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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
박찬일 지음 / 창비 / 2013년 11월
평점 :
판매중지
: 여행은 우연히 일어나는 하나의 사건이다. 내가 계획해서 가는 여행이라고 해도 그 여행은 결국 우연의 산물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찾아온 기회, 혹은 우연히 듣게 된 정보, 당시 받을 수 있는 휴가 날의 최대 일수, 그리고 당시 가지고 있는 자금 등으로 인해 여행지는 결정되지 않던가. 어쩌면 내가 선택한다고 했던 것과 달리, 그 나라가 그 때 그 나라에 있어야 하는 사람들을 부르는 건지도 모르겠다. 뭐, 이건 좀 막 나갔나.
어행은 기억을 남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신혼여행으로 간 장소는 그 사람에게 평생 특별한 곳이 될 것이다. 내게 이탈리아가 꼭 그렇다. 이탈리아에 가기 전에도 이탈리아에 관한 책을 찾아 읽고, 그 나라에 대해 인터넷을 검색해보곤 했지만, 이탈리아에서 돌아온 지금도, 내게 이탈리아는 그리움과 추억의 이름으로 남아 있다. 오히려 이탈리아를 다녀온 뒤에 이탈리아에 대한 호기심은 더욱 커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렇게 해서 만나게 되었다. 알라딘 E-book 첫 페이지에 이 책이 있었는데, 내 눈에 다른 책들이 아니라 이 책만 딱 와서 꽂힌 것이다. '지중해 태양의 요리사'라니! 이건 누가봐도 이탈리아 요리 이야기 아니겠나!
결론부터 말하면, 이 책은 이탈리아 요리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이탈리아 중에서도 시칠리아라는 작은 섬의 한 주방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시트콤들을 써 놓은 책에 가깝다. 그러면서도 음식에 대한 이야기를 쏙쏙 박아놓은 게 꼭 웹툰 '오므라이스 잼잼'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탈리아 요리나 요리사의 삶에 대한 진지한 이야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좀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그래서 더 좋았던 책이기도 했다. 하지만 결코 요리를 가벼이 다루거나 잡다한 신변잡기 이야기만 있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요리에 대한 진지함이 그대로 녹아나 있는 책이기도 하다.
그는 좋은 재료를 직접 구하지 않고 그저 전화통을 붙들고 배달받는 미슐랭급 스타 요리사를 경멸했으며, 멀리서 수입한 재료를 자랑하는 요리사에게 호통을 쳤다. 공장화·기계화되는 재료의 역사를 슬퍼했으며, 돼지나 닭이 항생제와 호르몬의 늪에서 신음하는 걸 참지 못했다. 아이들이 먹는 음식이 사료가 되고 있는 현실을 분노했으며, 항상 지역 어린이들이 무엇을 먹고 마셔야 하는지 가르치고 연구하느라 머리를 싸맸다.
"진짜 요리사가 되려면 시장과 들판을 알아야 해. 오징어와 참치가 언제 올라오는지, 토마토가 가장 잘 익는 때가 언제인지 알아야 하지. 식당에 앉아 전화통 붙잡고 손가락만 써서는 절대 좋은 재료를 구할 수 없다구. 좋은 재료는 요리의 전부야"
주인공이 주방에서 고군분투하는 모습들에 낄낄거리며 웃다가도 섬세함이라고는 백만광년쯤 떨어져있을 것 같은 마초냄새 물씬 풍기는 오너 쉐프가 툭툭 내뱉는 '요리 철학' 이야기를 들으면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곤 한다. 특히 내게 인상깊었던 것은 좋은 (돼지)고기를 구하기 위한 방법에 대해 오너가 열변을 토하는 장면이었다. 직접 고기가 될 돼지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을 넘어서 '이름 있는 돼지'를 최고로 친다는 말에는 순간 갸웃했지만, 이내 그 뜻을 알고 나면 무릎을 치게 된다. 이 '이름 있는 돼지'는 제주도 흑돼지나 '**읍 ***돼지'같은 브랜드가 아니라 '꿀꿀이'니 '꽃순이'같은 이름을 붙여 가족이 정성으로 키운 돼지란다. 이렇게 이름까지 붙여주며 애지중지하는 돼지에게 아무거나 막 먹이고, 아무렇게나 대하겠냐는 거다. 한 손에는 그 돼지를 해체할 칼을 들고 다른 손으로 쓰다듬으며 '진심으로' 15년은 살 녀석이 2년만에 죽었다고(그나마도 오래 산 거라나) 슬퍼하는 마초 쉐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시트콤의 한 장면인데도 어쩐지 숙연해지는 면이 있다. 그래, 이것이 이탈리아의 식문화다. 이미 저자가 이 책을 쓰는 2009년에는 이탈리아도 많이 자본화되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지만, 그래도 이탈리아는 여전히 이탈리아다.
나는 그리움과 함께 이 책을 덮었다.
덧 - 좀 특이하게도 이 책에는 명사들을 발음 그대로 쓰고 있다. 예를 들어 이탈리아는 이딸리아로, 파스타는 빠스타로 표시하는 것처럼. 처음에는 낯선 느낌이 드는데, 장담하건데, 그 불편함은 첫 에피소드를 넘기기도 전에 아무렇지도 않게 될 것이다. 그게 하나도 신경쓰이지 않을 정도로 재미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