숙해져 마침내 우리의 황금을 돌려달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그래도 처음 그 말을 꺼낼 때는 거북하기 마련이다. 방을 나설 때는 우리가 이제 떠난다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하기 위해 방문을 소리 나게 닿아야 할지 모른다. 우리의 황금을 돌려받을 때 이처럼 청년기의 미숙한 행태를 보이는 것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우리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누군가의 황금을 짊어진다는 것은 예술이자 어려운 책임이다. 당신이 누군가의 황금의 수령자라면 그 황금을 조심스럽게 다루고 요청이 있으면 지체 없이 돌려줄 준비를 하라. 불행한 일이지만 황금을 긁어모은 뒤에 돌려주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살인행위이다. 그런 사람들은 추종자나 동조자를 모아놓고 착취한다. 내게는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정말 고통스러운 경험이었다.

내 아버지는 내게 진정으로 아버지 노릇을 한 적이 없다. 내 안의 부성애(父性愛) 황금은 그러므로 누가 맡긴 것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나는 결코 가져본 적이 없는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20대가 되었을 때 어느 날 부성애 황금을 맡기기에 이상적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사람은 아버지처럼 행동했고 내게는 남자다움의 원형적인 역할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를 믿었고 지혜롭고 나이든 남자가 나를 삶의 다음 단계로 인도하는 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제 비로소 나는 자신만만한 그 사람의 그늘에서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게 나의 황금을 주었고 그것은 행복한 경험이었으나 며칠 가지를 못했다.

한 주가 지나지 않아 그는 나를 조종하고 지배하며 나의 삶을 설계하고 나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나는 부성애 황금을 그에게 맡긴 대가라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견뎌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런 행동을 계속하도록 허용하기에는 나는 이미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내 황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했고 그는 돌려주려 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조종을 계속하려 했다. 나는 그 사람에 맞서 싸워야 했다. 물론 그 싸움은 주먹질이 아니라 정신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 사람의 인생행로에서 빠져나와 나의 길을 가려고 싸웠다. 우리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도 적대감이 남아있다. 그것은 지독한 경험이었다.

우리 문화에는 이런 일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다. 그래서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우리의 황금을 돌려달라고 요구해도 그 여자는 우리가 하는 말을 알아듣지 못할 것이다. 그 여자는 아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지난주에 당신은 내가 들어갈 때 문을 열어주며 공주 대접을 하더니 이번 주에는 나를 무시하는 군요." 사람들은 역학을 이해하지 못한다. 당신의 황금을 돌려받은 후에라야 비로소 다른 사람의 황금을 볼 수 있다. 적절한 시점이 되었을 때, 무게를 감당할 준비가 되었을 때, 당신은 황금을 돌려받아야 한다. 품위 있고 재치 있게 이 일을 해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지만 그렇지 못한 방식이라 할지라도 돌려받아야 한다.

 


의식(儀式) 갖추기

 


황금을 돌려주는 일의 의미를 잊지 않기 위해 의식을 만들 수도 있다. 내게서 심리치료를 받던 한 청년은 자신의 황금의 큰 덩어리를 내게 주었다. 처음부터 이 청년은 만날 때마다 내게 자신의 황금을 주려하였다. 그럴 때 나는 이렇게 말해주곤 했다. “이건 너의 가치야. 잠시 동안은 그걸 내 목에 걸어줄 수는 있지만 언젠가는 네가 찾아가야 돼.” 그래도 그는 멈추지 않았고 내가 자기에게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이며 심리치료사로서 나를 만나게 된 게 얼마나 큰 행운인지를 매번 강조하였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해주었다. “지금 네가 하는 얘기는 너 자신의 내면의 황금을 말하는 것이야.”

그는 지적이며 활기 넘치는 청년이었고 나름대로 비상한 재능을 갖고 있었으며 자신이 짊어지기엔 지나치게 무거운 황금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눌 조건에 관해 토론하였고 그는 충분히 이해하였다. 우리는 그렇게 5년을 함께 보냈다. 어느 날 그가 이렇게 말했다. “내 황금을 돌려받고 싶습니다.” 나는 그가 안정을 찾지 못하고 있음을 눈치 채고 있었고 그래서 동의하였다. “그래, 모든 것은 항상 변하고 있으니까. 이제 황금을 네게 돌려주는 의식을 치르도록 하자.” 내가 말했다.

나는 콩알만 한 크기의 황금을 불러냈고 며칠 후 우리는 의식을 치렀다. 그는 황금 알갱이를 손에 쥐고 흔들다가 갑자기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았다. 그는 황금 알갱이를 내 손에 쥐어주면서 불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돌려주고 싶지 않으시죠?”

내가 대답했다. “음, 그런 것 같아.” 나는 그 황금을 잠시 손에 쥐고 있다가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기다렸다 다시 황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나는 격식을 갖추어 그것을 그의 손에 쥐어 주었고 그는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건 너의 황금이야. 그러니까 있을 곳은 내 주머니 밖에 없어. 요 몇 년 동안 네 황금을 내게 맡겨주어서 고마웠어. 그렇지만 그건 네 것이고 이제는 네게 돌려주어야 해.” 그것은 성숙해가는 의미 깊은 순간이었다. 나는 적당한 때에 황금을 돌려줄 준비를 해왔다.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바람직한 결과가 무엇인지를 분명히 아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순도를 떨어뜨리지 말라

 


환금을 나눌 때 양쪽이 곤란해지지 않기 위해서 지켜야할 규칙이 두 가지 있다. 첫째, 누군가에게 당신의 황금을 맡길 때는 그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해서는 안된다. 의미와 중요성을 그 사람에게 투사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당신은 그 사람을 숨 막히게 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둘째, 순도를 떨어뜨리지 말라. 연금(鍊金)된 황금은 그 자체로 하나의 순수한 원소이므로 다른 것과 섞여서는 안 된다. 우정, 동지애, 섹스, 오락, 일—이 모든 관계는 좋은 것이지만 연금된 황금을 이런 것들을 통해 표출하면 쓰레기가 나온다. 당신의 황금을 짊어진 누군가와 결혼에 이를 수도 있다. 그것은 온당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 주면에 흔히 볼 수 있는 여러 형태의 관계와 섞지 말라. “마음이 순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순결함이란 섞이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이 말은 어느 정도 진실일까? 동정녀 잉태는 어느 정도 진실일까?

무릇 심리적인 고통은 섞임에서 비롯된다. 당신 내면에 있는 것들은 모두가 그 자체로 좋은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가 다른 한 가지에 의해 오염되면 양쪽 모두가 망가질 수 있다. 심리치료사로서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쏟았던 일은 환자가 자신의 문제를 할 수 있는 한 단순하게 표현하게 하는 것이었다. 문제가 분명하게 드러나면 무엇을 해야 할지도 분명해지는 법이다.

당신이 몰입했을 때, 황금을 나눌 때는 조용히 앉아서 연막이 걷힐 때까지 기다렸다가 당신이 어디에 와있는지를 알아보라. 이 과정을 당신의 황금을 지고 있는 그 사람과 얘기할 수 있다면, 당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품격과 지성을 사용하여 말해 줄 수 있다면 무근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위험스러운 일이기는 하지만 시도해볼 가치는 있다.

 


사랑과 결혼

 


상대에게 당신의 황금을 맡길 때 상대도 당신에게 맡기고 싶은 황금을 갖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황금의 교환이 양방향일 때는 복잡해진다. 관계가 섞이면—이 경우에는 그러지 않을 수가 없다—황금의 교환은 결혼을 의미한다. 결혼은 좋은 것이며 황금도 좋은 것이다. 두 가지가 순조롭게 함께 갈 수도 있지만 둘이 동의어는 아니다. 두 가지를 섞으면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나는 사랑에 빠졌어, 그 여자를 침대로 데려가야지. 그리고 당신은 실제로 그렇게 할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건 그런 게 아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상호 투사는 결혼의 전제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다. 우리는 사랑에 빠진 상대와 결혼하는 것은 당연한 일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에 빠졌다고 해서 성공적인 결혼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사랑에 빠졌을 때는 격정을 주체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의 황금, 당신의 내면 가장 깊숙한 가치를 상대에게 투사하였다. 당신은 그것을 돌려받을 준비가 될 때까지 당분간 품어달라고 그 여자에게 주었다. 그런 감정이 양쪽에서 모두 생겼기 때문에 그 여자는 자기의 황금을 당신에게 준 것이다.

이런 관계가 순조롭게 유지되자면 언젠가는 두 사람 모두가 각자의 황금을 돌려받아야 한다. 불행한 일이긴 하지만 황금을 돌려받는 일은 언제나 환멸과 함께한다. “당신은 내가 생각했던 기사가 아니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당신은 공주가 아니었어.” 이제는 실망 때문에 황금이 소리 내며 부서져 내린다. 황금을 누군가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 다는 것은 일정기간 동안만—우리가 스스로 강해질 때까지—가능할 따름이며 그때가 오면 돌려받아야 한다는 점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도로 지혜롭지는 못하다. 이것이 우리 문화의 가장 고통스런 문제이다.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관계가 작동하지 않게 되는 5년 후가 되면 투사를 거두어들이고 다른 사람과 관계—파트너이로서건 배우자로서건—를 맺을 수밖에 없다.

진정한 결혼은 인간적인 사랑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그런 사랑은 낭만적인 사랑, 사랑에 빠짐과는 다른 것이다. 낭만주의는 서양문화의 특징이며 비교적 늦은 시점이라 할 12세 이후로 나타난 등장한 사건이다. 낭만적인 사랑은 결혼의 기초가 아니다. 인간으로서의 삶, 우리의 결혼은 인간 대 인간으로서 사랑할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유지된다. 사랑에 빠지면 우리는 우리의 황금—우리의 기대—을 상대에게 맡기는데, 그렇게 되면 그 여자는 지워져버린다. 관계맺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적인 재능이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중시하고 즐긴다. 그런데 낭만적인 사랑은 상대를 신성시하는 천상의 사랑이다. 이런 사랑에서는 자신은 인식하지 못하지만 상대가 신의 화신이 되어줄 것을 요구한다. 이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깊은 종교적 체험이며, 많은 사람들이 신이 자신을 붙들어줄 유일한 종교적 체험이라고 생각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