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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뮬라시옹 ㅣ 현대사상의 모험 5
장 보드리야르 지음, 하태환 옮김 / 민음사 / 2001년 1월
평점 :
이 글은 시뮬라크르이고, 이 글을 쓰는 과정이 시뮬라시옹이다. 왜냐하면 이 글은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시옹』을 모사하고 있지만 원본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읽은 책은 번역서이고 번역은 실재가 아닌 기호의 교환이다. 번역서는 원서의 모사품이지만 원서의 글자들을 베끼지 않는다. 그렇다면 한국어로 된 이 책의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그런 것은 없다.
<세일즈맨의 죽음>을 떠올려 보자. 더스틴 호프만은 아서 밀러가 쓴 대본에 나온 윌리 로먼을 연기한다. 그는 흰 종이 위에 놓인 글자 기호를 자신의 몸으로 번역한다. 더스틴 호프만은 무엇을 모사하고 있는가?
더구나 한국의 한 배우가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윌리 로먼을 무대에서 복기한다면 이 연기의 원본은 어디에 있는가? 더스틴 호프만에게? 그럼 더스틴 호프만은 무엇이라고 할까? 그는 대본에 쓰인 역할을 창조했다고 말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기는 그 자체로 시뮬라시옹이다.
그런데 무대 위의 배우만 연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잠을 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모두 역할을 배정 받는다. 심지어 잠을 잘 때도 잘못된 대사를 읊으면 문제가 될 수 있다. 가장은 가장의 연기를 하고 자식들은 자식들의 연기를 한다. 여기에서 벗어나면, 즉 시뮬라시옹의 체계에서 벗어나면 그는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예컨대 관객은 무대 위의 상황에 대해 큰 소리로 논평할 수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관객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할 것을 객석에 앉는 순간 다짐했기 때문이다. 극장을 나오는 순간 그는 비평가로 역할을 바꾼다. 그는 얌전히 어두운 자리를 지키고 본 공연에 대해 열변을 토한다.
그러나 그의 이 열정적인 비판은 이미 진행된 공연을 바꿀 수 없으며 아마 그 다음 날 공연에도 반영되지는 않을 것이다.
보드리야르는 극단적 비유를 즐기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반복적으로 자신의 개념을 적용시킬 극단적 사례를 찾아서 제시하기 때문에 수사가 화려하다. 미국의 베트남 전쟁 수행에 대한 다음과 같은 논평을 살펴보자.
전쟁은 끝나기 훨씬 전에 끝나 있었으며, 한참 전쟁 중에 전쟁에 종말이 가해졌으며, 전쟁은 아마도 결코 시작되지 않았다. (87쪽)
이미 1981년에 그는 위와 같이 언급했으니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발언은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자신의 이론의 시뮬라시옹에 불과하다. 그의 눈에는 천안함도 침몰되기 훨씬 전부터 침몰되었고, 결코 침몰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 천안함에 관한 합동조사단의 조사는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착착 진행되어서 아무런 놀라움도 주지 않는다. 각본 없는 드라마는 그 어디에도 없다.

보드리야르의 <홀로코스트>에서 나는 광주학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아직도 그날의 상처로 고통받는 사람들에 대한 TV 다큐멘터리는 우리를 안심하게 한다. 공영방송에 나와 고통 받은 사람들은 그것의 징표로 눈물을 흘리고 우리는 공식적으로 상처를 승인한다. 이제 광주는 더 이상 불법으로 유통되고 상영되는 비디오 속의 처참한 풍경으로 기억되지 않는다. 진압군이 곤봉으로 시민의 머리를 가격하고 피를 줄줄 흘리는 화면은 곧 망월동 묘지, 이제 국가적 제도 속으로 포섭된 기념비적인 장소로 이동한다. 무덤은 가지런하게 정돈되어 있으며 비석 앞에 국화는 감동적으로 놓여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거리로 나와서 이렇게 외칠 수 없다. 살인마 전두환을 찢어 죽이자! 그는 법적 절차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았고 복역했고 사면을 받아 출소했다. 그의 사면 이유는 ‘국민 대화합’이었다. 시청자들은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될 것입니다’라는 나레이션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따라서 광주학살을 다루는 다큐멘터리를 만든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날의 희생을 통해 이 사회가 좀 더 나아졌다고 말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한다. 그러나 아시는 바와 같이 다른 형태로 학살은 “이미 줄곧, 현재, 다시” 자행중이다.
『시뮬라시옹』은 ‘허무주의에 관하여’ 줄곧 떠드는 책이다. 보드리야르는 감추지 않고 “나는 허무주의자”라고 말하며 “더 이상의 무대는 없다”고 탄식한다. 그에 따르면 우리는 이제 의미 있는 그 무엇도 생산할 수 없다. 대신 우리는 “의미 혹은 비-의미의 허무주의에 다치지 않은” 기표의 관계망 속에서만 주체를 구성할 수 있다. 보드리야르는 바로 이 지점에서 유혹이 시작된다고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