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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권력 -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
사토 요시유키 지음, 김상운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신자유주의 권력은 인간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
사토 요시유키의 <신자유주의와 권력>의 원서 부제는 “푸코에서 현재성의 철학으로”였다. 번역자 김상운 씨는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을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도록 부제를 “자기-경영적 주체의 탄생과 소수자-되기”로 바꿔 달았다. 원서의 부제보다 김상운 씨가 바꿔 단 부제가 이 책의 요점을 더 정확하게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 1부 ‘신자유주의와 권력’에서는 ‘자기-경영적 주체’가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그것의 의미는 무엇인지 추적한다. 2부 ‘저항의 전략’에서는 ‘자기-경영적 주체’가 되어 무한 경쟁에 휘둘리고 있는 주체가 어떻게 탈주체화, 탈복종화의 길로 접어들어 ‘소수자-되기’라는 저항을 실천할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탐색한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자면 이 책의 1부는 매우 명료하게 이해되는 데 반해서 2부는 저자가 중언부언한다는 느낌이 짙고 선명하게 이해되지 않는다. 따라서 필자는 이 책의 2부와 보론에 나타난 ‘저항의 전략’에 대해서는 말을 아낄 필요가 있음을 느낀다. (참고로 이 책의 제목은 1부의 제목과 같다. 목차만 보았을 때도 책의 구성이 긴밀하지 않고, 접합 부분이 헐겁다는 생각을 들었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대한 간명한 설명
그러나 이 책은 1부만으로도 충분히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다. 신자유주의의 본질에 관해서 그 어떤 책보다 정확하게 분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훌륭한 이론가가 늘 그렇듯이 사토 요시유키는 세간에 널리 퍼진 신자유주의에 대한 속설부터 수정할 것을 요구한다. 흔히 신자유주의는 그 용어 때문에 자유주의의 새로운 버전쯤으로 이해되기 쉽다. 혹은 자유주의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 그도 아니면 신자유주의는 작은 정부를 지향하고 규제 철폐를 단행해 시장에 자유의 바람을 불어넣는 자연스런 조류로 인식하거나. 하지만 저자는 신자유주의가 결코 자연스런 것이 아니란 점을 일깨운다.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시장 메커니즘이란 ‘자연’ 가격을 형성하는 교환인 것이다. 이에 반해, 질서 자유주의에서 시장이란 ‘경쟁’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경쟁’이란 시장에서 발견되는 ‘자연적’ 소여가 아니라는 점이다. …… 경쟁은 자연 발생적으로 존재하는 현상이 아니며, 오히려 그 ‘내적 논리’를 존중하는 방식으로, 즉 경쟁이 개개인의 활동을 조절하고 사회를 조직화하는 방식으로 ‘생산’되어야 한다. 요컨대 경쟁은 통치에 의한 구축적인 노력의 결과로 산출되는 것인데, 이것이 사회의 통치 원리이다.……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사회의 모든 국면에 경쟁 메커니즘을 구축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통치하려고 한다. 이처럼 신자유주의가 시장 안에 자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경쟁을 구축하고 그에 따라 사회를 조직화하는 이념을 보존[견지]했다고 한다면, 그런 통치는 필연적으로 ‘자유방임’일 수 없으며, 시장 안에 경쟁을 구축하기 위한 적극적인 ‘개입’을 수반하게 된다.(34-37쪽, 이하 강조는 인용자)
시장이 된 세계, 기업이 된 개인
정부가 부동산에 관련된 각종 규제를 풀어주거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을 결코 시장 자율에 모든 것을 맡기는 ‘자유방임’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규제를 풀거나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위한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은 말 그대로 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권력 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 예를 들어 비정규직 보호를 위한 법률은 말 그대로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합법적으로 양산할 수 있는 법적 조치다. 케인즈적인 복지국가 시스템이 ‘규율’을 통해 사회를 통제하려고 했다면 신자유주의 권력은 ‘경쟁’을 통해 이미 시장화된 사회와 기업화된 개인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사회체의 기초적 구성단위를 ‘기업’이라는 형태에서 찾아내고 마침내 사회체를 ‘기업’이라는 형태로 뒤덮어 버리려고 한다. (47쪽)
사회체의 기초 구성단위가 ‘기업’이 되어버리면 그 속의 개인 역시 ‘기업화’한다. 따라서 임금을 받는 노동자는 어느 순간으로 인적 자본이라는 자본이 되어버리고, 자신의 인적 자본을 위해 끊임없이 투자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여기에 ‘자기계발의 담론’이 자연스레 덧붙여진다. 예컨대 실업과 같은 문제나 이제 정부나 사회의 몫이 아니다. 자신의 인적 자본을 투자하고 관리하지 못한 개인의 탓이 된다.
인간에서 인적 자본으로
여기서 언급된 ‘투자’란 단순히 아이의 교육에 자본을 쏟아붓는 것처럼 순수하게 경제적인 의미의 투자가 아니다. 부모가 아이에게 수유를 하고 애정을 쏟는 것 같은 비경제적 행위조차 ‘투자’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런 해석의 기초에 있는 것은, 어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희소 자원을 얼마나 유효하게 사용할 것인가와 같은 물음이다. 예를 들면, 이 경우 부모가 한정된 시간과 에너지라는 희소 자원을 인적 자본의 형성, 즉 아이의 교육이라는 목적을 위해 얼마나 선택적으로 배분하는가 하는 점이 문제가 된다. 이런 접근법에 의해 인적 자본 이론은 비경제적인 행위의 영역에까지 경제적 분석의 범위를 확대한다. 이것은 비경제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모든 행동을 경제적 분석의 대상으로 삼는 사고로 귀결된다.(52쪽)
인간이 인적 자원으로 화하는 순간, 인간의 모든 영역은 곧 경제적 분석의 대상이 된다. 이제 인간은 이런 기업화된 개인들이 모여 있는 시장에 살아야 한다. 이 삶을 거부하는 자, 이 삶의 요건에 충족되지 않는 자는 시장에서 추방된다. 시장에서 추방되는 것은 곧 삶에서 추방되는 것이다. 따라서 장삼이사는 너나 할 것 없이 이 시장에서의 삶을 위해 자기를 계발하고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 발버둥친다. 모두가 호모 이코노미쿠스가 되어야 한다.
호모 이코노미쿠스는 환경(즉 시장)의 변화에 대응해 자신을 가역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경제 주체/행위자agent이다. 즉, 신자유주의적 통치는 시장 원리로 사회체를 전면적으로 뒤덮어 버림으로써 쉽게 ‘조작 가능’maniable하고 ‘통치 가능한’gouvernable 주체, 즉 시장원리를 내면화한 자기-경영의 주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55쪽)
범죄도 '최적화'하는 신자유주의 권력
자, 이제 시장에 권력이 적극 개입하여 경쟁하는 환경만 조성하면 그 안의 인간은 알아서 기게 된다. 중요한 점은 이것이 한 개인 개인에게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통치가 아니라 환경을 조성하는 통치라는 것이다. 근대 시민을 규율했던 판옵티콘은 개개인을 감시하고 규율했다. 이 감시와 규율은 개인에게 내면화되어 마음 속 판옵티콘의 구축을 강제했다. 만약 이 감시와 규율에서 일탈하면 처벌이 따랐다. 근대 권력이 꿈꾸었던 것은 모든 일탈을 잡아내어 처벌하는 것, 그리하여 범죄율이 0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권력은 이렇게 각 개인을 감시하고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범죄나 일탈마저도 경제적 분석을 통해 시장에서 최적화할 수 환경을 조성할 뿐이다. 예컨대 푸코는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에서 마약 시장의 문제를 다른다. 1970년대 전반까지 마약 시장에 대한 정부의 정책은 마약 생산자와 판매 조직을 일망타진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이렇게 하니 시장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소수의 마약 생산자와 판매 조직이 시장을 독점하게 되어 마약 가격이 급상승한 것이다. 게다가 마약 중독자에 의한 범죄가 증대했다. 마약의 수요는 시장에서 비탄력적이기 때문이다. 마약 중독자는 마약 가격이 상승하면 마약을 끊는 것이 아니라 범죄를 저질러서라도 비싼 마약을 구매한다. 따라서 마약 공급을 감소시키는 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적인 마약 정책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시장에서 마약을 아예 없애버리려고 하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마약 소비자를 막기 위해 될 수 있는 한 높은 가격에 마약이 거래되도록 시장을 조정하면서 낮은 가격에 구할 수 있는 위험성 낮은 마약에 대해서는 관용적으로 대처하는 것이다. 범죄마저도 시장의 수요, 공급처럼 최적화를 꾀할 뿐 전면 소탕을 목표로 삼지는 않는다.
생명 관리 정치의 탄생
신자유주의 권력이란 환경에 개입하고 환경을 설계함으로써 통치 불가능한 우연적 요소를 통치 가능한 것으로 변환하는 권력인 것이다. 우리는 예를 들어 그런 우연적 요소를 ‘인구’라고 불러도 좋다. 환경 개입 권력은 다양하고 우연적인 요소를 품고 있는 인간의 군집을 ‘인구’라는 통계적 대상으로 변환하며, 출생률, 질병률, 사망률 등의 통계적 데이터로 다룸으로써 통치 가능한 것으로 바꾸고자 한다. 그런 의미에서 환경 개입 권력이란 인간의 생명[삶]을 마치 통치의 대상으로 삼는 생명 정치의 한 가지 변형인 것이다. (73쪽)
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이 바로 푸코가 말한 ‘생명 관리 정치’이다. 생명 관리 정치는 개인을 중심으로 그 개인을 권력이 직접적으로 통제하는 것이 아니라 ‘인구’라는 통계적 대상으로 변화하여 통치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 이럴 때 개개인의 삶은 사라지고 통계적 데이터가 남는다. 재미난 예. 발이 삶아질 정도로 뜨거운 물이 담긴 양동이와 발이 얼 정도의 차가운 물이 담긴 양동이에 한 발씩 담근 사람이 있다고 치자. 두 양동이에 담긴 물의 평균값을 구해 통계를 내면 두 발은 모두 미지근한 물에 담겨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실상은 한쪽 발은 화상을, 다른 쪽 발은 동상을 입을 지경인 것이다. TV 토론에 나온 곡학아세 전문가들은 주로 이런 통계 제시 방식으로 현실을 왜곡하기 일쑤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신자유주의 권력은 (시장) 환경에 개입하여, 개개인을 감시/규율하지 않아도 그들이 경쟁 원리에 입각한 ‘자기-경영적 주체’로서 살아가도록 만든다.
자본의 흐름은 주체가 스스로 권력에 복종하고 싶어 하는 욕망의 배치를 형성한다(예를 들어 근대 자본주의에 의한 규율화에 대한 욕망의 형성, 후기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의한 자기-경영에 대한 욕망의 형성). 이런 의미에서 욕망은 하부구조에 속한다. 바꿔 말하면, 주체로 하여금 권력에 대한 복종을 욕망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자본에 의한 욕망의 촉발인 것이다. 배치란 자본에 의한 욕망의 배치이며, 바로 이 배치가 권력 장치들을 사회체에 분배한다. (129쪽)
보이지 않는 손에서 보이는 주먹으로
왜 주체는 권력에 복종하는 것을 욕망하게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본에 의한 욕망의 촉발 때문이다. 더 나은 자신이 되는 것이 곧 더 나은 인적 자본이 되는 것을 의미하게 될 때, 한 개인이 더 훌륭해지는 것은 곧 더 큰 자본이 되는 것과 같다. 자본은 무한 증식의 궤도를 탄다. 자기계발은 끝이 없으며 이렇게 인적 자본으로서 자기에 몰두하게 될 때, 사회는 사라진다. 사회가 사라진 세계에서 개인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주먹에 의해 움직이게 된다.
애덤 스미스는 자유방임 시장을 조정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손’이라고 했다. 신자유주의 권력 역시 ‘보이지 않는 손’으로 시장화된 세계를 조정하려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삶을 경쟁 원리로 재편하는 그 손이 잘 보일 뿐만 아니라 주먹을 쥐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주먹은 시장에서 경쟁에 참여하지 않는(혹은 못하는) 개인을 경기장 밖으로, 곧 삶의 바깥으로 날려버리려 한다. 사토 요시유키는 그 주먹을 어떻게 피할 것인가, 혹은 맞받아 칠 것인가를 고민하며 ‘저항의 전략’을 이론적으로 탐색한다. 다만 그 저항의 전략에 들뢰즈, 가타리, 랑시에르, 아감벤, 알튀세르, 버틀러 등등의 쟁쟁한 이론가들이 출몰하는 것에 비해 명료한 실천방안이나 구체적 사례가 제시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기관 없는 신체가 되어 ‘소수자-되기’를 하자고 하지만 그렇게 하면 정말로 보이는 주먹을 맞고도 끄떡없다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