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문학전집 2 - 소설
김윤식 엮음 / 문학사상사 / 1991년 10월
평점 :
절판


만신창이의 내면 풍경 

  이상의 사망 이후에 발표된 <恐怖의 記錄>은 정확한 집필 연대가 밝혀져 있지 않지만 내용상 1936년 동경행 이전으로 추측할 수 있다. 이 무렵의 이상은 “第二次의 咯血” 이후 자신의 “壽命에 對한 槪念을 把握하였”으며 “心境을 正直하게 말하려 하지”는 않지만 자신을 “滿身瘡痍”라 여겼고, 이러한 자기 진단은 수사를 넘어선 진실에 가까웠다. 그러나 이상은 절망을 액면 그대로 보여주는 것을 거부하는데 그 이유는 그에게 “貴族趣味”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포의 기록>은 “만신창이”가 된 환자가 쓴 왜곡된 병상일지이자 자신의 불행에 대한 “야유”다.  
 

공포의 정체

  공포는 불안과 달리 분명한 대상을 갖고 있다. <공포의 기록>에 등장하는 ‘나’를 괴롭히는 “苦痛이란 妖怪”는 무엇인가? ‘나’가 꿈꾸는 “生活力의 恢復”을 방해하는 요괴의 정체는 무엇인가? 텍스트에서 추출해낸 사실들만 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제이차의 각혈”로 뚜렷하게 드러나는 죽음에 대한 공포. ‘나’에게는 생활을 영위할 만한 기운이 없다. 병든 자의 눈에 들어오는 현실은 무겁기만 하다.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닥치는 모든 현실은 “巨岩과 같은 不安”이다. 이렇게 “重壓이 되어 덤벼”드는 공포에 맞서기 위한(실제로는 피하기 위한) ‘나’의 방법은 “닭들의 생활”에도 “갸륵한 분쟁”이 있다는 것을 멀거니 관찰하며 자신의 불운을 일반화하거나 “蛔蟲散을 頓服하”고 “昏到라는 것이 오기를 기다”리거나 “木船 하나 빌어 麥酒도 싣고······목노 찾아 취토록 먹”는 것이다. 그것도 아니면 상상으로 “먼 바다를 건너”가서 “光彩나는 ‘루파슈카’를 입”고 “어덴지 모르는 먼 나라의 十字路를 걷”너는 것이다. ‘나’는 자신에게 닥친 ‘병’이란 중압에 대해서 투병 의지가 전혀 없다. 그렇다고 해서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거나 그것을 초월한 어떤 세계를 갖고 있지도 않다. “貨物自動車에 질컥 치여 죽어버”렸으면 하고 떠벌이지만 실상은 “화물자동차가 탁 앞으로 닥칠 적이면 뎅급을 해서 避 하는 재주”를 발휘한다. 죽음에 대한 순응도 저항도 아닌 이 태도는 끝없는 연기(延期이면서 演技)를 필요로 한다. ‘나’는 공포에 떨면서 희극 배우처럼 “제 자신을 嘲弄하”고 “제 자신을 속여 버릇하”고 “必要 以上의 ‘야유’”를 보낸다.

  둘째, 작은어머니(실제로는 親母)로 표상되는 肉親에게 “憎惡의 念”을 가질 수밖에 없는 가족관계의 파괴적 현재에 대한 공포. ‘나’는 “勿論 이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육친까지를 미워하기 시작”해서 “이 세상에 의지할 곳이 도무지 없어지”는 것을 탄식한다. ‘나’는 “사람을 싫어하는 버릇”이 꽤 오래 되었고 회복하기가 힘든 상태이다. 이것은 첫 번째 공포, 즉 ‘나’가 병들어 있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나’에게는 “불쌍한 동물들” 같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지만 “무슨 방법으로”도 “죽을 먹”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저 “限 없는 罪를 섬”기는 수밖에 없다. “赤貧”은 각혈만큼이나 불가항력적다. “惡臭가 가득한 肉身들”을 “피를 吐하”는 ‘나’가 “헌구루마 위에 걸레짝같이 실어가지고 運搬해야” 하므로 “나에게는 생각할 여유조차 없”게 된다. ‘나’에게 남은 일은 그 가난한 집 속에서 “全部를 살라 버”리는 “自棄”이며 그 끝에 ‘나’는 “나의 特徵까지 내어놓”고 “녹슬은 송곳 모양으로” “말라버리"는 것이다.  

  셋째로 “배반한 계집”이 “넉달이 지나서 인제” “때와 손자죽이 잔뜩 묻은 채” 돌아왔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불신의 공포. ‘나’는 믿을만한 여인이 하나도 없고 “女人이라는 것이 그저 끝없이 輕佻浮薄한 음란한 妖物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 3년 동안 지극히 사랑하였던 대상에게 배반당했다는 이 경험은 “믿음이라는 力學의 支點”을 잃게 하여 모든 관계에 대해 “전혀 캄캄”한 지경에 이르게 한다. 사랑했던 여인이 “天下의 公規”를 버렸기 때문에 ‘나’는 “용서하여서는 안” 되며 “전후불각으로 취하여 의식을 완전히 잃어버”리는 것이 “사는 도리”이다. ‘나’는 여인의 배반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 그 까닭은 ‘나’가 “生物의 이렇다는 意義를 훌떡 잃어버린”, 즉 성적으로 무능력한 “宦臣”에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첫 번째 공포의 원인, 즉 “제이차 각혈” 이후의 육체적 무기력함과 연관된 사실이다. “삼년 동안 끔찍이도 사랑하였”지만 이렇게 “끝장”을 볼 수밖에 없었던 데에는 여인이 “경조부박한 음란한 요물”인 탓보다는 ‘나’가 “제 팔뚝을 들 힘조차 없”는 탓이 더 크지 않을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돌아온 아내에게 “따귀도 한 개 갈겨주고 싶”고, “호령도 좀 하여 주고 싶”지만 그것보다는 더 절실하게 “먼발치서라도 어디 좀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선다. 그러나 ‘나’는 아내와 대면하지 못하고 “입 맛을 쩍 쩍 다시면서 발길을 돌리”는 수밖에 없다.


귀족취미 : 기록의 방법론 

  결핵과 적빈, 그리고 사랑하는 여인의 배반까지 겹치는 고통의 삼위일체 속에서 ‘나’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현실의 고통을 물리치기보다는 그 고통을 “귀족취미”로 기록하는 방법을 택한다. 어쩌면 기록하기 위해 그 고통과 함께 살고 있다고 표현하는 것이 더 옳을지 모른다. 고통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나’의 “귀족취미”는 더욱 빛을 발할 기회를 얻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귀족취미”의 정체는 무엇인가? 텍스트에서 답을 찾아보자면 “귀족취미”란 “近來의 心境을 正直하게 말하려 하지 않”게 하는 요소이다. “근래의 심경”은 앞서 말한 삼중고(三重苦)로 이루 말할 수 없이 처참한 지경에 놓여 있음이 틀림없다. 죽음이 한걸음씩 다가오고 있고,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는 가족들의 딱한 처지는 “증오의 염”이 생길 정도로 보기에 안쓰럽고, 사랑하던 여인에게서는 배반을 당했다. “귀족취미”가 없다면 이런 상황에서는 절규밖에는 나올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상이 택한 것은 위트와 유머이다. ‘나’는 정말 못 살 것 같은 위치에 서 있지만 그 위치에서도 재주넘기를 한다. “귀족취미”란 결국 귀족들이 가졌던 비일상적 일상에서 얻어진 환각이 아닌가. 자기가 처한 현실을 끊임없이 왜곡하여 현재를 그래도 견딜만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키는 것, 이것이 ‘나’를 내세운 이상이 할 수 있는 ‘수사(修辭)의 곡예’이다. 하지만 이 ‘수사의 곡예’가 언제나 즐거울 수만은 없다. 아무리 외면하려고 해도 현실은 불쑥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기 때문이다.

무슨 方法으로든지 生活力을 恢復하려 꿈꾸는 때도 없지는 않다. 그것 때문에 나는 입때 自殺을 안하고 待機의 姿勢를 取하고 있는 것이다―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 

  여기서 중요한 대목은 바로 “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이다. 비장하게 序章을 열어젖혔지만 그 비장함은 이내 자신을 향한 “조롱”과 “야유”로 변한다. “이렇게 나는 말하고 싶다만” 그렇게는 말할 수 없다 혹은 그렇게는 말하지 않겠다는 “귀족취미”가 발동되고 있다. “심경을 정직하게 말하”는 것은 “귀족취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귀족취미”은 생생한 고통마저 비일상적으로 승화시켜 현실 감각을 둔화시킨다. 대신 언어를 매개로 한 환상이 현실의 “마개 뽑힌 가슴에 담을” 일용할 양식이 된다. ‘나’에게는 자신의 공포를 기록할 언어가 있기 때문에 무서운 현실은 좋은 재료로 활용된다. 그래서 ‘나’는 “自身을 輕蔑하”는 대신 “부끄럽게 생각하리라”고 다짐한다. 눈여겨 볼 것은 ‘나’가 현재의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 생각‘하리라’고 예정형의 사고를 하고 있는 점이다. ‘나’는 자신에 대한 입장마저도 유보시킨다. 이것은 ‘나’가 “입때 자살을 안하고 기대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이유가 된다. 그러나 이런 “귀족취미”가 ‘나’의 절망감을 덜어줄 수 없는 것은 ‘나’에게는 귀족취미에 걸맞는 “생활”이 없기 때문이다. “적빈”이 ‘나’의 가장 구체적인 실존이라고 할 때, ‘나’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두컴컴한 房 안에 標本과 같이 혼자 端坐하여 蒼白한 얼굴”로 “後悔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는 질 것이 뻔한 게임에 판돈을 걸어 놓고 있는 셈이다. 
 

야유 : 자기파괴와 자기탐닉의 수사(修辭)

  <공포의 기록>은 병이 깊은 한 예민한 청년의 황량한 내면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내면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앞서 말한 대로 “공포”다. 이 “공포”를 그는 “귀족취미”로 그려내고 있는데 그 방법론은 “야유”다. 그는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야유를 통해 “공포”에 떨고 있는 자신을 은폐한다. 절망적 “自棄” 상태를 “야유”함으로써 그의 “기록”은 위트와 유머를 획득한다.

그러나 그 이튿날 나는 작은어머니와 말다툼을 하고 脈搏百二十五의 팔을 안은 채, 나의 物慾을 부끄럽다 하였다. 나는 목을 놓고 울었다. 어린애같이 울었다.
남 보기에 퍽이나 醜惡했을 것이다. 그리다 나는 내가 왜 우는가를 깨닫고 곧 울음을 그쳤다. 

  작은어머니와 ‘나’는 어떤 이유로 말다툼을 하였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다만 “물욕”이라는 단어로 추정하건대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에 일어난 다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나’는 자신의 “물욕”이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자신이 “목을 놓고 울었”던 것이 “추악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 ‘나’는 왜 울게 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지 않고 남 보기 “추악”할 만한 일이라고 애써 사정을 은폐한다. 여기에 “야유”가 동원된다. “왜 우는가를 깨닫”게 되면 ‘나’는 “울음을 그”치는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나’는 우는 것조차 자기검열을 하는 셈인데 그것을 통해 얻는 것은 “울음을 그”쳐야 한다는 인식이다. 이러저런 일로 너무 원통하고 분해서 아이처럼 울었다, 라고 표현하는 것과 울긴 울었는데 생각해보니 울 일이 아니더라, 라고 진술하는 것 사이에는 “남 보기 퍽이나 추악했을 것”이라는 자의식이 놓여 있다. ‘나’는 ‘자의식의 괴수’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내면에 깊이 빠져 있는데 이 내면탐색은 이율배반적으로 ‘자기파괴적’이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을 “광채(光彩)나는 「루파슈카」를 입었고 퇴폐적(頹廢的)으로 보”인다고 할 정도로 자기탐닉적이다.

사람이 나를 싫어할 성싶은데 나도 사실 내가 싫다. 이렇게 저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 남을 위할 줄 알 수 있으랴. 없다. 그러면 나는 참 不幸하구나. 
 

 ‘나’는 “저를 사랑할 줄도 모르는 인간”이며 “사람이 나를 싫어할 성싶”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을 “참 불행”한 존재로 생각하는 자기연민을 갖고 있다. “야유”의 독특한 효과가 여기에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라는 인물이 “추악”하고 “오물”일지라도 스스로를 야유하면 '나‘는 “참 불행”한 존재로서 미워할 수 없는 “창백하고도 무시무시한 풍모”의 “소년”의 환상(幻像)을 획득한다. 한편 ’나‘의 스스로에 대한 야유는 다음의 예처럼 웃음을 유발하기도 한다.  


함부로 얘 제 침을 퇴 퇴 배앝으면서 보조(步調)는 자못 어지럽고 비창(悲愴)한 것이었다. 술을 한 모금이라도 마시고 나면 약속 빨리 내 심경(心境)에 아첨하는 이 전신(全身)의 신경(神經)은 번번이 대담(大膽)하게도 천변지이(天變地異)가 이 일신(一身)에 벼락치기를 바라고 바라고 하는 것이었다.
「경칠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에나 질컥 치여 죽어버리지 그랬으면 이렇게 후덥지근헌 생활(生活)을 면(免)허기라두 허지」
하고 주착 없이 중얼거려 본다. 그러나 짜장 화물자동차(貨物自動車)가 탁 앞으로 닥칠 적이면 뎅급을 해서 피(避)하는 재주가 세상의 어떤 사람보다도 능(能)히 빠르다고는 못해도 비슷했다. 그럴 적이면 혀를 쑥 내밀어 제 자신(自身)을 조롱(嘲弄)하였읍네 하고 제 자신(自身)을 속여 버릇하였다.

  나는 여기에 <공포의 기록>의 핵심이 있다고 본다. 다가오는 죽음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의 공포 속에서 ‘나’, 즉 이상이 선택한 것은 위에서 본 것처럼 술에 취해 현실을 잠깐 잊어버리거나 죽고 싶다고 떠벌이거나 그런데도 죽기는 어렵더라고 너스레를 떠는 일이다. ‘나’의 상상 속에서 스스로가 “소년”으로 표상되듯이 ‘나’는 미성숙한 존재이다. 이 ‘미성숙’을 ‘나’는 거리낌없이 노출하고 또한 야유한다.

나는 나의 讀書를 뾰죽하게 접어서 종이飛行機를 만든 다음 어린아이와 같이 나의 自棄를 태워서 죄다 날려 버렸다. (강조는 인용자)

  “독서”를 접어서 “종이비행기”를 만들고 “어린아이와 같이” 자신의 “自棄를 태워서 죄다 날려 버렸다”는 진술도 <공포의 기록>의 핵심에 해당한다. 독서는 ‘나’가 “루파슈카”를 입은 “소년”을 자신의 상상에 불러들이는데 필수적인 요소였으며 종이비행기 접기 같은 어린아이의 놀이는 현실의 공포를 잠시 잊는, 혹은 죽음을 지연시키는 행위였을 것이다. 더구나 비행기를 날릴 때에 “自棄를 태워” 날린다는 것은 그가 한 최종적인 놀이, 즉 죽음을 연기하는 놀이가 바로 언어유희, 즉 수사(修辭)에 있음을 보여준다.


기록과 소설 사이

  소설의 요체가 ‘자아와 세계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보면 <공포의 기록>은 소설 이전 혹은 이후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싶다. 이 작품에서 ‘자아’는 탐구되지만 ‘세계’에 대한 냉정한 인식은 드러나지 않고 ‘대결’은 아예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후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공포의 기록>은 내면풍경에 대한 탁월한 수사학이 출몰하는 텍스트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의미에서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결함이 적지 않다. 이렇다 할 사건이 등장하지 않을뿐더러 사건이 연쇄적으로 발전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아무리 사소설(私小說)이고 단편소설이라 할지라도 ‘수사학’만으로는 소설의 육체를 감당할 수가 없다. 요컨대 <공포의 기록>은 수기와 소설의 과도기적 형태로서 이상이 붙인 제목처럼 죽음을 앞둔 한 예민한 청년의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온당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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