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 런웨이 현대문학 핀 시리즈 소설선 36
윤고은 지음 / 현대문학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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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거상 수상작 ‘밤의 여행자들‘ 너무 좋아서 신간 나왔다는 소식에 바로 읽었어요. 전작의 선명한 플롯이 주는 흥미와 또 다르게 결혼보험이라는 특이한 소재를 매개로 한 인물의 섬세한 감정선들이 정말 재미있게 읽혔어요. 드라마화 해도 좋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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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차와 히치하이커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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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두 작품이 좋았어요. <불타는 작품>에서 개가 미술의 후원자라는 설정은 예술에 대한 신랄한 유머였습니다. <오두막>은 읽는 이의 죄의식과 부끄러움을 들춰내더군요. 소설을 통해 가벼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맛보고 싶은 분께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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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게이트 - 불법 사찰 증거인멸에 휘말린 장진수의 최후 고백
장진수 지음 / 오마이북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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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없는 공무원이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까지 

 

노량진의 공무원 시험 전문학원은 안정된 직장을 얻으려는 젊은이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지난해 9급 국가직 공무원 시험 응시자 수는 20만 4698명으로 치솟아 경쟁률은 74.1대 1에 육박했다. 어느 대학이든 학과에 상관없이 공무원 시험을 공부하느라 도서관 불빛을 밝히는 학생들로 넘쳐나고, 심지어 지방의 어느 대학에는 공무원 학과까지 있다.

 

이렇게 공무원에 대한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이유는 무엇인가. 앞서 말했듯이 이는 '안정된 직장'에 대한 '로망' 때문이다. 공무원들이 국민에 대한 봉사, 국가에의 헌신을 입으로 떠든다고 해도 그 속을 믿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렇기 때문에 이율배반적으로 공무원이라는 '직업'에 대한 인기가 올라갈수록 공무원과 그들이 하는 일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지게 된다. 다시 말해서 '안정된 직장'을 지키기 위해서 공무원들이 '위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온 말이 '영혼 없는 공무원'이다.

 

국무총리실 공직윤리지원과실에 근무했던 장진수 씨가 쓴 <블루 게이트>는 한 '영혼 없는 공무원'이 어떻게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당당한 한 인간으로 거듭났는가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이 귀한 이유는 두 가지다. 저자가 '영혼 없는 공무원' 시절을 전혀 미화하지 않고 드러낸다는 점이 귀하고, 자유로운 인간이 되기 위해 어떤 유혹과 타협의 목소리를 거부했는지 가감 없이 펼쳐 보인다는 점이 또 귀하다.   

 

첫 업무부터 불법행위

 

장진주 전 주무관은 어떤 공무원이었나. 2009년 7월 31일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첫 근무한 날을 그는 이렇게 적었다.

 

  업무세팅이 되지 않아 어수선한 상태였지만 첫날부터 시킨 일을 버벅거린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최대한 신속하게 해치우기로 마음먹었다. 곧장 김경동 주무관에게 전화를 걸어 관서운영비 통장, 직인(도장), 관련 서류가 어디 있는지와 통장 비밀번호를 파악하고, 그가 하던 대로 결재 서류를 만들어 사인받은 후 은행으로 달려가 돈을 찾았다. 그리고 이중봉투 세 개에 각각 200만 원, 50만 원, 30만 원을 넣고, 헷갈리지 않게 봉투 안쪽에 맨 앞자리 숫자들을 연필로 적은 후(이영호 비사관 봉투에는 E라고 적음) 진경락 과장에게 슬며시 갖다 주었다.

  이것이 나의 첫 임무였다. 불법이었다. 지원관실에 자리를 옮긴 지 불과 몇 시간 만에 벌어진 불법 행위. 나는 그저 업무라고 생각해 빈틈없이 신속하게 처리했고, '이 정도면 상관에게 좋은 부하직원으로 비치기에 충분할 것'이라는 엉뚱한 자부심에 스스로 뿌듯해하고 있었으니 당시의 그런 내 모습을 떠올리면 헛웃음만 나올 뿐이다. (32-33쪽)

 

'관료제의 악몽'을 다룬 카프카 소설의 서두 같지 않은가. 지금 이 시간에도 '안정된 직장'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어느 공무원 지망생이 실제로 공무원이 되어 어느 국가기관에서 위와 같이 행동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업무 파악도 되지 않은 상태에서 일이 주어졌을 때, '이거 불법적인 일 아닙니까, 저는 이런 일 못합니다, 자꾸 시키면 관계기관에 고발하겠습니다!'라고 말할 '부하직원'이 있기나 할까.

 

<블루 게이트>는 국민에 대한 마지막 봉사

 

<블루 게이트>는 이명박 정부 시절의 민간인 사찰 증거인멸 사건을 다루고 있다. 민간인 사찰은 반헌법적인 국가폭력이며 그것에 대한 증거인멸은 뻔뻔한 불법행위이다. 장진수 전 주무관은 어떻게 국가기관에서 이런 '있을 수 없는 일'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었는지, 누구에 의해 그런 일들이 꾸며졌는지 매우 소상히 밝히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책에서 여러 차례 밝히고 있듯이 국가와 국민에 대해 마지막 봉사를 한 셈이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진실을 밝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민간인 사찰 증거인멸 사건의 '공범'이라는 법원의 판결이다. 그뿐인가. 그는 그 판결의 결과로 '안정된 직장'을 잃었다. 자유로운 인간으로 거듭난 장진수는 더 이상 국민에 대한 봉사, 국가에의 헌신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역시 공무원은 영혼이 없어야만 되는 것일까. 시키면 시키는 대로 일이나 잘 해야 되는 것일까. 입을 다물라고 하면 입을 다물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진실을 말하는 입은 더 크게 벌어져야 한다.

 

장진수는 자신이 '공범'이 아니라는 것을 밝히기 위해서 개인적 차원에서 억울함을 풀기 위해 진실 고백을 하고 책까지 쓰게 되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는 장진수라는 개인에게 국한되지 않고 사회 전체로 확대된다. 우리 사회가 삼성의 비리를 만천하에 고발한 김용철 변호사나 MB 정부의 민간인 사찰을 고발한 장진수 전 주무관을 '정의의 사람들'로 보호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불의의 공범'들에 둘러싸야 살아갈 수밖에 없다.

 

내부고발자 장진수를 응원하는 이유

 

장진수 전 주무관이 국무총리실에 근무하면서 경험한 아래의 사례들을 보자.  

 

  부모 덕분에 시험도 치르지 않고 공무원이 된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고모부가 공무원인 덕분에 고모부가 근무하는 부서로 취업이 된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동생이 청와대로 부임한 덕분에 말년을 승승장구 승진하다 어느 공기업의 높은 자리로 가는 공무원을 본 적이 있는가? 사무실에서 100만 원 이상의 큰돈이 없어져도 누가 훔쳤는지 범인을 찾지 못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음주운전으로 사망 사고를 내고도 별문제 없이 계속 공무원을 하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사무실에 화재가 나서 온갖 공문서와 컴퓨터가 모조리 타버려도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경우를 본 적이 있는가? 나는 이 질문들에 모두 "예"라고 답한다. 모두 내가 국무총리실에서 경험한 일이기 때문이다. (161쪽)

 

이건 우리가 생각하는 국가나 정부의 모습과 정반대다. 그런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내부고발자가 없다면 위의 사례에서 보듯이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관이 사적 이익을 위한 장이 되어버릴 위험이 크다. 그러므로 국가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면 양심적인 내부고발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일상이 망가져버리지 않도록 감시의 눈을 떠야 한다. 다행히 '장진수와 함께하는 사람들'이라는 모임도 출범했고, 이렇게 <블루 게이트>라는 책도 나와 장진수 전 주무관은 쉽게 망각 속으로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이 책을 읽음으로써 우리 사회의 양심을 지키는 데 일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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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권력 -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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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자유주의 권력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의 원서 부제는 “푸코에서 현재성의 철학으로”였다. 번역자 김상운 씨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부제를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로 바꿔 달았다. 원서의 부제보다 김상운 씨가 바꿔 단 부제가 이 책의 요점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신자유주의와 권력’에서는 ‘자기-경영적 주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추적한다. 2부 ‘저항의 전략’에서는 ‘자기-경영적 주체’가 되어 무한 경쟁에 휘둘리고 있는 주체가 어떻게 탈주체화, 탈복종화의 길로 접어들어 ‘소수자-되기’라는 저항을 실천할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탐색한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의 1부는 매우 명료하게 이해되는 데 반해서 2부는 저자가 중언부언한다는 느낌이 짙고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이 책의 2부와 보론에 나타난 ‘저항의 전략’에 대해서는 말을 아낄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1부의 제목과 같다. 목차만 보았을 때도 책의 구성이 긴밀하지 않고, 접합 부분이 헐겁다는 생각을 들었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간명한 설명

 

그러나 이 책은 1부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관해서 그 어떤 책보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이론가가 늘 그렇듯이 사토 요시유키는 세간에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에 대한 속설부터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흔히 신자유주의는 그 용어 때문에 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쯤으로 이해되기 쉽다. 혹은 자유주의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 그도 아니면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규제 철폐를 단행해 시장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는 자연스런 조류로 인식하거나. 하지만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결코 자연스런 것이 아니란 점을 일깨운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시장 메커니즘이란 ‘자연’ 가격을 형성하는 교환인 것이다. 이에 반해, 질서 자유주의에서 시장이란 ‘경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쟁’이란 시장에서 발견되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는 점이다. …… 경쟁은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며, 오히려 그 ‘내적 논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즉 경쟁이 개개인의 활동을 조절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어야 한다. 요컨대 경쟁은 통치에 의한 구축적인 노력의 결과로 산출되는 것인데, 이것이 사회의 통치 원리이다.……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사회의 모든 국면에 경쟁 메커니즘을 구축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통치하려고 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시장 안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경쟁을 구축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조직화하는 이념을 보존[견지]했다고 한다면, 그런 통치는 필연적으로 ‘자유방임’일 수 없으며, 시장 안에 경쟁을 구축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을 수반하게 된다.(34-37쪽, 이하 강조는 인용자)

 

시장이 된 세계, 기업이 된 개인

 

정부가 부동산에 관련된 각종 규제를 풀어주거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을 결코 시장 자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방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규제를 풀거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권력 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법률은 말 그대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합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법적 조치다. 케인즈적인 복지국가 시스템이 ‘규율’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고 했다면 신자유주의 권력은 ‘경쟁’을 통해 이미 시장화된 사회와 기업화된 개인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사회체의 기초적 구성단위를 ‘기업’이라는 형태에서 찾아내고 마침내 사회체를 ‘기업’이라는 형태로 뒤덮어 버리려고 한다. (47쪽)

 

사회체의 기초 구성단위가 ‘기업’이 되어버리면 그 속의 개인 역시 ‘기업화’한다. 따라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어느 순간으로 인적 자본이라는 자본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인적 자본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여기에 ‘자기계발의 담론’이 자연스레 덧붙여진다. 예컨대 실업과 같은 문제나 이제 정부나 사회의 몫이 아니다. 자신의 인적 자본을 투자하고 관리하지 못한 개인의 탓이 된다. 

 

인간에서 인적 자본으로

 

여기서 언급된 ‘투자’란 단순히 아이의 교육에 자본을 쏟아붓는 것처럼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의 투자가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수유를 하고 애정을 쏟는 것 같은 비경제적 행위조차 ‘투자’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의 기초에 있는 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희소 자원을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할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예를 들면, 이 경우 부모가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라는 희소 자원을 인적 자본의 형성, 즉 아이의 교육이라는 목적을 위해 얼마나 선택적으로 배분하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런 접근법에 의해 인적 자본 이론은 비경제적인 행위의 영역에까지 경제적 분석의 범위를 확대한다. 이것은 비경제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을 경제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사고로 귀결된다.(52쪽)

 

인간이 인적 자원으로 화하는 순간, 인간의 모든 영역은 곧 경제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이제 인간은 이런 기업화된 개인들이 모여 있는 시장에 살아야 한다. 이 삶을 거부하는 자, 이 삶의 요건에 충족되지 않는 자는 시장에서 추방된다. 시장에서 추방되는 것은 곧 삶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삼이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시장에서의 삶을 위해 자기를 계발하고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다. 모두가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어야 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환경(즉 시장)의 변화에 대응해 자신을 가역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 주체/행위자agent이다.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시장 원리로 사회체를 전면적으로 뒤덮어 버림으로써 쉽게 ‘조작 가능’maniable하고 ‘통치 가능한’gouvernable 주체, 즉 시장원리를 내면화한 자기-경영의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55쪽) 

 

범죄도 '최적화'하는 신자유주의 권력

 

자, 이제 시장에 권력이 적극 개입하여 경쟁하는 환경만 조성하면 그 안의 인간은 알아서 기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한 개인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통치가 아니라 환경을 조성하는 통치라는 것이다. 근대 시민을 규율했던 판옵티콘은 개개인을 감시하고 규율했다. 이 감시와 규율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마음 속 판옵티콘의 구축을 강제했다. 만약 이 감시와 규율에서 일탈하면 처벌이 따랐다. 근대 권력이 꿈꾸었던 것은 모든 일탈을 잡아내어 처벌하는 것, 그리하여 범죄율이 0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권력은 이렇게 각 개인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나 일탈마저도 경제적 분석을 통해 시장에서 최적화할 수 환경을 조성할 뿐이다. 예컨대 푸코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에서 마약 시장의 문제를 다른다. 1970년대 전반까지 마약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마약 생산자와 판매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니 시장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소수의 마약 생산자와 판매 조직이 시장을 독점하게 되어 마약 가격이 급상승한 것이다. 게다가 마약 중독자에 의한 범죄가 증대했다. 마약의 수요는 시장에서 비탄력적이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 가격이 상승하면 마약을 끊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비싼 마약을 구매한다. 따라서 마약 공급을 감소시키는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인 마약 정책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시장에서 마약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마약 소비자를 막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높은 가격에 마약이 거래되도록 시장을 조정하면서 낮은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위험성 낮은 마약에 대해서는 관용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범죄마저도 시장의 수요, 공급처럼 최적화를 꾀할 뿐 전면 소탕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신자유주의 권력이란 환경에 개입하고 환경을 설계함으로써 통치 불가능한 우연적 요소를 통치 가능한 것으로 변환하는 권력인 것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그런 우연적 요소를 ‘인구’라고 불러도 좋다. 환경 개입 권력은 다양하고 우연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인간의 군집을 ‘인구’라는 통계적 대상으로 변환하며, 출생률, 질병률, 사망률 등의 통계적 데이터로 다룸으로써 통치 가능한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 개입 권력이란 인간의 생명[삶]을 마치 통치의 대상으로 삼는 생명 정치의 한 가지 변형인 것이다. (73쪽)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푸코가 말한 ‘생명 관리 정치’이다. 생명 관리 정치는 개인을 중심으로 그 개인을 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라는 통계적 대상으로 변화하여 통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 이럴 때 개개인의 삶은 사라지고 통계적 데이터가 남는다. 재미난 예. 발이 삶아질 정도로 뜨거운 물이 담긴 양동이와 발이 얼 정도의 차가운 물이 담긴 양동이에 한 발씩 담근 사람이 있다고 치자. 두 양동이에 담긴 물의 평균값을 구해 통계를 내면 두 발은 모두 미지근한 물에 담겨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실상은 한쪽 발은 화상을, 다른 쪽 발은 동상을 입을 지경인 것이다. TV 토론에 나온 곡학아세 전문가들은 주로 이런 통계 제시 방식으로 현실을 왜곡하기 일쑤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권력은 (시장) 환경에 개입하여, 개개인을 감시/규율하지 않아도 그들이 경쟁 원리에 입각한 ‘자기-경영적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만든다.

 

자본의 흐름은 주체가 스스로 권력에 복종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배치를 형성한다(예를 들어 근대 자본주의에 의한 규율화에 대한 욕망의 형성, 후기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의한 자기-경영에 대한 욕망의 형성).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하부구조에 속한다. 바꿔 말하면, 주체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복종을 욕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본에 의한 욕망의 촉발인 것이다. 배치란 자본에 의한 욕망의 배치이며, 바로 이 배치가 권력 장치들을 사회체에 분배한다. (129쪽)

 

보이지 않는 손에서 보이는 주먹으로

 

왜 주체는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욕망하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본에 의한 욕망의 촉발 때문이다.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것이 곧 더 나은 인적 자본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될 때, 한 개인이 더 훌륭해지는 것은 곧 더 큰 자본이 되는 것과 같다. 자본은 무한 증식의 궤도를 탄다. 자기계발은 끝이 없으며 이렇게 인적 자본으로서 자기에 몰두하게 될 때, 사회는 사라진다. 사회가 사라진 세계에서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주먹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 시장을 조정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다. 신자유주의 권력 역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시장화된 세계를 조정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삶을 경쟁 원리로 재편하는 그 손이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주먹은 시장에서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개인을 경기장 밖으로, 곧 삶의 바깥으로 날려버리려 한다. 사토 요시유키는 그 주먹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혹은 맞받아 칠 것인가를 고민하며 ‘저항의 전략’을 이론적으로 탐색한다. 다만 그 저항의 전략에 들뢰즈, 가타리, 랑시에르, 아감벤, 알튀세르, 버틀러 등등의 쟁쟁한 이론가들이 출몰하는 것에 비해 명료한 실천방안이나 구체적 사례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관 없는 신체가 되어 ‘소수자-되기’를 하자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말로 보이는 주먹을 맞고도 끄떡없다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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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의 문화콘텐츠에 대단히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상당히 기대가 되는 잡지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몇 호 나오다가 중단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

 

  좀 더 분량도 많아지고, 내용도 알찼으면 하는 바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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