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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남은 아이 - 개정판,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
한종선.전규찬.박래군 지음 / 문주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인간이 만든 지옥, 형제복지원
만약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영문도 모르는 채, 낯선 곳으로 끌려가서 감금된다고 생각해보라. 거기에 수천 명의 사람이 당신처럼 끌려와서 짐승보다 못한 취급을 받는다면 어떻겠는가? 날마다 구타와 폭행, 심지어 강간과 살인까지 일상이 돼버린 곳이라면 당신은 그곳을 뭐라고 부르겠는가? 밥도 제대로 주지 않고, 병이 들어도 치료해주지 않는다면? 결정적으로 그곳에서 빠져나갈 방법이 절대 없다면? 탈출하다 잡히면 죽을 때까지 맞다가 결국 죽어야 하는 곳이라면? 그렇다. 당신은 아마 그런 곳을 '지옥'이라고 부를 것이다.
가장 끔찍한 지옥은 신이 마련하지 않고 인간이 만든다. 인간의 악마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그 지옥의 이름은 '형제복지원'이다. 얼마나 긍휼한 이름인가. 오갈 곳 없는 이들, 몸과 마음이 불편한 이들을 형제처럼 여기고 그들의 복지를 위해 존재하는 곳. 그러나 실상은 이 이름과 너무나 달랐다.
지옥에서 생환한 자의 목소리
전규찬이 기획하고, 한종선·전규찬·박래군이 나눠 쓴 <살아남은 아이>는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에서 생환한 한 아이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 아이의 이름은 한종선이다. 1975년생인 그는 1984년 늦은 밤, 작은누나와 함께 형제복지원에 끌려간다. 놀랍게도 9살짜리 아이를 그 생지옥에 인계한 것은 동네 파출소의 경찰이었고, 그를 파출소에 데려간 사람은 그의 아버지였다. 생계가 어려운 그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자의로 형제복지원에 입소시켰다.
그의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이 생지옥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한 가장이 고아원에 아이를 맡기듯이 그렇게 형제복지원에 아이를 맡겼을 것이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한종선의 아버지도 형제복지원에 수용된다. 결과적으로 한종선의 가족은 형제복지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난다.
1987년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형제복지원 사건'으로 복지원이 폐쇄될 때까지 한종선과 그의 어린 누이 그리고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 감금되었고, 구타와 성폭력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나마 한종선은 이렇게 자신이 겪은 일을 책으로 쓸 만큼 멀쩡한 정신을 갖고 있다. 하지만 그의 누이와 아버지는 다섯 살짜리 지능의 정신병자가 되어 또다시 정신병원에 갇혀 지내고 있다.
3년의 세월 동안 한 가족이 풍비박산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시간도 그들은 천형처럼 형제복지원의 그늘에서 인생의 햇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건을 너무 축소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형제복지원 사건의 피해자는 한종선과 그의 가족뿐만이 아니니까. 3000명이 넘는 사람이 수용되어 있었고, 500여 명이 넘는 사람이 그 안에서 죽었다. 이 수백 명은 맞아 죽었고, 치료를 못 받아 죽었고, 영양실조로 죽었으나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
피해자의 고통은 영원한데 가해자는 잘살고 있다
다시 한 번 묻는다. 만약 당신이 이런 끔찍한 사건을 겪었는데 아무런 보상을 받지 못했다면 어떻겠는가? 수많은 사람을 죽게 만들고, 불구로 만들고, 성폭력을 휘두르고, 횡령을 일삼은 겉은 인면수심의 범죄 수괴가 고작 2년 6개월의 형을 살고 나와서 다시 사회복지계의 왕 노릇을 하고 있다면? 한종선과 그의 가족은 아무런 피해보상을 받지 못했고, 형제복지원이라는 지옥을 설계하고 운영한 박인근은 짧은 징역을 살고 나와 부산에서 떵떵거리며 잘살고 있다. 이건 뭔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것이 아닌가? 이것은 먼 나라의 이야기도 아니고 수백 년 전의 사건도 아니다. 피해자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고 가해자가 복지재벌로 지금도 호의호식하며 살고 있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이다.
한종선은 자신의 삶을 돌이켜볼 때 너무나 억울해서 국회 앞에서 무작정 1인 시위를 했다. 그러던 중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이자 문화연구자인 전규찬 교수를 만났다. 전규찬 교수는 한종선에게 글을 써보라고 권유했고, 한종선은 무작정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기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했던 1인 시위 대신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전규찬 교수는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가 목소리를 내고, 그만의 언어를 찾는 것을 도왔다. 거기에 인권운동가 박래군이 다른 복지원들의 사례를 첨부하고 문제점과 해결방안을 모색하는 글을 더해 <살아남은 아이>가 탄생한 것이다.
이 책은 단순히 과거에 대한 기록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사실은 수용소인 복지시설에 관한 문화연구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인권유린에 대한 역사적 이해로서 끝나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 모두 형제복지원과 그것이 상징하는 야만성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아직 끝나지 않은 상처를 함께 치유하기 위해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여기에 또 하나. 솜방망이 처벌 끝에 다시 사회에 나와 사회사업가로 활동하면서 제 욕심 챙기기에 여념이 없는 복지재벌들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의도 이어져야 한다.
또 다른 지옥을 만들지 않기 위해 할 일
지옥에서 살아남은 아이 한종선은 이제 서른아홉 살이 되었다. 그는 우리나라의 또 어떤 복지원에서 이런 지옥도가 펼쳐지고 있지 않을까 걱정한다. 살아남은 아이는 여전히 찬물로 샤워를 못하고, 밤에 불을 끄면 잠을 자지 못한다. 모두 복지원에서 당한 일 때문이다. 그런데 어린 아이에게 물고문하고,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폭력을 일삼은 자들은 어딘가에서 편하게 잘살고 있다.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끔찍하지 않은가.
우리가 먼저 해야 할 일은 한종선의 증언을 듣는 것이다.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그 외면하고 싶은 지옥을 먼저 똑똑히 보자. 그다음에 이런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
형제복지원을 기억하는가? 그렇다면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거기에 수용된 사람들이 아직도 고통스럽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한다. 형제복지원을 모르는가? 그렇다면 <살아남은 아이>를 읽고 인간이 만든 지옥을 한번 보라. 그 지옥을 만드는 데 침묵하는 방관자들도 한 몫 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참고로 이 책의 부제는 '우리는 어떻게 공모자가 되었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