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 이데아총서 9
발터 벤야민 지음 / 민음사 / 199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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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은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의 머리말을 통해 이 글이 어떤 용도로 쓰일지 분명히 밝혀 놓는다.

예술발전 경향에 관한 테제는 일련의 전통적 개념들, 이를테면 창조성, 천재성, 영원한 가치와 비밀 등을 제거해 버린다. 이러한 전통적 개념들은, 만약 그것이 아무런 통제 없이 주어지는 실증적 자료의 검토를 위해서만 이용된다면 파시즘적 의미로 사용될 가능성이 크다. (반성완 역, <기계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p. 198)

그런데 벤야민은 자신의 새로운 예술이론의 개념들이 파시즘에 의해 이용당하지 않을 것이며 “예술 정책에 있어서 혁명적 요구를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벤야민은 역사적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자신의 논의를 전진시킨다. 예술작품의 복제는 언제나 가능했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인간의 손이 하느냐 아니면 기계가 하느냐에 있다. 그리스인들의 주조와 인각 기술, 청동제품, 테라코타, 주화 등을 예로 든다. 기술의 발전은 예술작품의 내용을 바꾸어 놓는다. 예컨대 석판인쇄술의 발명은 일상생활을 담은 그림을 가능케 한다. (예를 들어, 디지털 카메라의 등장은 사진을 기념을 위해 찍는 것이 아니라 일상을 담는 것으로 개념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복제기술은 점점 발전되었는데 그 정점에 오른 것이, 벤야민이 보았을 때는 사진과 영화였다. 사진은 손으로 대상을 그리던 것에 비할 수 없는 속도와 정확성을 가져왔다. 이제 손이 아니라 눈이 그리게 된 것이다.

벤야민은 복제기술의 두 가지 상이한 표현양상을 드는데 그것은 바로 “예술작품의 복제”와 “영화예술”이다. 예술작품의 복제는 진품의 존재를 전제한다. 복제된 작품은 진품만이 가지는 “유일무이한, 단 일회적인 현존성”을 갖고 있지 못하다. 아우라가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영화예술에서의 복제는 그 자체가 작품을 만들어 내는 원리이다. 영화에는 원본이 없다. 원본이라면 카메라 앞에 섰던 피사체일 텐데 그것은 카메라에 담기는 순간 덧없이 사라진다. 따라서 영화에서는 진품성을 거론할 수 없다. 벤야민은 바로 이 점에서 영화의 정치적 가능성을 엿본다. “복제기술은 복제된 것을 전통의 영역으로부터 분리시킨다.” 벤야민이 인용한 아벨 강스의 말을 들어보자.

셰익스피어, 램브란트, 베토벤이 영화화될 것이다. 모든 전설, 모든 신화, 모든 종교의 창시자, 모든 종교까지도 필름을 통해 부활될 날을 기다리고 있으며, 또 모든 영웅들이 영화의 문전에 몰려들고 있다. (p.203)

따라서 영화는 “전통적 가치를 청산한다.” 아우라가 없는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 때문에 그 안에 담긴 대상은, 그가 교황이건 날품팔이이건 단지 보는 대상이 될 뿐이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 중에 눈을 마주치치 못할, 범접하지 못할 대상은 없다. 벤야민은 이것을 “영화의 카타르시스적인 면”이라고 불렀다. 벤야민은 이렇게 권위를 파괴하는 성격 때문에 영화는 대중운동의 매개체로서 훌륭하게 사용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벤야민은 역사적 관점에서 아우라가 왜 붕괴될 수밖에 없는지 살핀다.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 이것들은 다 “대중의 욕구”와 관련되어 있다. 대중은 사물을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 들이고자 하는 욕구가 있고, 또 사물의 일회적 성격을 극복하고자 하는 욕구가 있다. “대상을 그것을 감싸고 있는 껍질로부터 떼어내는 일, 다시 말해 분위기(아우라)를 파괴하는 일은 현대의 지각작용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다.”

예술작품의 진품성은 전통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에 달려 있다. 벤야민은 대표적인 예로 “종교의식 속의 예술작품들”을 든다. 예술 작품의 아우라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고 유지되었다. 현대적이고 세속적인 예술작품에 대한 “숭배”도 역시 종교의식적인 산물이다. 그런데 사진의 등장은 이러한 “미에 대한 숭배”에 위기를 가져왔다. 벤야민은 사진술과 사회주의의 성장이 예술을 위기로 몰아넣었다고 한다. 벤야민 특유의 재치있는 표현에 따르자면 서구 사회는 “예술의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술지상주의의 이론으로서 이 위기에 대처했다.” 이 신학은 부정적 신학일 수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이러한 예술작품에는 “일체의 사회적 기능”이 박탈되어 있기 때문이다.

벤야민은 사진과 영화의 등장으로부터 비롯된 예술의 위기, 즉 아우라의 상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예술로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우라의 상실은 긍정적으로 해석한다. 즉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은 그동안의 종교적 의식이라는 종속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진품성의 척도가 효력을 잃은 지금에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도 변혁을 겪는다. 예술작품은 종교 의식적 근거를 둔 사회적 기능에서 정치에 그 근거를 두는 사회적 기능을 갖게 된다.

벤야민에게 사진이나 영화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라는 당대의 논쟁은 우스운 것으로 여겨졌다. 그는 “사진의 발명으로 인해 예술의 전체 성격이 바뀐 것이 아닐까”라는 물음을 제기한다. 예술작품의 기술적 복제 기능성은 예술을 대하는 대중의 태도를 변화시켰다. 대중은 아우라를 상실한 작품 앞에서 비평적 태도를 가지게 된다. 즉 감상자가 예술작품에 빨려 들어가는 게 아니라 예술작품이 감상자에게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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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무적 포도나무집 풍경 인간에 대한 예의 살아 있는 무덤 광주로 가는 길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5
김영현.공지영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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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일의 ‘천하무적’은 우주의 끝은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밤하늘에도 대체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궁극에 대한 것이기에 세속의 때가 묻고 나이가 들면 질문 자체를 던지지 않게 마련이다. 소설가 자신일 ‘천하무적’의 화자 ‘나’는 툭 이 질문을 던져 놓고 탄식한다. 이제 나도 늙어 버렸다고.

마흔 다섯 살이나 ‘처먹어버렸다’고 술자리에게 토로하던 ‘나’의 선배 시인은 칠팔 개월 전, 거창한 죄목이지만 ‘허망한 빌미’로 잡혀 들어가 있다. 이 선배가 몇 사람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제 천하무적의 길을 가겠노라고. 몇몇 지인들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선배 시인을 면회가기로 하지만 그것은 ‘도리’라기보다는 ‘체면치레’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렇게 나이를 먹는 것이라고 탄식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소설의 외피를 이루고 있는 ‘구자혁’에 대한 ‘나’의 태도 또한 ‘20세기의 마지막 고비길’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구자혁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외피에 불과하다. 속알맹이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천하무적’은 외견상 ‘구자혁’에 관한 부분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고, 매우 핍진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은 그 건너에 있다. 이 소설은 결코 노동자 착취나 도시 빈민의 생활에 대한 고발적 성격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고발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작품을 읽고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구자혁’의 비극적 삶에 대한 지적은 피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화자인 ‘나’, 즉 작가의 의식이다. 선배 시인이 보낸 편지에 대한 그의 생각, 구자혁의 죽음을 접했을 때의 그의 충격, 구자혁의 죽음은 도대체 어떻게 가치 평가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등등이 이 작품을 읽고 논의할 만한 점들이다.


천하무적 : 천하에 적이 없다, 강해서가 아니라 상대할 적이 없어서라면?

노자를 읽고 천하무적이 되겠다는 선배 시인의 전언은 감동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대한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천하무적이 되겠다는 것은 싸움이 필요 없는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쉬운 자기 정립이 어디에 있겠는가. 구체적인 현실의 잡다하고 비루한 세목에서 발휘될 그 ‘천하무적’이란 기실 비겁한 타협이 되기에 딱 알맞지 않겠는가.


구자혁의 죽음 앞에서 : 천하무적이 무슨 가치인가?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무엇인가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결론을 내릴 무렵에 와서 보니 비로소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나’는 80년대는 분명 뜨거운 전망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사실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선배 시인은 노자의 곁으로 천하무적이 되기 위해 떠나고, ‘나’는 잊고 있던 ‘구자혁’을 새삼스레 생각한다. ‘나’가 처음 구자혁을 만났을 때, ‘나’의 태도란 얼마나 불분명했나.


‘나’는 운동권 전체에 대해서 최악의 진단을 서슴치 않았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도박에서 그만 손을 떼겠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진지해지는 열정과 능력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길고 무더운 여름밤 : 안락을 만끽하라, 시원하려면 에어컨이 필요하다 

이 소설의 트라이앵글은 ‘나’의 진술, ‘선배 시인’의 편지, ‘구자혁의 죽음’이다. 이 트라이앵글의 한 축이라도 빠지면 이 작품은 온전하게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또한 한 쪽에 너무 치우쳐도 불충분한 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 작가 김남일은 붉은 십자가와 장급 여관의 불빛으로 더욱 길고 무더운 여름밤인 ‘20세기 마지막’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긴 여름이 끝난다고 해서 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줄까? 아니, 사람들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에어컨을 사기 위해서 바둥거릴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 시원하면 열풍이 거리로 쏟아져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생각 자체를 재미 없어할 것이다. 지겨워할 것이다. 즉각적으로 쾌락의 충족이 가능한데 생각은 무슨!

무엇이, 정말 무엇이 18세 소년 제화공을 죽게 만들었는가?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대답한 당신은 바보다. 손이 뭉개졌고, 방화를 저지르려고 했는데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다니 서프라이징 엔딩으로서 조금 부족한 걸, 이렇게 말하는 당신도 바보다.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가 ‘자본주의 아냐?’라고 하는 당신은 부족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너는 뭐라고 대답할 거냐고 한다면 이 이야기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예수의 발목 

몇 해 전, 명동 성당 입구에서 병원 노조원들이 농성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가톨릭 재단 병원이 성당에 피신해온 노동자들을 사복경찰을 동원해서 폭력 연행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었다. 병원 지하에 있는 성당에는 노동자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를 남자 경찰이 연행하려하자 노조원 한 명이 성추행이다,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경찰 간부가 핸드 마이크에 입을 대고, ‘여경 투입’이라고 소리쳤다. 곧 여자 경찰이 들이닥쳐 여성 노조원들을 전원 연행해 갔다. 중요한 장면은 바로 그 다음이다. 몇 명의 노동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쳤다. 신부님! 신부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경찰 간부가 소리쳤다. 이미 성당에 들어와도 좋다는 서명을 받았어요. 화면으로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황급히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찰은 이제 십자가에 매달린 노동자들만 처리하면 집에 가서 쉴 것이다. 끌어내, 라는 소리가 나왔다. 사복 경찰이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노동자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사람 키만한 십자가가 흔들거렸다. 못 박힌 예수도 흔들렸다. 자칫 잘못하면 십자가가 떨어져서 파손될 수 있었다. 경찰간부가 소리쳤다. 몇 명은 십자가 붙들고 있어. 십자가 파손 안 되게. 경찰이 몇 명 더 투입되어서 십자가를 벽에 안전하게 밀착시켰다. 노동자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예수는 발목이 아파도 여전히 두 손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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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문학전집 2 - 소설
김윤식 엮음 / 문학사상사 / 199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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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창이의 내면 풍경 

  이상의 사망 이후에 발표된 <恐怖의 記錄>은 정확한 집필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내용상 1936년 동경행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이상은 “第二次의 咯血” 이후 자신의 “壽命에 對한 槪念을 把握하였”으며 “心境을 正直하게 말하려 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滿身瘡痍”라 여겼고, 이러한 자기 진단은 수사를 넘어선 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상은 절망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그에게 “貴族趣味”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포의 기록>은 “만신창이”가 된 환자가 쓴 왜곡된 병상일지이자 자신의 불행에 대한 “야유”다.  
 

공포의 정체

  공포는 불안과 달리 분명한 대상을 갖고 있다. <공포의 기록>에 등장하는 ‘나’를 괴롭히는 “苦痛이란 妖怪”는 무엇인가? ‘나’가 꿈꾸는 “生活力의 恢復”을 방해하는 요괴의 정체는 무엇인가? 텍스트에서 추출해낸 사실들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이차의 각혈”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나’에게는 생활을 영위할 만한 기운이 없다. 병든 자의 눈에 들어오는 현실은 무겁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닥치는 모든 현실은 “巨岩과 같은 不安”이다. 이렇게 “重壓이 되어 덤벼”드는 공포에 맞서기 위한(실제로는 피하기 위한) ‘나’의 방법은 “닭들의 생활”에도 “갸륵한 분쟁”이 있다는 것을 멀거니 관찰하며 자신의 불운을 일반화하거나 “蛔蟲散을 頓服하”고 “昏到라는 것이 오기를 기다”리거나 “木船 하나 빌어 麥酒도 싣고······목노 찾아 취토록 먹”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상상으로 “먼 바다를 건너”가서 “光彩나는 ‘루파슈카’를 입”고 “어덴지 모르는 먼 나라의 十字路를 걷”너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닥친 ‘병’이란 중압에 대해서 투병 의지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초월한 어떤 세계를 갖고 있지도 않다. “貨物自動車에 질컥 치여 죽어버”렸으면 하고 떠벌이지만 실상은 “화물자동차가 탁 앞으로 닥칠 적이면 뎅급을 해서 避 하는 재주”를 발휘한다. 죽음에 대한 순응도 저항도 아닌 이 태도는 끝없는 연기(延期이면서 演技)를 필요로 한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희극 배우처럼 “제 자신을 嘲弄하”고 “제 자신을 속여 버릇하”고 “必要 以上의 ‘야유’”를 보낸다.

  둘째, 작은어머니(실제로는 親母)로 표상되는 肉親에게 “憎惡의 念”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가족관계의 파괴적 현재에 대한 공포. ‘나’는 “勿論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육친까지를 미워하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 도무지 없어지”는 것을 탄식한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버릇”이 꽤 오래 되었고 회복하기가 힘든 상태이다. 이것은 첫 번째 공포, 즉 ‘나’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에게는 “불쌍한 동물들” 같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지만 “무슨 방법으로”도 “죽을 먹”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限 없는 罪를 섬”기는 수밖에 없다. “赤貧”은 각혈만큼이나 불가항력적다. “惡臭가 가득한 肉身들”을 “피를 吐하”는 ‘나’가 “헌구루마 위에 걸레짝같이 실어가지고 運搬해야” 하므로 “나에게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게 된다. ‘나’에게 남은 일은 그 가난한 집 속에서 “全部를 살라 버”리는 “自棄”이며 그 끝에 ‘나’는 “나의 特徵까지 내어놓”고 “녹슬은 송곳 모양으로” “말라버리"는 것이다.  

  셋째로 “배반한 계집”이 “넉달이 지나서 인제” “때와 손자죽이 잔뜩 묻은 채” 돌아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공포. ‘나’는 믿을만한 여인이 하나도 없고 “女人이라는 것이 그저 끝없이 輕佻浮薄한 음란한 妖物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 3년 동안 지극히 사랑하였던 대상에게 배반당했다는 이 경험은 “믿음이라는 力學의 支點”을 잃게 하여 모든 관계에 대해 “전혀 캄캄”한 지경에 이르게 한다. 사랑했던 여인이 “天下의 公規”를 버렸기 때문에 ‘나’는 “용서하여서는 안” 되며 “전후불각으로 취하여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사는 도리”이다. ‘나’는 여인의 배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나’가 “生物의 이렇다는 意義를 훌떡 잃어버린”, 즉 성적으로 무능력한 “宦臣”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 번째 공포의 원인, 즉 “제이차 각혈” 이후의 육체적 무기력함과 연관된 사실이다. “삼년 동안 끔찍이도 사랑하였”지만 이렇게 “끝장”을 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여인이 “경조부박한 음란한 요물”인 탓보다는 ‘나’가 “제 팔뚝을 들 힘조차 없”는 탓이 더 크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돌아온 아내에게 “따귀도 한 개 갈겨주고 싶”고, “호령도 좀 하여 주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더 절실하게 “먼발치서라도 어디 좀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대면하지 못하고 “입 맛을 쩍 쩍 다시면서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귀족취미 : 기록의 방법론 

  결핵과 적빈,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배반까지 겹치는 고통의 삼위일체 속에서 ‘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현실의 고통을 물리치기보다는 그 고통을 “귀족취미”로 기록하는 방법을 택한다. 어쩌면 기록하기 위해 그 고통과 함께 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고통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나’의 “귀족취미”는 더욱 빛을 발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족취미”의 정체는 무엇인가? 텍스트에서 답을 찾아보자면 “귀족취미”란 “近來의 心境을 正直하게 말하려 하지 않”게 하는 요소이다. “근래의 심경”은 앞서 말한 삼중고(三重苦)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지경에 놓여 있음이 틀림없다. 죽음이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의 딱한 처지는 “증오의 염”이 생길 정도로 보기에 안쓰럽고, 사랑하던 여인에게서는 배반을 당했다. “귀족취미”가 없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절규밖에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이 택한 것은 위트와 유머이다. ‘나’는 정말 못 살 것 같은 위치에 서 있지만 그 위치에서도 재주넘기를 한다. “귀족취미”란 결국 귀족들이 가졌던 비일상적 일상에서 얻어진 환각이 아닌가. 자기가 처한 현실을 끊임없이 왜곡하여 현재를 그래도 견딜만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이것이 ‘나’를 내세운 이상이 할 수 있는 ‘수사(修辭)의 곡예’이다. 하지만 이 ‘수사의 곡예’가 언제나 즐거울 수만은 없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현실은 불쑥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기 때문이다.

무슨 方法으로든지 生活力을 恢復하려 꿈꾸는 때도 없지는 않다. 그것 때문에 나는 입때 自殺을 안하고 待機의 姿勢를 取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바로 “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이다. 비장하게 序章을 열어젖혔지만 그 비장함은 이내 자신을 향한 “조롱”과 “야유”로 변한다. “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혹은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다는 “귀족취미”가 발동되고 있다. “심경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귀족취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취미”은 생생한 고통마저 비일상적으로 승화시켜 현실 감각을 둔화시킨다. 대신 언어를 매개로 한 환상이 현실의 “마개 뽑힌 가슴에 담을” 일용할 양식이 된다. ‘나’에게는 자신의 공포를 기록할 언어가 있기 때문에 무서운 현실은 좋은 재료로 활용된다. 그래서 ‘나’는 “自身을 輕蔑하”는 대신 “부끄럽게 생각하리라”고 다짐한다. 눈여겨 볼 것은 ‘나’가 현재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생각‘하리라’고 예정형의 사고를 하고 있는 점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입장마저도 유보시킨다. 이것은 ‘나’가 “입때 자살을 안하고 기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런 “귀족취미”가 ‘나’의 절망감을 덜어줄 수 없는 것은 ‘나’에게는 귀족취미에 걸맞는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적빈”이 ‘나’의 가장 구체적인 실존이라고 할 때,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두컴컴한 房 안에 標本과 같이 혼자 端坐하여 蒼白한 얼굴”로 “後悔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는 질 것이 뻔한 게임에 판돈을 걸어 놓고 있는 셈이다. 
 

야유 : 자기파괴와 자기탐닉의 수사(修辭)

  <공포의 기록>은 병이 깊은 한 예민한 청년의 황량한 내면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공포”다. 이 “공포”를 그는 “귀족취미”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방법론은 “야유”다.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야유를 통해 “공포”에 떨고 있는 자신을 은폐한다. 절망적 “自棄” 상태를 “야유”함으로써 그의 “기록”은 위트와 유머를 획득한다.

그러나 그 이튿날 나는 작은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脈搏百二十五의 팔을 안은 채, 나의 物慾을 부끄럽다 하였다. 나는 목을 놓고 울었다. 어린애같이 울었다.
남 보기에 퍽이나 醜惡했을 것이다. 그리다 나는 내가 왜 우는가를 깨닫고 곧 울음을 그쳤다. 

  작은어머니와 ‘나’는 어떤 이유로 말다툼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물욕”이라는 단어로 추정하건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일어난 다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자신의 “물욕”이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목을 놓고 울었”던 것이 “추악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왜 울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남 보기 “추악”할 만한 일이라고 애써 사정을 은폐한다. 여기에 “야유”가 동원된다. “왜 우는가를 깨닫”게 되면 ‘나’는 “울음을 그”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나’는 우는 것조차 자기검열을 하는 셈인데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은 “울음을 그”쳐야 한다는 인식이다. 이러저런 일로 너무 원통하고 분해서 아이처럼 울었다, 라고 표현하는 것과 울긴 울었는데 생각해보니 울 일이 아니더라, 라고 진술하는 것 사이에는 “남 보기 퍽이나 추악했을 것”이라는 자의식이 놓여 있다. ‘나’는 ‘자의식의 괴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면에 깊이 빠져 있는데 이 내면탐색은 이율배반적으로 ‘자기파괴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광채(光彩)나는 「루파슈카」를 입었고 퇴폐적(頹廢的)으로 보”인다고 할 정도로 자기탐닉적이다.

사람이 나를 싫어할 성싶은데 나도 사실 내가 싫다. 이렇게 저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남을 위할 줄 알 수 있으랴. 없다. 그러면 나는 참 不幸하구나. 
 

 ‘나’는 “저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며 “사람이 나를 싫어할 성싶”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참 불행”한 존재로 생각하는 자기연민을 갖고 있다. “야유”의 독특한 효과가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라는 인물이 “추악”하고 “오물”일지라도 스스로를 야유하면 '나‘는 “참 불행”한 존재로서 미워할 수 없는 “창백하고도 무시무시한 풍모”의 “소년”의 환상(幻像)을 획득한다. 한편 ’나‘의 스스로에 대한 야유는 다음의 예처럼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함부로 얘 제 침을 퇴 퇴 배앝으면서 보조(步調)는 자못 어지럽고 비창(悲愴)한 것이었다.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나면 약속 빨리 내 심경(心境)에 아첨하는 이 전신(全身)의 신경(神經)은 번번이 대담(大膽)하게도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이 일신(一身)에 벼락치기를 바라고 바라고 하는 것이었다.
「경칠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에나 질컥 치여 죽어버리지 그랬으면 이렇게 후덥지근헌 생활(生活)을 면(免)허기라두 허지」
하고 주착 없이 중얼거려 본다. 그러나 짜장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가 탁 앞으로 닥칠 적이면 뎅급을 해서 피(避)하는 재주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능(能)히 빠르다고는 못해도 비슷했다. 그럴 적이면 혀를 쑥 내밀어 제 자신(自身)을 조롱(嘲弄)하였읍네 하고 제 자신(自身)을 속여 버릇하였다.

  나는 여기에 <공포의 기록>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다가오는 죽음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공포 속에서 ‘나’, 즉 이상이 선택한 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술에 취해 현실을 잠깐 잊어버리거나 죽고 싶다고 떠벌이거나 그런데도 죽기는 어렵더라고 너스레를 떠는 일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스스로가 “소년”으로 표상되듯이 ‘나’는 미성숙한 존재이다. 이 ‘미성숙’을 ‘나’는 거리낌없이 노출하고 또한 야유한다.

나는 나의 讀書를 뾰죽하게 접어서 종이飛行機를 만든 다음 어린아이와 같이 나의 自棄를 태워서 죄다 날려 버렸다. (강조는 인용자)

  “독서”를 접어서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自棄를 태워서 죄다 날려 버렸다”는 진술도 <공포의 기록>의 핵심에 해당한다. 독서는 ‘나’가 “루파슈카”를 입은 “소년”을 자신의 상상에 불러들이는데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종이비행기 접기 같은 어린아이의 놀이는 현실의 공포를 잠시 잊는, 혹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행위였을 것이다. 더구나 비행기를 날릴 때에 “自棄를 태워” 날린다는 것은 그가 한 최종적인 놀이, 즉 죽음을 연기하는 놀이가 바로 언어유희, 즉 수사(修辭)에 있음을 보여준다.


기록과 소설 사이

  소설의 요체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보면 <공포의 기록>은 소설 이전 혹은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에서 ‘자아’는 탐구되지만 ‘세계’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드러나지 않고 ‘대결’은 아예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후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공포의 기록>은 내면풍경에 대한 탁월한 수사학이 출몰하는 텍스트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결함이 적지 않다. 이렇다 할 사건이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전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리 사소설(私小說)이고 단편소설이라 할지라도 ‘수사학’만으로는 소설의 육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요컨대 <공포의 기록>은 수기와 소설의 과도기적 형태로서 이상이 붙인 제목처럼 죽음을 앞둔 한 예민한 청년의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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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오토바이
조두진 지음 / 예담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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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두진의 <아버지의 오토바이>(예담, 2009)를 읽었다. 술술 잘 읽힌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데 한 나절이 걸리지 않았다.

엄시헌이란 인물이 있다. 그가 이 소설에서 맡은 역할은 아버지다. 그는 끝내 아버지로서만 이 소설에 등장해서 퇴장한다. 그게 이 소설의 뚝심이라면 뚝심이지만 답답한 측면이 없지 않아 있다. 어떤 사람인가. 엄시헌은 시골에서 살다가 상경해서 도시빈민이 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 왜 시골에 살다가 도시로 오는가? 여기에는 그의 큰아들 종석의 병이라는 운명적 문제가 걸려 있다. 엄시헌은 종석을 큰 병원에 데리고 가서 검사를 받아보지만 뇌성마비에 간질에 자폐증까지 겹쳐 있어서 스무 살을 넘기지 못할 거라는 통보를 받는다. 엄시헌은 시골 구석에 살면 큰아들을 일찍 잃을까봐 도시로 온다. 무슨 일을 해서든 돈을 벌고 최상의 의료 서비스를 베풀어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도시 생활이 어디 쉬운가. 이 일 저 일 하다가 실패를 맛본 엄시헌은 김천의 제방 공사 현장으로 내려가고 이때부터 가족들과는 얼굴을 마주대하기 힘든 사이가 된다. 돈을 벌기 위해서,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아버지 엄시헌은 가족들과 함께 있을 수가 없다.


<아버지의 오토바이>는 추리소설처럼 시작한다. 엄시헌이 오토바이를 타고 국도를 달리다 사고를 당해 사망한 것이다. 그런데 오토바이는 도로 위의 숲으로, 시신은 도로 아래 배수관으로 유기되어 있었다. 누가 엄시헌을 죽였는가. 왜 그는 동네 사람들로부터 원한을 사고 있는가. 이런 물음이 독자들에게 제기된다. 그러나 이 소설이 추구하는 것은 추리소설의 흥민진진한 수수께끼 풀기가 아니다.


엄시헌의 둘째아들 엄종세가 부음을 받고 아버지가 살던 김천으로 내려오게 된다. 종세는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아버지를 이해하게 된다. 이것이 아마 조두진이 말하고 싶은 것이었을 게다. 아버지가 살아 있을 때 종세는 아버지와 거의 만나지 못(안)했다. 처음엔 아버지가 돈을 벌러 가서 못 만난 것이었고, 나중에는 유년기를 같이 보내지 않은 원망감과 서먹함 때문에 아버지를 가깝게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아버지가 죽고 그의 삶을 이해하고 난 뒤에는 아쉽게도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만나고 싶어도 못 만나는 것이다.


엄시헌은 두 아들과 아내를 위해 자기 한 몸의 희생했고, 자기의 욕망을 억눌렀다. 작가는 그런 엄시헌의 삶을 거룩한 것으로 묘사하고 싶었던 듯하다. 이것에 공감하는 독자는 이 소설을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을 것이고, 여기에 절대로 동의할 수 없는 독자는 이 소설을 토론을 위한 텍스트로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엄시헌과 같은 동네에 살고 형 아우하며 지냈던 장기풍의 입을 빌어 역설한다. 세상은 부도덕한 일들이 넘치는 곳이다. 이런 곳에서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면 고상한 척, 정의로운 척하고만 살 수 없다. 무슨 짓을 해서든지 처자식을 먹여 살리려고 했던 아버지를 자식이 우습게 알면 안된다.


그러나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모두가 엄시헌의 방식으로 살면 세상은 언제나 아귀다툼의 상태일 것이다. 즉 내 새끼가 귀하면 남의 새끼가 귀한 줄도 사람은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물론 엄시헌에게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없을 만큼의 절박함이 있었을 것이다. 예컨대 종석의 존재 자체가 엄시헌에게는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  생애의 부채이지 않았겠는가.


조두진은 작가 후기에서 이 작품을 통해 아버지를 미화하거나 복고를 주장할 생각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그 의도와 상관없이 이 작품은 세상의 아버지들을 미화하고 있으며 약간의 복고 취향을 드러낸다. (90년대 이후 소설에서 아버지들은 의무나 책임을 지닌 존재라기보다는 나약한 개인이었고, 가족이란 억압의 굴레였음을 상기해보자.)  마지막 장면에서 종세는 귀경길에 자동차를 갓길에 세우고 운다. 그의 눈물은 아버지에 대한 이해를 넘어선다. 어쩌면 그 눈물은 아버지의 삶에 대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 삶을 강요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눈물이기도 하다.


솔직히 나는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나오는 엄시헌의 세계, 즉 희생하는 아버지의 삶에 찬사를 보내고 싶지 않다. 물론 작가도 이 삶에 찬사를 보내라는 의도로 이 소설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라 확신한다. 다만 그렇게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무수한 아버지들을 이해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의미있는 경험이었다. 이 정도에서 작가와 독자의 타협점을 찾을 수도 있을 거 같다. 나 같은 30대가 이 소설을 다 읽고 나면 분명히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아버지에게 전화 한 통 해야겠다."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 읽은 값은 충분하다.


***

위에 언급한 것 말고도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많이 있지만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서 다 소개하지는 않겠다. 특히 미스 정과의 연애담은 엄시헌의 생애를 소설적으로 풍성하게 하지만 직접 읽어보라는 취지에서 생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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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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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권의 <어린왕자의 귀환>(돌베개, 2009)은 '신자유주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만화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교양만화라 할 수 있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김태권 씨가 글과 그림을 맡았고,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가 해제를 맡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태권 씨의 만화는 그림체는 약간 어색하긴 해도 그것을 상쇄할 만큼 스토리와 아이디어가 좋다. 굉장히 재미있다. 우석훈 박사의 해제는 어떤가? 한마디로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온갖 폼을 잡아가면서 어려운 학술 용어를 쓰는 사기꾼 경제학자들이 많은데 우석훈은 우리 시대의 경제현상, 즉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고달픈지를 아주 쉬운 말로 간결하게 설명한다. 만화도 뛰어나고, 해제도 훌륭하니 얼쑤 어이 아니 이 책을 읽으리요. 남녀노소 누구나 왜 이렇게 우리 삶이 고달퍼졌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게 좋겠다. 물론 이 책은 작금의 고통스런 현실에 어떤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저자는 우리 모두에게 같이 고민하고 답을 찾아보자고 권유한다.

자, 그럼 좀 더 자세히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프롤로그 비정규직 어린왕자


눈치를 챘겠지만 이 만화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에게 훨씬 더 재미있다. 만화 전체가 하나의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린 왕자>의 세계는 사용 가치의 세계이다. 어린 왕자가 키우는 장미는 시장에서 얼마의 가격으로 팔리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어린 왕자는 장미를 사랑하고 장미와 교감할 수 있기 때문에 장미를 키울 뿐이다. 그런데 현재 지구는 어떤가. 지구에서 어린 왕자의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경쟁사회에서 낙오되어 길거리의 노숙자가 되기 딱 좋기 때문이다. 아련한 서정적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 왕자 이미지'는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만나면서 눈물겨운 사회드라마로 탈바꿈된다.


프롤로그에서 김태권은 우리 시대 최대의 과제 중 하나인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다. 남수와 주영(이 만화의 주인공, 남수는 어린 왕자, 주영은 어린 공주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왕자이고 비정규직 공주이다)은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인턴직에 응시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인턴직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부당한 처우에 약간이라도 항의한다면 그는 그 순간 취업시장에서 소외되고 만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 신자유주의를 논하고 정의를 찾던 똑똑했던 학생들이 어김없이 인턴사원이 되어 지배체제에 사뿐히 합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어느새 우리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고 우리는 '실업의 공포'에 떠밀려 노동시장에서 설움을 참으면서 싼값에 팔려나간다.



01 장사꾼 손님의 강연 : 자본주의 사회의 휴식과 일상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한 것보다 항상 적은 임금을 받는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받지 못한 그들의 몫은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그 돈은 회사에 남는다. 회사는 그 돈을 어떻게 쓰나? 그들은 사업을 확장하거나 설비 투자를 한다. 그럼 점점 몸집을 불린 회사는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계속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을 만든다. 김태권은 이것을 '알약 만들기'에 비유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알 먹으면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알약이 있다. 이 알약을 먹으면 일주일에 53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절약한 시간은 어디다 쓰나? 한 알 먹으면 2주 동안 물을 먹지 않아도 되는 알약을 개발하는 데 쓰인다. 이쯤되면 이 이야기의 모순을 알 것이다. 더 많은 자유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게 노동자들의 자유 시간을 늘리지는 않는다는 것. 만화에 나오는대로 그냥 샘에 가서 물을 길어 먹는 게 그 따위 알약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삶을 살게 해준다. 그런데 자본주의 아래 '길들여진' 인간은 자신이 샘까지 가서 물을 길어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 더구나 그러한 구매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일상의 모든 요소에 돈이 개입하고 심지어 휴식마저도 돈이 드는 삶의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 그건 이 만화가 통찰력있게 제시한 방법, 즉 샘물을 떠 먹으러 가는 것이다. 샘물을 사 먹는 게 아니라 떠 먹으러 길을 걷는 것. 경쟁에 뒤떨어질까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유한한 삶을 인식해서 그것을 보람되게 보내는 것. 지금의 세태에 비추어보면 너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삶도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보편적인 삶의 방식은 아니다.



02 여행을 떠나다 : 자유무역의 허와 실


자유무역. 한미FTA 때문에 귀가 닳도록 들은 '자유무역'은 흔히 비교우위의 법칙에 따라 모든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이론상' 말해진다. 하지만 자유무역이 모든 국가에 이득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저개발국가는 선진국의 공산품을 사고 자국의 '경쟁력 있는' 농산품을 판다. 그런데 왜 선진국은 점점 부자가 되고 저개발국가는 점점 가난해지나? 이론적으로만 살핀다면 둘 다 비교우위의 법칙에 따라 경제적 풍요를 구가해야 하는데 말이다. 2장은 이런 자유무역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유무역, 그중에서도 FTA 같은 국가간 협정은 말이 자유무역이지 더 큰 범위에서 살펴보면 '보호무역'에 가깝다. 왜냐하면 관세의 벽을 허무는 두 국가 사이의 수출입은 곧 제3국의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벽이 되기 때문이다.



03 자본가의 별과 실업자의 별 : 경영합리화의 그늘


우리는 주주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주주는 누군가?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전국민펀드시대'가 열렸다. 주주는 이제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이다. 시장에서 호떡을 굽는 아줌마가 주주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가?


주주는 자신이 투자한 몫에 대해 최대한의 이익을 차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모든 기업들은 투자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단기 이익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대상은 노동자이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기업 내 구성원들의 이익이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보장하는 쪽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이른바 사용자라고 하는 쪽, 그중 가장 위에 있는 CEO도 주주의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업 내 구성원 중에서 주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경영합리화란 주주 이익의 최대 실현이고, 그것을 위해서 기업은 제 살을 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경영합리화'는 실업자 증가, 소비 시장 침체 등 '불안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  



04 임금님의 별 : FTA와 시장 실패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는 얘기는 MB정권 들어서 가장 자주 듣는 소리 중 하나이다. 이미 대부분의 공기업이 민영화되었고, 민영화 단계에 들어섰다. 민영화 예찬론자들은 공기업이 부도덕하다는 이미지를 대중에 유포한다. 예를 들자면 적자를 보았는데도 직원들 보너스는 더 늘었다는 식으로. 그런데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경영을 관리감독해서 시정하면 될 일이지 아예 공기업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해결할 일은 아니다.


김태권은 공기업 민영화의 사례를 몇 가지 들고 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우편 서비스를 민영화할 경우, 도서지역에 우편물이 지금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고 배달될 것이다. 그러다 수익이 맞지 않는다면 민간 기업은 도서지역 우편 서비스를 중단할 수 있다. 한전이나 도시가스공사가 민영화된다면 어떨까? 미국의 전력 회사들이 민영화된 이후 정전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하는 것은 타산지석이 될만하다.


일상의 모든 부문을 민간 기업에 맡길 수는 없다. 삶의 모든 요소를 시장에 맡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모든 시스템을 조정할 것으로 봤다지만 실제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주먹'이 되어 시장의 실패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05 가로등지기의 별 : 잉여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모든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만큼' 임금을 받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기업에서는 발생된 이윤을 다시 투자해서 더 큰 이윤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적게 일하며서 더 많이 받는 바람직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으니 아직 한국의 상황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최근에 최저임금제를 둘러싸고 경총과 양대 노총이 벌인 논쟁을 살펴보면 한국 사회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에 속한다. 반면 사회적 복지는 악회일로에 있다. 최저임금을 깎자는 논의를 경총 같은 단체가 방송에 나와서 버젓이 밝히는가 하면("안 그러면 고용을 더 못한다!"는 협박까지도!" ) 비정규직은 법의 보호 아래 양산되고 사회 안전망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망가지고 있다.



06 백 년 전의 지구 : 민영화에 얽힌 거짓말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장이다. <한성전기회사>라는 제목으로 연극을 만들고 싶어질 정도이다. 등장인물은 고종, 알렌, 콜브란, 전차를 타는 시민들, 시위대, 일본인 사업가 등등이 나올 수 있겠다. 이 장도 역시 공공부문이 민영화될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역사적 사례를 들어 살피고 있다. 우석훈의 말대로 "민영화가 선진화는 아니"다.



07 상자에 갇힌 별 : 비정규직과 노동자 분할통제


이 책에서 가장 슬픈 대목은 7장이다. 이른바 식민지 통치의 한 기술인 분할통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연대해야할 대상을 미워하고 그들과 싸우고 반목한다. 사회적 연대는 기득권 세력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다. 힘이 없는 사람들도 서로 연대하면 거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득권 세력,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하다. 그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어서 서로 반목하게 만든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의 노동에 대해 차별적인 대우를 함으로써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은 학연, 지연, 혈연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함으로써 계급적으로 단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노동자의 수만큼 표를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당면 과제는 이 모든 분할통제의 장치들을 인식하고 파괴하여 연대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이 책의 이 대목은 슬프다.

 

부록1 어린왕자와 신자유주의

 
김태권은 '어린 왕자의 양 상자'를 '자본주의의 물신'으로 바꿔서 제시하는데 이게 아주 압권이다.


"어린왕자는 마침내 이런 생각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한 법이야. 모자에는 뱀과 코끼리가 숨어 있고, 저 상자 안에는 양이 숨어 있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고 말이야'."


"그리고 이 자본주의의 우주에는 거대한 물신(物神)이 숨어 있는 거야. 자본이라는 무시무시한 물신이, 거대한 구렁이 괴물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켰어. 사람들의 사고와 의지마저도!" (211쪽)


그렇다. 문제는 바깥에만 있지 않다. 우리 안의 물신을 찾아서 그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MB OUT"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에 우리는 우리 안의 MB에게도 "OUT"을 요구해야 한다.



부록2 민생뎐



<민생뎐>은 언젠가 한나라당이 했던 어설프고, 유치하고, 파렴치한 연극 <환생경제>를 떠올리게 한다. 일종의 <환생경제>의 안티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물론 <민생뎐>은 <환생경제>보다 5만배 이상 재미있고 유익하다.


결론은 이거다: 지금 같은 세상이 싫다면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약간의 차이를 뒤로 하고 연대해서 세상을 바꿔야만 한다는 것.




총평


신자유주의가 뭔지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대입논술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들은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노동자들은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라고 푸념하는 유식한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나는 신자유주의고 뭐고 잘 살면 좋겠어, 라는 막무가내의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갈수록 힘들지, 하는 의문이 드는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좀 잘 알고 싶은데 너무 어려운 책들만 있어서 공부하기 싫었던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중학생 이상의 자녀를 두신 분들은 함께 독서토론할 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으세요.
고독한 분들, 타인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어린 왕자를 한때 동경했던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그리고 다시 어린 왕자를 만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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