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경제의 법칙
이몬 버틀러 지음, 김명철 옮김 / 시아출판사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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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몬 버틀러의 <시장경제의 법칙>(시아, 2009)는 자본주의와 시장경제에 대한 예찬으로 가득하다. 저자는 영국의 애덤 스미스 연구소 소장이다. 이 책은 시종일관 시장경제가 왜 최상의 경제 시스템인지 입증한다.

1장에서 저자는 시장을 "놀라운 세계"라 표현한다. 그는 중국 황허 강변의 란저우에 위치한 시장 풍경 묘사로 이 놀라운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하는데 이 대목을 읽다보면 두 가지를 느끼게 된다. 하나는 역시 저자가 노련하게 독자를 유인해 나간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 양반의 경제학이란 정치경제학에서 '정치'를 괄호 안에 넣은, 상당히 편향된 경제학이라는 것. 바느질을 잘하는 중국인 소녀와 바느질을 못하는 영국인 경제학자가 시장에서 행복하게 만나 경제학자는 바지를 수선해 좋고 소녀는 품삯을 받을 수 있어 좋다는 이 시장예찬론은 이 책의 장르를 수필이 아닌가 착각시킬 만큼 유려한 문체로 쓰여졌다. 문제는 이 글의 장르가 수필은 아니라는 것. 제목이 <시장경제의 법칙>인 만큼 독자는 정신을 차리고 이 법칙이 합리적인가를 따져 물어야 한다.

저자가 괄호 안에 집어 넣은 '정치'를 다시 꺼내어 '경제학' 앞에 두는 것은, 이 책을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정치'에는 '국제관계'와 '역사'의 함수가 개입되어 있다. 란저우의 소녀는 과연 바느질을 잘하도록 타고난 것일까. 서유럽이나 북유럽에서 이 소녀가 똑같은 재능을 갖고 태어났다면 이 소녀는 시장바닥에 있지 않고 일단 학교에서 충실히 교육을 받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시장예찬론은 '지구는 평평하다' 따위의 진공 상태의 경제학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저자의 말대로 '전문화'와 '교환'이 모두에게 막대한 이익을 불러 온다는 것은 개념상 그럴 듯하다. 그러나 현실적인 조건을 살펴보면 이 말은 타당성을 잃는다. 바느질 전문가는 늘 국제 협상 전문가보다 덜 부유할 것이고, 둘 사이의 교환은 늘 불공평할 것이다. 선진국과 후진국의 관계도 그러하다. 제3세계 국가들이 원자재만을 팔기를 언제 바랬던가. 그건 제국주의 시절에 배를 불린 지금의 1세계 국가들이 강요한 것이나 다름없다. 

저자는 3장에서 '가격'에 대해 많은 설명을 한다. 이 역시 시장예찬론의 방식 그대로이다. '시장의 실패'에 대해서는 소상히 언급하지 않는다. 가격이야말로 실시간 메시지 전달 시스템인 것은 맞다. 그런데 그것이 정의로운가 하는 문제는 독립적으로 남는다. 가령 한국의 부동산 시세는 실시간 메시지 전달 시스템이다. 그런데 그것의 발신자와 송신자는 누구인가? 그 메시지가 전달하는 바가 무엇인가? 더 나아가는 이 시스템은 합리적이며 위험한 요소는 없는가? 이런 질문에 대해서 저자는 별다른 논지를 펴고 있지 않다. 이 점이 아쉽다. 

나머지 내용은 더 언급할 필요도 없이 아주 재미있는 예를 들어가며 시장을 예찬하는 데 바쳐진다. 예컨대 이 책에는 '투기꾼'조차도 사회에 기여를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를 필요로 하는 중고생과 '시장경제'에 대한 교양을 얻고 싶어하는 청장년층의 흥미로운 입문서로 적당하다. 중요한 건 이 책만 읽고서 독서를 멈춰서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현재의 시장은 저자의 말마따나 전지구적인 규모의 거래가 실시되고 있고 수없이 많은 권력들이 게임을 벌이고 있는 싸움터이기 때문에 이 책에서 거론되는 것보다 훨씬 더 복잡한 분석과 통찰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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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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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시뮬라크르이고, 이 글을 쓰는 과정이 시뮬라시옹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모사하고 있지만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은 번역서이고 번역은 실재가 아닌 기호의 교환이다. 번역서는 원서의 모사품이지만 원서의 글자들을 베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어로 된 이 책의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떠올려 보자. 더스틴 호프만은 아서 밀러가 쓴 대본에 나온 윌리 로먼을 연기한다. 그는 흰 종이 위에 놓인 글자 기호를 자신의 몸으로 번역한다. 더스틴 호프만은 무엇을 모사하고 있는가?

더구나 한국의 한 배우가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윌리 로먼을 무대에서 복기한다면 이 연기의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더스틴 호프만에게? 그럼 더스틴 호프만은 무엇이라고 할까? 그는 대본에 쓰인 역할을 창조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기는 그 자체로 시뮬라시옹이다.

그런데 무대 위의 배우만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역할을 배정 받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잘못된 대사를 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장은 가장의 연기를 하고 자식들은 자식들의 연기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즉 시뮬라시옹의 체계에서 벗어나면 그는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예컨대 관객은 무대 위의 상황에 대해 큰 소리로 논평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객석에 앉는 순간 다짐했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오는 순간 그는 비평가로 역할을 바꾼다. 그는 얌전히 어두운 자리를 지키고 본 공연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그의 이 열정적인 비판은 이미 진행된 공연을 바꿀 수 없으며 아마 그 다음 날 공연에도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극단적 비유를 즐기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개념을 적용시킬 극단적 사례를 찾아서 제시하기 때문에 수사가 화려하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수행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살펴보자.

전쟁은 끝나기 훨씬 전에 끝나 있었으며, 한참 전쟁 중에 전쟁에 종말이 가해졌으며, 전쟁은 아마도 결코 시작되지 않았다. (87쪽)

이미 1981년에 그는 위와 같이 언급했으니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발언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자신의 이론의 시뮬라시옹에 불과하다. 그의 눈에는 천안함도 침몰되기 훨씬 전부터 침몰되었고, 결코 침몰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천안함에 관한 합동조사단의 조사는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착착 진행되어서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는다. 각본 없는 드라마는 그 어디에도 없다. 

 


보드리야르의 <홀로코스트>에서 나는 광주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날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는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공영방송에 나와 고통 받은 사람들은 그것의 징표로 눈물을 흘리고 우리는 공식적으로 상처를 승인한다. 이제 광주는 더 이상 불법으로 유통되고 상영되는 비디오 속의 처참한 풍경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진압군이 곤봉으로 시민의 머리를 가격하고 피를 줄줄 흘리는 화면은 곧 망월동 묘지, 이제 국가적 제도 속으로 포섭된 기념비적인 장소로 이동한다. 무덤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비석 앞에 국화는 감동적으로 놓여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거리로 나와서 이렇게 외칠 수 없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그는 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고 복역했고 사면을 받아 출소했다. 그의 사면 이유는 ‘국민 대화합’이었다. 시청자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될 것입니다’라는 나레이션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광주학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날의 희생을 통해 이 사회가 좀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다른 형태로 학살은 “이미 줄곧, 현재, 다시” 자행중이다.

『시뮬라시옹』은 ‘허무주의에 관하여’ 줄곧 떠드는 책이다. 보드리야르는 감추지 않고 “나는 허무주의자”라고 말하며 “더 이상의 무대는 없다”고 탄식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의미 있는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은” 기표의 관계망 속에서만 주체를 구성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혹이 시작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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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별짓기 -상 - 문화와 취향의 사회학 21세기총서 3
피에르 부르디외 지음, 최종철 옮김 / 새물결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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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극히 세련된 대상에 대한 미려한 취향을 음식 맛에 대한 기본적인 취향과 연결하지 않는다면 문화적 실천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다.”

위의 문장은 『구별짓기』의 저작 의도이자 내용이고 결론이다. 취향을 이해해야 문화적 실천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취향이란 통설처럼 타고나는 게 아니라 “양육과 교육의 산물”이다. 부르디외는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프랑스 국민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설문조사 작업을 시행했다. 이 책은 설문조사의 결과물을 토대로 취향이 곧 계급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특히 예술은 특수한 약호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것을 해독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의미가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의미하다. 예술작품은 소리나 빛깔 혹은 단어를 “감지할 수 있는 속성을 넘어서 해당 작품의 독특한 양식적 속성을 구별해 줄 수 있는 개념을 소유”한 사람에게만 즐김의 대상이 된다. 여기서 불평등이 발생한다.

“안목은 역사의 산물로, 교육에 의해 재생산된다.”

자연발생적인 “‘순수한’ 응시” 역시 “자율적인 예술생산의 장의 등장과 관련된 역사적 발명품”이다. 예술은 점점 역사적인 것이 되어 간다. 즉 예술작품은 외적인 지시대상인 ‘현실’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의 예술작품으로 구성된 우주를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된다.

대중적 취향은 예술 작품을 삶을 환원시키지만 통상 지식인들은 재현되는 사물보다는 재현 그 자체를 더 믿는다. 이러한 태도는 도덕적 불가지론 또는 유미주의의 형태를 취할 수도 있다. 이러한 예술적 취향의 차이는 그대로 다른 분야에서도 확인된다. 

 



“삶의 양식화, 즉 기능보다는 형식을, 소재보다는 매너를 우선시하지 않는 영역은 존재하지 않는다. (……) 미학을 윤리에 복속시키는 대중적 성향을 완전히 전복시켜 ‘순수’ 미학의 원리를, 예를 들어 요리나 의복, 또는 실내장식처럼 일상생활에서 가장 일상적인 선택에 적용할 수 있는 자질만큼 변별적이고 탁월한 기능을 하는 것도 없다.”

취향은 구분하고, 분류하는 자를 분류한다. 분류법은 다양하다. 주체는 구별을 통해 스스로의 탁월함을 드러내며 이 과정에서 각 주체는 객관적 분류 과정에서 특정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입장에서 취향과 문화 소비를 연구하게 되면 미학적 소비와 일상적 소비가 겹치게 되고 이것은 곧 칸트의 미학이론을 부정한다.

저급하고 조잡하고 천박하며 타산적이고 비굴한, 한마디로 자연스런 기쁨을 부인하는 것, 바로 이것이 문화의 성역을 구성한다. 예컨대 배가 고플 때 배만 채우는 것으로는 문화적 식사라 할 수 없다. 문화적 식사는 매너, 분위기가 우선시된다. 이것은 은연중에 세속의 천한 사람들은 영원히 접근할 수 없는 승화된 즐거움, 세련되며, 무사무욕하며, 대가를 바라지 않으며, 우아하고 단순한 쾌락을 누릴 수 이쓴 사람들이 우월하다는 사실을 재삼재사 확인해준다. 예술과 문화 소비가 애초부터 사람들의 의식이나 욕구와 상관없이 사회적 차이를 정당화하는 사회적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급은 생산수단의 소유와는 별도로 문화적 취향에 따라서 판가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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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시문학상 수상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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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는 영문법책. 인터넷 강의도 무료로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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