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평점 :
: 아무리 이러니 저러니 문화인인 척 해도 사람은 어쩔 수 없이 말초적인 것에 끌리는 동물이던가. 연예계 스캔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나라고 해도 그것이 내가 가쉽거리에 쉬이 동요되지 않는 인간이라서가 아니라, 단순히 그 연예계의 사람들에 대해 관심이 없기 떄문이겠지. 만약 당장 함께 일하는 옆 사람이 어떤 스캔들 같은 것을 일으켰다면 누구보다 궁금해 하는 게 당연하지 않겠는가.
주절주절 사설을 늘어놓는 건, 사실 내가 이 책을 접한 것이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서였다는 걸 말하기 위해서였다. 마침 문동 세계문학전집 40% 세일 기간에 뭘 살까 하고 목록들을 보다가 '프랑스 작가 아니 에르노의 1991년 작.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의 사랑을 다루며 그 서술의 사실성과 선정성 탓에 출간 당시 평단과 독자층에 큰 충격을 안겨준 작품이다.' 라는 출판사 소개 글에 끌려서 이 책을 고르게 되었으니 말이다. 물론, 아래 줄줄이 달린 이 책의 평이 굉장히 좋았다는 것도 한 몫 하긴 했지만.
나는 이 책에 세 번 놀랐다. 먼저 책의 두께에 놀랐다. 이 책은 지금 내 책장에 꽂힌 책 중에 가장 얇은 책이고, 심지어는 어지간한 노트보다도 얇은 느낌이다.(샘플북만한 얇기다.) 이미 모 출판사 덕분에 의외로 책 두께가 생산 단가에 미치는 영향이 작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한 얇기라고 생각했더랬다. 그리고 막상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그 문장에 놀랐다. 문장은 굉장히 쉽고, 단순하다. 내가 프랑스어를 공부하는 사람이었다면 동화책 다음으로 읽을만한 책이 이 아니 에르노의 책이어도 좋겠다 싶을 정도로, 그녀의 문장은 단순하고, 짧고, 명확하다. 번역자를 괴롭히는 언어유희나 복잡한 수사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읽고 나서는 그 깊이에 놀랐다.
보면서 '우와, 이거 좋은데!'라고 느끼게 하는 책이 있다면, 볼 때는 정작 아무 생각도 없지만, 보고 나서 '그 책 정말 좋은 책이었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책도 있는데, 이 '단순한 열정'은 후자에 가까운 책이다. 분명 어떤 면에서 이 책은 선정적이다. 그렇지만 이 책이 선정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게 현실에 단단히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남녀간의 성행위를 보여주지만, 그 내용 자체는 황당하리만치 말도 안 되는 포르노물같은 그런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런 현실성이 이 책안에 있다. 책을 읽으면 사랑에 휩쓸려버린 한 여자의 마음이 고통스러우리만치 생생하게 현실로써 다가온다.
게다가 그 문장이라니! 난 처음에는 작가가 자신이 겪었던 일, 그 일을 통해 생각한 것들, 그 일과 관련된 느낌을 일기 쓰듯이 가볍게 써 내려갔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여기에 책 두께 때문에 살짝 빈정상한 것도 있어서 '이런 글로 잘도 작가가 되는 구나'라는 생각까지 하기도 했었다. 처음에는 그렇게 단순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 문장이, 그리고 그 문장이 묘사하는 상황이 말이다. 물론 훨씬 세련되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블로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이별 관련 글과 그렇게 달라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찬탄으로 변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읽으면 읽을 수록 그 문장을 쓰기 위해 작가가 문장을 얼마나 고치고 또 고쳤는지 느껴졌으니 말이다. 그 '쉬워보이는 문장'을 쓰기 위해 계속해서 문장을 쓰는 작가의 모습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문장이 모여 만들어진 글은 또 어떻던가. 작가는 지금의 그 글만을 남겨놓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문장을 버렸을까. 단순해 보이는 문장이 모여 만들어진 단순해보이는 글이건만, 원래 100이던 문장의 90을 날리고 꼭 필요한 문장만 남겨 100이상이 농축된 10을 남겨놓은 것 같은 그런 글을 읽고 있다는 것을 이내 깨달을 수 있었다. 아니면 어떻게 이런 평범해 보이는 사랑 글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었겠는가.
나는 그 사람을 내 존재를 위해 선택한 것이지 책의 등장인물로 삼기 위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p.28)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pp.66-67.)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문장 하나 하나에 공감을 할 수 있었다. 특히 사랑 부분은 말이다. 사랑은 사람을 존재하게도 하고 구원하기도 하는 힘이다. 사랑은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한 사람을 더욱 철저히 파괴할 수도 있는 힘이 되지만, 근본적으로 사랑은 생명이고, 삶이라고 나는 믿는다. 돌이켜보면, 내가 강하게 살아있음을 실감한 순간들은 바로 내가 어떤 존재에 강하게 몰입할 수 있었던 순간들이었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라, 사랑하던 존재들과 만났던 것만큼 이별도 해야 했지만, 그럼에도 난 단 한 번도 그 순간들을 후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분명 날 살아있게 했고, 내 삶의 순간 순간들을 더없는 열정과 반짝임으로 채워줬으니까. 사람들이 작가의 글에 당혹스러움을 느낀다면, 그것은 그 순간들을 경험해 보지 못했기 떄문일 것이다. 그래서 내가 느낀 것은 도리어 질투였다. 작가가 느낀 순간 순간은 곧 그만큼이나 무겁고 짙은 삶의 순간들이었다. 생애 단 한 순간만이라도 그렇게 반짝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 삶은 결코 가볍지 않으리라. 또한 단 한 사람이라도 이토록 열정적으로 사랑할 수 있었다면, 그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리라. 읽고 나서 사랑은 그 어떤 경우라도 축복이라던 한 친구의 말이 문득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