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이여, 마르크스를 읽자 - 마르크스에게서 20대의 열정을 배우다
우치다 타츠루 & 이시카와 야스히로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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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제목이 책의 주제를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 솔직한 책이지요. 일본의 20대들에게 '마르크스를 읽어라, 그래야 어른이 된단다'라고 두 저자는 말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1975년 이전, 그러니까 베트남 전쟁이 종전을 고하기 전까지 일본의 대학생이라면 마르크스 서적을 꼭 읽어야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더 나아가 자민당의 주요 간부들 중에서도 청년 시절에는 일본 공산당원이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마르크스를 읽는 과정을 젊음의 통과제의처럼 얘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트남 전쟁이 끝나면서 이런 지적 전통도 함께 막을 내리게 됩니다.  

 

베트남 전쟁이 끝나고, 일본이 경제적으로 대단히 부강한 나라가 되면서 마르크스를 읽는 젊은이들이 사라집니다. 저자들은 눈에 보이는 사회적 모순이 은폐되었기 때문에 그랬다고 하는데 이는 적절한 지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눈앞에 고도 성장의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있는데 그걸 따먹기 전에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굶주리는 사람들'을 찾아나서기란 어려운 일이니까요. 마르크스를 읽는 가장 큰 현실적 추동은 바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공감과 연민과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데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두 저자는 요즘의 청년들에게 마르크스를 읽어보라고 권유하기 위해서 대단히 쉽게 마르크스의 주요 저작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퍽 인상적인, 매우 친절한 서문부터가 그렇습니다. 우치다 타즈루는 "머리가 허연 어른들이 땀을 뻘뻘 흘려가며 초심자에게 설명해주려고 아등바등하는 꼴을 보고, '저렇게까지 알아주었으면 할 정도로 마르크스는 매력적인가 보다' 하고 생각해주는 젊은이가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만족"이라고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이 책은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생각됩니다.

 

개인적으로 이 책에서 발견한, 아주 맘에 드는 조어가 있습니다. 마라토너들의 '러너스 하이'에서 따온 '아카데믹 하이'입니다. 우치다 타츠루는 마르크스를 읽는 이유로 '아카데믹 하이'를 듭니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은 쉽지 않지만 고도의 '지적 고양감'이라는 쾌감을 선사한다는 것이죠. 그러나 이게 그냥 지적 자기만족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마르크스를 읽으면 자신이 어떤 틀, 사고의 우리에 갇혀 있음을 명확히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벗어나야 한다는 강렬한 욕망을 느끼고요.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도 논문을 쓰기 전에는 반드시 책장에서 마르크스 책을 꺼내들고 아무 데나 펼쳐서 읽었다고 합니다. 그러면 "머릿속의 안개가 싹 걷히는 기분"을 느꼈다는군요. 그건 그가 갖고 있던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문제가 이전보다 더 선명하게 보였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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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제정신 -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산다
허태균 지음 / 쌤앤파커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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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태균 교수(고려대 심리학)가 쓴 <가끔은 제정신>(쌤앤파커스, 2012)의 부제는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산다’이다. 표제와 부제는 정확히 이 책의 주제를 요약제시하고 있다.

 

이 책은 쪽글을 모아놓은 형태의 대중 심리학 서적이지만 모든 글이 주제를 향해서 질서정연하게 수렴되고 있다. 그리고 실생활, 특히 연애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몇 가지 팁도 제공하고 있어서 청춘남녀들에게 독서 시간이 아깝지 않은 실용서라고도 할 수 있겠다.

 

누구나 타인의 착각 때문에 황당하거나 화가 나거나 기가 막히거나 코가 막혀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경험이 있다.

 

요즘 대학 도서관에 가보면 다 자동개폐기를 쓴다. 학생증을 대면 파란불이 들어오고 무사통과, 안 대거나 잘못 대면 빨간불이 들어오고 삐-익 소리가 나면서 접혀져 있던 판이 무릎높이에서 펼쳐진다.

 

어느 날 나는 학생증을 제대로 대고 파란불을 확인한 후에 도서관에 들어갔다. 필요한 책을 찾은 후 대출절차를 밟으려고 하는데 아, 글쎄 도서관 ‘알바’가 내게 “왜 학생증을 안 찍고 들어 왔어요?” 하고 묻는다. 학생증 바코드를 찍어봤더니 모니터에 그런 내용이 뜨나보다. 나는 분명히 찍고 들어왔다고 말했다. 하지만 ‘알바’는 한사코 내게 잘못 봤을테니 다시 학생증을 찍고 파란불을 확인하고 오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시 도서관 출입구로 내려가서 학생증을 찍고 파란불을 확인하고 와서 그 ‘알바’ 앞으로 갔다.

 

그런데 웬걸! 세 명의 학생이 줄을 서서 항의중이다. 분명히 학생증을 찍고 들어왔는데 안 찍고 들어온 것으로 뜬 것이다. 그 학생들은 ‘똥개훈련’을 시키느냐고 따졌다. 나는 그제서야 내가 착각한 게 아니라 그 ‘알바’가 착각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알바’는 얼굴이 빨개져서 내게 사과한다. 자동개폐기가 고장이 났다고 방금 전화가 왔단다.
 
<<가끔은 제정신>>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수많은 이런 착각들에 어떤 원인이 있는지 조목조목 사례를 들어서 알려준다.

 

일단 ‘알바’는 기계가 잘못되었을 거라는 생각을 경우의 수에 넣지 못했다. 그리고 상대방이 ‘착각’을 했을 것이라고 지레짐작했다. 이렇게 착각은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생기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착각을 좀 덜 하려면 ‘나도 틀릴 수 있다’, ‘나도 착각할 수 있다’고 자각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자, 당신은 착각해놓고 큰소리친 적은 없는가. 혹시 상대방이 착각하고 있다고 무턱대고 짜증낸 적은 없는가.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독자에게 반성을 권한다.

 

그렇다고 <<가끔은 제정신>>이 깊은 성찰을 요구하는 무거운 책은 아니다. 이 책에는 독자의 흥미를 끌 만한 매우 다양한 에피소드가 가득하다. 그중에서도 역시 남녀상열지사의 심리학이야말로 곶감 빼먹는 재미가 쏠쏠한 대목이다.

 

누구나 이성을 처음 만날 때는 잘 보이고 싶어서 자기를 꾸민다. 그리고 상대방 역시 그러한 꾸밈에 살짝 넘어간다. 만약 의식적으로 상대의 빈틈을 간파하려고 노력하기만 한다면 인류는 멸종했을 거라고 저자는 농담을 건넨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다음이 더 재밌다.

 

서로 콩깍지가 쓰인 경우에 그 커플을 제3자가 보면 뭐라고 하겠는가. 쟤들 지금 착각하는 거야.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런 착각이야말로 인류를 존속시키는 아름다운 착각 아니겠는가. 물론 콩깍지가 벗겨져서 다투고 끝내 헤어지는 커플도 부지기수다. 여기가 키포인트. 그렇다면 콩깍지 쓰인 커플이 서로의 호감이 착각이었음을 깨달아도 헤어지지 않으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우리에게 필요한 사람에게 우리는 최대한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 특히 첫인상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일단 호감이 형성된 다음에는 조금씩 작은 단점을 노출하는 게 좋다고 한다. 그러면 ‘에이, 이렇게 작은 단점 때문에 그동안의 관계를 망칠 수는 없지’하는 일종의 ‘본전심리’ 때문에 정이 싹튼다고 한다. 나이든 부부가 말하는 ‘이놈의 정 때문에’ 할 때의 바로 그 정 말이다. 일단 콩깍지가 정으로 바뀌면 그 커플은 오래오래 간다. 물론 ‘정 떨어질’ 만큼의 큰 단점을 노출하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가벼운 심리학 서적들은 늘 대중서 시장에서 인기를 누리는 법인데 <<가끔은 제정신>>은 인기를 누려도 좋을 만한 여러 가지 미덕을 갖추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자유와 책임에 대해서 말한다. 착각은 자유다, 하지만 책임이 따른다. 자유 중에 나만 가지는 자유가 어디 있으며 책임 중에 나에게만 주어지는 책임이 어디 있으랴. 그런 게 있다면 그건 정말 불공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착각 역시 만인의 자유다, 하지만 만인은 자신의 착각에 책임을 질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의식의 과정이 아니라 무의식의 과정 중에 생긴 착각을 어떻게 책임지느냐고. 앞서 말했듯이 늘 의식 속에 ‘나도 착각할 수 있다’는 겸손을 장착하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좀 더 부드러워지고 따뜻해질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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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변화한다 - 모옌 자전에세이
모옌 지음, 문현선 옮김 / 생각연구소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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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중국 국적 작가로는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모옌. 스웨덴 한림원은 그를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선정한 이유를 이렇게 명시했다.

"기괴하고 잔인한 사회상을 환각적 리얼리즘으로 풀어내며 새로운 문학세계를 창조했다."

모옌은 1955년 산둥성 가오미현에서 태어났다. 척박한 시골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에 문화대혁명을 겪었고, 가난과 불운 속에서 학업도 중단해야 했다. '기괴하고 잔인한 사회상'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눈앞에 나타났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가난과 불운과 정치적 격변 속의 인간상을 슬프거나 고통스럽게만 묘사하지는 않는다. 그는 '환각적 리얼리즘'을 통해 웃음과 심각함이 공존하는 '새로운 문학세계'로 나아간다.

<모두 변화한다>는 모옌의 자전적 에세이 혹은 자전 소설이다. 머리말에서도 밝혀뒀다시피 이 책은 인도의 어느 출판사 편집자로부터 청탁을 받아 쓰게 된 것이다. 주제는 지난 30년 동안 중국에서 일어난 '변화'였다. 모옌은 지나치게 주제가 넓고 감당하기 어려워 청탁을 거절한다. 그러나 편집자는 끈질겼다. 편집자는 원고 청탁을 거절하는 작가에게 3년 동안 매달리며 "어떻게 쓰든 마음대로", "무엇을 쓰든 마음대로"라고 한다. 이에 더 이상 거절하지 못한 작가는 자신의 개인사를 바탕으로 중국의 변화를 여실히 보여준다.  


중국의 변화 오롯이 담겨 있는 <모두 변화한다>

총 6장으로 이뤄진 <모두 변화한다>에는 세 명의 주요 등장인물이 나온다. 이 책의 화자인 모옌 그리고 그의 초등학교 동창생 두 명. 남자 동창의 이름은 허즈우, 여자 동창의 이름은 루원리다. 모옌은 어릴 적에 말이 많아 '재수 없는 아이'로 명명된다. 작문 시간에 '루원리의 아버지가 되고 싶다'는 글을 쓰고 그대로 학교를 나간 허즈우는 '천재 영웅'으로 그려지고, 가즈51 트럭을 모는 아버지를 둔 루원리는 학교에서 가장 예쁜 '입 큰 여학생'으로 기억된다.

1969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이 세 명의 인물이 살아온 삶이야말로 중국 사회의 변화를 예리하게 드러내는 절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사람은 아니지만 '소련제 가즈51'이라는 트럭 역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재수 없는 아이' 모옌은 입이 큰 류합마라는 선생의 별명을 '류하마'라고 지었다는 죄목으로 퇴학당한다. 사실 '하마'라는 별명은 그가 지은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말이 많아서 불운할 것이라는 어머니의 걱정대로 모옌은 누명을 쓰고 학교에서 쫓겨난다. 따라서 그가 훗날 본명 관모예를 버리고 모옌(莫言)을 취한 것은 일종의 자기풍자라 할 수 있다. 모옌이란 '말하지 않는다'라는 뜻이다.

학교를 나온 모옌은 농사를 짓다가 목화 가공 공장에 들어간다. 그는 공장 생활에 만족하지만 출세의 길은 막혀 있다고 느낀다. 그는 가난하고 학벌도 없는 사람이 출세할 수 있는 단 하나의 길을 택한다. 바로 군입대였다. 인민해방군에 입대한 그의 꿈은 '가즈51' 같은 트럭을 모는 운전사가 되는 것이었다. 군대에서 운전을 배우기를 바랐던 것인데, 그 꿈은 운전병이 북경에서 오는 바람에 좌절된다.

운전을 배우진 못했지만 그는 우여곡절 끝에 군대에서 예술 단과대학에 다니게 되고 본격적으로 소설을 쓰게 된다. 그리고 등단을 하고 중국을 대표할 차세대 작가로서 주목을 받게 된다. 1987년 발표한 <홍꺄오랑 가족>은 장이머우에 의해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로 나왔고, 이후 모옌은 세계적인 작가 반열에 오른다. 그리고 2012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한다. 가난한 시골 동네의 '재수 없는 아이'가 중국을 대표하는 작가가 돼 노벨상을 받게 된 것이다.

'천재 영웅' 허즈우는 자기 발로 학교를 나간 뒤, 덩샤오핑의 등장 이후 사업으로 막대한 돈을 번다. 처음엔 말이나 양을 사고 팔아 돈을 벌던 허즈우는 나중에는 부동산 개발 사업으로 칭다오에 빌딩 여러 채를 가긴 대부호가 된다. 그가 이렇게 많은 돈을 번 이유는 루원리와 결혼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폐차 직전의 '가즈51'을 루원리 아버지에게 사서 호감을 얻는 것에 성공하지만 루원리의 마음은 얻지 못한다. 그는 '가즈51'을 고향집에 놔두고 도시로 나와 러시아계 중국인과 결혼해 두 명의 딸을 낳는다. 후에 그는 고향을 떠날 때 약간의 돈을 빌려준 모옌에게 호텔 스위트룸을 빌려 융숭하게 대접하며 옛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모두를 매혹시켰던 '트럭', 사라지다

가장 예뻤던 여학생 '루원리'는 우체국에서 근무하다가 현 위원회 부서기의 아들과 결혼한다. 하지만 도박과 폭행을 일삼던 남편은 사고로 일찍 죽는다. 과부가 된 루원리는 예전에 자신에게 청혼했던 허즈우를 찾아간다. 하지만 허즈우는 그녀에게 자신은 이미 결혼을 했으니 '첩'이 되겠느냐고 묻는다. 첩이 되면 모든 생활을 다 책임져 주겠다고 하면서. 그녀의 자존심을 그것을 허락할 수 없었다.

얼마 후 루원리는 모옌을 퇴학시켰던 하마 선생 류합마와 재혼한다. 둘 사이에서는 딸이 태어난다. 모옌이 다시 만났을 때 루원리는 또 남편을 잃어 과부였고, 딸의 앞날을 위해 그에게 일종의 '뇌물'을 주러 온다. 젊은 날 모옌이 고향을 떠날 때, 얼굴이라도 한 번 보고 싶어했던 루원리, 싸늘한 시선으로 모옌을 돌려보내던 바로 그 콧대 높은 미녀가 50대 과부가 돼 그의 앞에 초라하게 나타난 것이다.

이 세 동창생의 삶의 궤적을 통해 모옌은 중국의 지난 30년을 반추한다. 세 동창생의 개인사 속에는 배꼽 빠지는 유머도 있고, 서럽고 슬픈 이야기도 있다. 중요한 점은 모옌이 웃음과 슬픔의 기우뚱한 균형을 기가 막히게 잡으면서 '변화'가 갖고 있는 쓸쓸함의 속성을 핍진하게 드러낸다는 것이다. 세 인물의 희로애락과 중국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겪었던 역사적 과정은 씨줄과 날줄처럼 정교하게 교직된다. 문학이 한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시대와 역사를 드러내는 것이라 할 때 <모두 변화한다>는 매우 훌륭한 교과서라 할 만하다.

참고로 '가즈51'은 루원리에게 퇴짜 맞은 허즈우가 고향집에 그대로 세워두고 있다가 장이머우 감독이 <붉은 수수밭>을 찍을 때 영화 소품으로 팔린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불타 없어져 버린다. 한때는 동네 사람들 모두를 매혹시켰던 트럭이 모두의 눈앞에서 사라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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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이 - 개정판,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 문주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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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지옥, 형제복지원

 

만약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채, 낯선 곳으로 끌려가서 감금된다고 생각해보라. 거기에 수천 명의 사람이 당신처럼 끌려와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면 어떻겠는가? 날마다 구타와 폭행, 심지어 강간과 살인까지 일상이 돼버린 곳이라면 당신은 그곳을 뭐라고 부르겠는가?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병이 들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결정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절대 없다면? 탈출하다 잡히면 죽을 때까지 맞다가 결국 죽어야 하는 곳이라면? 그렇다. 당신은 아마 그런 곳을 '지옥'이라고 부를 것이다.  

 

가장 끔찍한 지옥은 신이 마련하지 않고 인간이 만든다. 인간의 악마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 지옥의 이름은 '형제복지원'이다. 얼마나 긍휼한 이름인가. 오갈 곳 없는 이들, 몸과 마음이 불편한 이들을 형제처럼 여기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곳. 그러나 실상은 이 이름과 너무나 달랐다.   

 

 

지옥에서 생환한 자의 목소리 

 

전규찬이 기획하고, 한종선·전규찬·박래군이 나눠 쓴 <살아남은 아이>는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에서 생환한 한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한종선이다. 1975년생인 그는 1984년 늦은 밤, 작은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간다. 놀랍게도 9살짜리 아이를 그 생지옥에 인계한 것은 동네 파출소의 경찰이었고, 그를 파출소에 데려간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생계가 어려운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자의로 형제복지원에 입소시켰다.  

 

그의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이 생지옥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장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듯이 그렇게 형제복지원에 아이를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종선의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에 수용된다. 결과적으로 한종선의 가족은 형제복지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198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한종선과 그의 어린 누이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 감금되었고, 구타와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나마 한종선은 이렇게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쓸 만큼 멀쩡한 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의 누이와 아버지는 다섯 살짜리 지능의 정신병자가 되어 또다시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고 있다.  

 

3년의 세월 동안 한 가족이 풍비박산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도 그들은 천형처럼 형제복지원의 그늘에서 인생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건을 너무 축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는 한종선과 그의 가족뿐만이 아니니까.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수용되어 있었고, 5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그 안에서 죽었다. 이 수백 명은 맞아 죽었고, 치료를 못 받아 죽었고, 영양실조로 죽었으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피해자의 고통은 영원한데 가해자는 잘살고 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만약 당신이 이런 끔찍한 사건을 겪었는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겠는가?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고, 불구로 만들고, 성폭력을 휘두르고, 횡령을 일삼은 겉은 인면수심의 범죄 수괴가 고작 2년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와서 다시 사회복지계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면? 한종선과 그의 가족은 아무런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고,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을 설계하고 운영한 박인근은 짧은 징역을 살고 나와 부산에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고 수백 년 전의 사건도 아니다. 피해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고 가해자가 복지재벌로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한종선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 때 너무나 억울해서 국회 앞에서 무작정 1인 시위를 했다. 그러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이자 문화연구자인 전규찬 교수를 만났다. 전규찬 교수는 한종선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고, 한종선은 무작정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1인 시위 대신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전규찬 교수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목소리를 내고, 그만의 언어를 찾는 것을 도왔다. 거기에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다른 복지원들의 사례를 첨부하고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글을 더해 <살아남은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실은 수용소인 복지시설에 관한 문화연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권유린에 대한 역사적 이해로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 모두 형제복지원과 그것이 상징하는 야만성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를 함께 치유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또 하나. 솜방망이 처벌 끝에 다시 사회에 나와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면서 제 욕심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복지재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져야 한다.  

 


또 다른 지옥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할 일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은 이제 서른아홉 살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또 어떤 복지원에서 이런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지 않을까 걱정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여전히 찬물로 샤워를 못하고, 밤에 불을 끄면 잠을 자지 못한다. 모두 복지원에서 당한 일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물고문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을 일삼은 자들은 어딘가에서 편하게 잘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은가.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한종선의 증언을 듣는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그 외면하고 싶은 지옥을 먼저 똑똑히 보자. 그다음에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형제복지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거기에 수용된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형제복지원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인간이 만든 지옥을 한번 보라. 그 지옥을 만드는 데 침묵하는 방관자들도 한 몫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부제는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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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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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숨에 읽힌다고 해서 꼭 좋은 책은 아니다. 반대로 중간에 책장을 덮게 만드는 책 또한 꼭 나쁜 책은 아니다. 끝장까지 손을 떼지 못하게 하다가 막상 책장을 덮으면 남는 게 별로 없는 책도 있고, 한꺼번에 읽기가 아까워 야금야금 읽어야 하는 책도 있기 때문이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단숨에 읽히는 책이면서 조금씩 읽는 맛이 일품인 책이다.

 

 

집의 마음을 들춰보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한겨레에서 건축과 미술을 담당하고 있는 구본준 기자의 건축 에세이다. 흔히 건축에 관한 책이라고 하면 딱딱하거나 밋밋하지 않을까 지레짐작한다. 하지만 이 책은 건축학적 지식이 아니라 집이 품고 있는 마음을 들려주고 있어서 독자의 감성을 촉촉하게 물들인다.  

 

왜 이 책은 단숨에 읽히는가? 이 책의 부제는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이다. 부제가 알려주는 바대로 이 책에 나오는 건축물은 기쁨, 분노, 슬픔, 즐거움 이렇게 네 가지 감정을 보여준다. 독자는 희로애락의 감정을 모두 느끼고 싶어서 16개의 집을 한꺼번에 둘러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다. 어느 건축물에 얽힌 사연이든 읽고 있노라면 집이 간직하고 있는 그 마음에 사로잡혀 책장을 슬그머니 덮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씩 맛을 보며 읽는 책이기도 하다.

 

 

슬픔을 기쁨으로 승화시키는 건축 

 

이를테면 이 책에서 가장 먼저 소개하는 '기쁨의 집'인 이진아기념도서관을 보자. 서대문구 독립공원에 위치한 이 도서관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다면 '이진아가 누군가?' 하고 생각해보았을 지도 모른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을 읽으면 이진아가 누군지, 어째서 도서관에 그녀의 이름이 붙었는지 알게 된다. 그뿐이랴. 건축이 슬픔을 어떻게 기쁨으로 승화하는지 엿보게 될 것이고, 잠시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끼게 될 것이다. 책장을 덮고 숨을 고르게 될 것이다.

 

'기쁨'에 속한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이나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순천 기적의 도서관에 얽힌 이야기를 읽고 나면 기쁨으로 충만한 마음이 발바닥으로 전해진다. 이 기쁨의 집들을 보고 싶어서 발바닥이 근질근질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저자는 건축물의 '귀여움'에 대해서 여러 차례 언급하고 있는데, 바로 그 귀여움을 직접 확인해 보고픈 마음은 두근두근 거린다.  

 


분노를 품은 집, 분노를 일으키는 집

 

'기쁨' 다음엔 '분노'의 장이 펼쳐진다. '분노의 집'인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은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를 드러내는 동시에 그 상처의 가해자들에 대한 분노를 촉발하고, 피해자들에 대한 치유를 염원한다. 화를 내지 않고 안으로 삭히기만 하면 마음은 병이 든다. 감추기면 하면 병을 더 키우는 법이다. 건축물은 화를 내기도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치유에 이르기도 한다. 그것을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 보여주고 있다. 이곳도 얼른 가보고 싶어진다.  

 

이어 나오는 도동서원은 연산군 집권 시기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희생된 김굉필을 모시는 곳이다. 시대를 잘못 만나 순교자가 되었지만 그는 사림의 우상이 되었다. 도동서원은 우상을 기리는 사림의 헌사가 건축물이 된 것이다. 따라서 서원 자체가 김굉필의 오기와 자존심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어서 '분노의 집'으로 분류되었다. 도동서원은 우리에게 화려함보다는 소박함과 지성을 보여주는 깐깐한 건축물이다.

 

시드니 오페라하우스는 건축주와 건축가의 전쟁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며, 얄궂게도 그것과 상관없는 건축물의 운명이 따로 있음도 전해준다. 김수근이 설계한 옛 부여박물관은 하도 욕을 많이 먹어서 '분노의 집'이 된 경우다. 왜 욕을 많이 먹었는지 책을 읽고 확인하면 재미있을 것이다.  

 

 

슬픔의 건축에서 고 노무현 대통령의 운명을 생각한다 

 

세 번째 장인 '슬픔'에서 우리는 봉하마을 묘역을 만난다. 누구도 예상할 수 없었던 고 노무현 대통령의 마지막을 다시금 떠올리는 일은 여러 가지 상념에 빠지게 한다. 봉하마을 묘역은 낮은 비석 하나와 광장으로 이루어졌다. 운명이다. 묘역은 죽음을 담은 공간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삶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그저 '운명이다'라고 했던 고인의 삶과 죽음은 이 묘역에서 더욱 강렬하게 되새겨진다. 

 

시기리야 요새와 아그라포트는 가려면 너무 먼 곳이기에 발바닥까지 전해지지는 않지만 마음에는 분명한 무늬의 감정을 찍어놓는다. 불멸의 건축물과 불멸의 이야기는 있어도 그 건축물과 이야기의 주인공은 사라지고 없다. 만고에 칭송되는 위대한 건축물은 도리어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극명히 드러낸다.

 

뒤이어 미국 세인트루이스의 프루이트 아이고와 서울의 세운상가는 불행했던 아파트로 등장한다. 잘못된 도시계획은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법. 도시계획을 담당하는 이들은 반드시 이 책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을 명심해야 한다.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건물과 도시, 건물과 건물, 건물과 인간 사이의 유기적이고 건강한 순환관계이다."(230쪽)  

 

랜드마크 건물 몇 개 만들어놓으면 상권이 형성되고 경제가 발전하리라는 썩은 생각을 버려야 한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건축 이야기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마지막 장은 '즐거움'이다. 창덕궁, 선교장, 충재 등 한국 전통건축의 명작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바라건대 대한민국 모든 초중고교의 소풍으로 위의 장소에 갈 경우, 이 책을 학생들에게 미리 읽혔으면 좋겠다. 고궁을 가든 전통가옥을 찾든 그곳을 그저 슬쩍 훑어보고 오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은 그것이 얼마나 손해인지 가르쳐준다.  

 

맨 마지막에는 건축가 문훈의 사무실인 문훈발전소가 나온다. 그곳을 보면 사무공간이 얼마나 개성적일 수 있는지, 또 얼마나 재미를 추구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엄숙주의와 기능주의를 넘어서 재미를 추구하는 것도 하나의 '가치'이다.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은 집을 짓는 것이 인간이며 그 인간의 마음이 집에 담긴다는, 어찌 보면 아주 당연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집은 사람이 사는 공간이 아니라 사고파는 물건이 된 지 오래다. 건물을 보면 가격부터 매겨보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또 그런 사람 역시 인격이 아니라 스펙으로 가격이 매겨지는 시대다. 그런 점에 비추어 보면 이 책은 건축물조차 마음을 품은 존재로 파악하는 매우 인간적인 책이다. 이 책이 품은 마음을 들춰보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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