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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의 귀환 - 신자유주의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
김태권 지음, 우석훈 / 돌베개 / 2009년 7월
평점 :
김태권의 <어린왕자의 귀환>(돌베개, 2009)은 '신자유주의 우주에서 살아남는 법'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만화다. 굳이 장르를 구분하자면 교양만화라 할 수 있다. 서울대 미학과를 졸업한 김태권 씨가 글과 그림을 맡았고, <88만원 세대>의 저자 우석훈 박사가 해제를 맡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김태권 씨의 만화는 그림체는 약간 어색하긴 해도 그것을 상쇄할 만큼 스토리와 아이디어가 좋다. 굉장히 재미있다. 우석훈 박사의 해제는 어떤가? 한마디로 머리에 쏙쏙 들어온다. 온갖 폼을 잡아가면서 어려운 학술 용어를 쓰는 사기꾼 경제학자들이 많은데 우석훈은 우리 시대의 경제현상, 즉 신자유주의 시대 우리의 삶이 왜 이렇게 고달픈지를 아주 쉬운 말로 간결하게 설명한다. 만화도 뛰어나고, 해제도 훌륭하니 얼쑤 어이 아니 이 책을 읽으리요. 남녀노소 누구나 왜 이렇게 우리 삶이 고달퍼졌는지 알고 싶은 사람은 이 책을 한 번 읽어보는 게 좋겠다. 물론 이 책은 작금의 고통스런 현실에 어떤 확실한 해답을 제시해주지는 않는다. 저자는 우리 모두에게 같이 고민하고 답을 찾아보자고 권유한다.
자, 그럼 좀 더 자세히 어떤 내용이 담겨 있는지 책 속으로 들어가 보자.
프롤로그 비정규직 어린왕자
눈치를 챘겠지만 이 만화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읽은 사람에게 훨씬 더 재미있다. 만화 전체가 하나의 패러디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어린 왕자>의 세계는 사용 가치의 세계이다. 어린 왕자가 키우는 장미는 시장에서 얼마의 가격으로 팔리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어린 왕자는 장미를 사랑하고 장미와 교감할 수 있기 때문에 장미를 키울 뿐이다. 그런데 현재 지구는 어떤가. 지구에서 어린 왕자의 사고방식은 위험하다. 경쟁사회에서 낙오되어 길거리의 노숙자가 되기 딱 좋기 때문이다. 아련한 서정적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는 '어린 왕자 이미지'는 이렇게 신자유주의를 만나면서 눈물겨운 사회드라마로 탈바꿈된다.
프롤로그에서 김태권은 우리 시대 최대의 과제 중 하나인 비정규직 문제를 다룬다. 남수와 주영(이 만화의 주인공, 남수는 어린 왕자, 주영은 어린 공주이다. 하지만 비정규직 왕자이고 비정규직 공주이다)은 대학을 졸업하고 일자리를 알아보지만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기 힘들다. 그래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인턴직에 응시할 수밖에 없다. 그나마 인턴직이라도 할 수 있으면 다행이다. 부당한 처우에 약간이라도 항의한다면 그는 그 순간 취업시장에서 소외되고 만다. 그래서 대학 시절에 신자유주의를 논하고 정의를 찾던 똑똑했던 학생들이 어김없이 인턴사원이 되어 지배체제에 사뿐히 합류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보이지 않는 손은 어느새 우리에게 채찍을 휘두르고 있고 우리는 '실업의 공포'에 떠밀려 노동시장에서 설움을 참으면서 싼값에 팔려나간다.
01 장사꾼 손님의 강연 : 자본주의 사회의 휴식과 일상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한 것보다 항상 적은 임금을 받는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받지 못한 그들의 몫은 어디에 있을까? 당연히 그 돈은 회사에 남는다. 회사는 그 돈을 어떻게 쓰나? 그들은 사업을 확장하거나 설비 투자를 한다. 그럼 점점 몸집을 불린 회사는 무엇을 하는가? 그들은 계속적으로 이익을 얻기 위해 새로운 물건을 만들고 새로운 비지니스 모델을 만든다. 김태권은 이것을 '알약 만들기'에 비유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알 먹으면 물을 마시지 않아도 되는 알약이 있다. 이 알약을 먹으면 일주일에 53분을 절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절약한 시간은 어디다 쓰나? 한 알 먹으면 2주 동안 물을 먹지 않아도 되는 알약을 개발하는 데 쓰인다. 이쯤되면 이 이야기의 모순을 알 것이다. 더 많은 자유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생산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게 노동자들의 자유 시간을 늘리지는 않는다는 것. 만화에 나오는대로 그냥 샘에 가서 물을 길어 먹는 게 그 따위 알약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더 인간적인 삶을 살게 해준다. 그런데 자본주의 아래 '길들여진' 인간은 자신이 샘까지 가서 물을 길어먹는 것을 잊어버리고 돈을 주고 사먹어야 하는 것으로 안다. 더구나 그러한 구매행위에서 즐거움을 느낀다.
일상의 모든 요소에 돈이 개입하고 심지어 휴식마저도 돈이 드는 삶의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 그건 이 만화가 통찰력있게 제시한 방법, 즉 샘물을 떠 먹으러 가는 것이다. 샘물을 사 먹는 게 아니라 떠 먹으러 길을 걷는 것. 경쟁에 뒤떨어질까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라 유한한 삶을 인식해서 그것을 보람되게 보내는 것. 지금의 세태에 비추어보면 너무 허황된 이야기가 아니냐고 묻는 분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의 삶도 인류 역사를 돌이켜볼 때 보편적인 삶의 방식은 아니다.
02 여행을 떠나다 : 자유무역의 허와 실
자유무역. 한미FTA 때문에 귀가 닳도록 들은 '자유무역'은 흔히 비교우위의 법칙에 따라 모든 국가에 이익이 된다고 '이론상' 말해진다. 하지만 자유무역이 모든 국가에 이득인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저개발국가는 선진국의 공산품을 사고 자국의 '경쟁력 있는' 농산품을 판다. 그런데 왜 선진국은 점점 부자가 되고 저개발국가는 점점 가난해지나? 이론적으로만 살핀다면 둘 다 비교우위의 법칙에 따라 경제적 풍요를 구가해야 하는데 말이다. 2장은 이런 자유무역의 딜레마를 다루고 있다.
한마디로 자유무역, 그중에서도 FTA 같은 국가간 협정은 말이 자유무역이지 더 큰 범위에서 살펴보면 '보호무역'에 가깝다. 왜냐하면 관세의 벽을 허무는 두 국가 사이의 수출입은 곧 제3국의 입장에서 보면 또 하나의 벽이 되기 때문이다.
03 자본가의 별과 실업자의 별 : 경영합리화의 그늘
우리는 주주 자본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주주는 누군가? 97년 외환위기 이후에 '전국민펀드시대'가 열렸다. 주주는 이제 특정한 사람들이 아니라 불특정 다수이다. 시장에서 호떡을 굽는 아줌마가 주주가 아니라는 보장이 없는 셈이다. 그런데 이게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가?
주주는 자신이 투자한 몫에 대해 최대한의 이익을 차지하려고 한다. 따라서 모든 기업들은 투자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단기 이익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가장 많은 피해를 입는 대상은 노동자이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기업 내 구성원들의 이익이 아니라 주주의 이익을 보장하는 쪽으로 변화된다. 따라서 이른바 사용자라고 하는 쪽, 그중 가장 위에 있는 CEO도 주주의 이익을 보장해주지 못하면 자리를 잃을 수밖에 없다. 그러니 기업 내 구성원 중에서 주주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경영합리화란 주주 이익의 최대 실현이고, 그것을 위해서 기업은 제 살을 깎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기적인 안목에서 볼 때 이러한 '경영합리화'는 실업자 증가, 소비 시장 침체 등 '불안한 사회'를 만들 수밖에 없다.
04 임금님의 별 : FTA와 시장 실패
공기업을 민영화한다는 얘기는 MB정권 들어서 가장 자주 듣는 소리 중 하나이다. 이미 대부분의 공기업이 민영화되었고, 민영화 단계에 들어섰다. 민영화 예찬론자들은 공기업이 부도덕하다는 이미지를 대중에 유포한다. 예를 들자면 적자를 보았는데도 직원들 보너스는 더 늘었다는 식으로. 그런데 그런 문제가 발생하면 경영을 관리감독해서 시정하면 될 일이지 아예 공기업을 시장에 내다 팔아서 해결할 일은 아니다.
김태권은 공기업 민영화의 사례를 몇 가지 들고 그 문제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우편 서비스를 민영화할 경우, 도서지역에 우편물이 지금보다 훨씬 비싼 값을 치르고 배달될 것이다. 그러다 수익이 맞지 않는다면 민간 기업은 도서지역 우편 서비스를 중단할 수 있다. 한전이나 도시가스공사가 민영화된다면 어떨까? 미국의 전력 회사들이 민영화된 이후 정전 사태가 심심찮게 발생하는 것은 타산지석이 될만하다.
일상의 모든 부문을 민간 기업에 맡길 수는 없다. 삶의 모든 요소를 시장에 맡길 수 없는 것과 같다. 아담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의 모든 시스템을 조정할 것으로 봤다지만 실제로 '보이지 않는 손'은 '보이는 주먹'이 되어 시장의 실패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05 가로등지기의 별 : 잉여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앞서도 말했지만 모든 노동자는 자신이 일한 '만큼' 임금을 받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기업에서는 발생된 이윤을 다시 투자해서 더 큰 이윤을 만들려고 하기 때문이다. 성공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 적게 일하며서 더 많이 받는 바람직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으니 아직 한국의 상황은 거기에 미치지 못한다. 최근에 최저임금제를 둘러싸고 경총과 양대 노총이 벌인 논쟁을 살펴보면 한국 사회가 거꾸로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나라는 OECD 가입국 중에서 노동시간이 가장 긴 나라에 속한다. 반면 사회적 복지는 악회일로에 있다. 최저임금을 깎자는 논의를 경총 같은 단체가 방송에 나와서 버젓이 밝히는가 하면("안 그러면 고용을 더 못한다!"는 협박까지도!" ) 비정규직은 법의 보호 아래 양산되고 사회 안전망은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망가지고 있다.
06 백 년 전의 지구 : 민영화에 얽힌 거짓말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읽은 장이다. <한성전기회사>라는 제목으로 연극을 만들고 싶어질 정도이다. 등장인물은 고종, 알렌, 콜브란, 전차를 타는 시민들, 시위대, 일본인 사업가 등등이 나올 수 있겠다. 이 장도 역시 공공부문이 민영화될 경우 어떤 문제가 생기는지 역사적 사례를 들어 살피고 있다. 우석훈의 말대로 "민영화가 선진화는 아니"다.
07 상자에 갇힌 별 : 비정규직과 노동자 분할통제
이 책에서 가장 슬픈 대목은 7장이다. 이른바 식민지 통치의 한 기술인 분할통치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자들에게 적용된다. 우리는 연대해야할 대상을 미워하고 그들과 싸우고 반목한다. 사회적 연대는 기득권 세력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이다. 힘이 없는 사람들도 서로 연대하면 거대한 힘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기득권 세력,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이 서로 연대하지 못하도록 여러가지 장치를 마련하다. 그들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누어서 서로 반목하게 만든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의 노동에 대해 차별적인 대우를 함으로써 서로 연대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들은 학연, 지연, 혈연의 관점에서 세상을 보게 함으로써 계급적으로 단결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노동자 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이 노동자의 수만큼 표를 획득하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들의 당면 과제는 이 모든 분할통제의 장치들을 인식하고 파괴하여 연대의 길을 모색하는 것이다. 말은 쉽지만 이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래서 이 책의 이 대목은 슬프다.
부록1 어린왕자와 신자유주의
김태권은 '어린 왕자의 양 상자'를 '자본주의의 물신'으로 바꿔서 제시하는데 이게 아주 압권이다.
"어린왕자는 마침내 이런 생각에 도달한 것입니다. '그래, 보이지 않는 것이 중요한 법이야. 모자에는 뱀과 코끼리가 숨어 있고, 저 상자 안에는 양이 숨어 있지.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고 말이야'."
"그리고 이 자본주의의 우주에는 거대한 물신(物神)이 숨어 있는 거야. 자본이라는 무시무시한 물신이, 거대한 구렁이 괴물처럼 모든 것을 집어삼켰어. 사람들의 사고와 의지마저도!" (211쪽)
그렇다. 문제는 바깥에만 있지 않다. 우리 안의 물신을 찾아서 그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 보아야 한다. "MB OUT"이라는 구호를 외칠 때에 우리는 우리 안의 MB에게도 "OUT"을 요구해야 한다.
부록2 민생뎐
<민생뎐>은 언젠가 한나라당이 했던 어설프고, 유치하고, 파렴치한 연극 <환생경제>를 떠올리게 한다. 일종의 <환생경제>의 안티버전이라고 보면 되겠다. 물론 <민생뎐>은 <환생경제>보다 5만배 이상 재미있고 유익하다.
결론은 이거다: 지금 같은 세상이 싫다면 함께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약간의 차이를 뒤로 하고 연대해서 세상을 바꿔야만 한다는 것.
총평
신자유주의가 뭔지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대입논술을 준비하고 있는 수험생들은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노동자들은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세상은 다 그렇고 그런 거지, 라고 푸념하는 유식한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나는 신자유주의고 뭐고 잘 살면 좋겠어, 라는 막무가내의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세상살이가 왜 이렇게 갈수록 힘들지, 하는 의문이 드는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세상 돌아가는 꼴을 좀 잘 알고 싶은데 너무 어려운 책들만 있어서 공부하기 싫었던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중학생 이상의 자녀를 두신 분들은 함께 독서토론할 책을 찾고 있다면 이 책을 꼭 읽으세요.
고독한 분들, 타인과의 연대를 모색하는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어린 왕자를 한때 동경했던 분들 이 책을 꼭 읽으세요. 그리고 다시 어린 왕자를 만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