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하무적 포도나무집 풍경 인간에 대한 예의 살아 있는 무덤 광주로 가는 길 창비 20세기 한국소설 45
김영현.공지영 외 지음 / 창비 / 2006년 7월
평점 :
절판


김남일의 ‘천하무적’은 우주의 끝은 있을까, 하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가늠하기 어려운 밤하늘에도 대체 시작과 끝이 있는 것일까. 하지만 이런 질문은 궁극에 대한 것이기에 세속의 때가 묻고 나이가 들면 질문 자체를 던지지 않게 마련이다. 소설가 자신일 ‘천하무적’의 화자 ‘나’는 툭 이 질문을 던져 놓고 탄식한다. 이제 나도 늙어 버렸다고.

마흔 다섯 살이나 ‘처먹어버렸다’고 술자리에게 토로하던 ‘나’의 선배 시인은 칠팔 개월 전, 거창한 죄목이지만 ‘허망한 빌미’로 잡혀 들어가 있다. 이 선배가 몇 사람의 지인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제 천하무적의 길을 가겠노라고. 몇몇 지인들은 어느 날 술자리에서 선배 시인을 면회가기로 하지만 그것은 ‘도리’라기보다는 ‘체면치레’ 때문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그렇게 나이를 먹는 것이라고 탄식한다.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소설의 외피를 이루고 있는 ‘구자혁’에 대한 ‘나’의 태도 또한 ‘20세기의 마지막 고비길’을 힘겹게 기어오르는 자신에 대한 연민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렇다. 구자혁에 관한 이야기는 단지 외피에 불과하다. 속알맹이는 바로 자기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천하무적’은 외견상 ‘구자혁’에 관한 부분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있고, 매우 핍진하게 묘사되고 있지만 작가의 주제의식은 그 건너에 있다. 이 소설은 결코 노동자 착취나 도시 빈민의 생활에 대한 고발적 성격의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을 고발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작품을 읽고 논의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구자혁’의 비극적 삶에 대한 지적은 피하고 싶다.

중요한 것은 이 작품의 화자인 ‘나’, 즉 작가의 의식이다. 선배 시인이 보낸 편지에 대한 그의 생각, 구자혁의 죽음을 접했을 때의 그의 충격, 구자혁의 죽음은 도대체 어떻게 가치 평가될 수 있는가, 라는 질문 등등이 이 작품을 읽고 논의할 만한 점들이다.


천하무적 : 천하에 적이 없다, 강해서가 아니라 상대할 적이 없어서라면?

노자를 읽고 천하무적이 되겠다는 선배 시인의 전언은 감동적이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이 성찰의 결과가 아니라 주어진 현실에 대한 타협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천하무적이 되겠다는 것은 싸움이 필요 없는 자리에 자신을 위치시키겠다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이렇게 쉬운 자기 정립이 어디에 있겠는가. 구체적인 현실의 잡다하고 비루한 세목에서 발휘될 그 ‘천하무적’이란 기실 비겁한 타협이 되기에 딱 알맞지 않겠는가.


구자혁의 죽음 앞에서 : 천하무적이 무슨 가치인가?

‘나’는 솔직히 고백한다. 무엇인가 결론을 내리고 싶었지만 결론을 내릴 무렵에 와서 보니 비로소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나’는 80년대는 분명 뜨거운 전망의 시대였다(고 생각한다, 그 생각은 사실 ‘나’의 것이 아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선배 시인은 노자의 곁으로 천하무적이 되기 위해 떠나고, ‘나’는 잊고 있던 ‘구자혁’을 새삼스레 생각한다. ‘나’가 처음 구자혁을 만났을 때, ‘나’의 태도란 얼마나 불분명했나.


‘나’는 운동권 전체에 대해서 최악의 진단을 서슴치 않았고,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는 도박에서 그만 손을 떼겠다고 생각했으며 그래서 진지해지는 열정과 능력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었다.



길고 무더운 여름밤 : 안락을 만끽하라, 시원하려면 에어컨이 필요하다 

이 소설의 트라이앵글은 ‘나’의 진술, ‘선배 시인’의 편지, ‘구자혁의 죽음’이다. 이 트라이앵글의 한 축이라도 빠지면 이 작품은 온전하게 의미를 생산하지 못한다. 또한 한 쪽에 너무 치우쳐도 불충분한 논의를 하게 될 것이다. 작가 김남일은 붉은 십자가와 장급 여관의 불빛으로 더욱 길고 무더운 여름밤인 ‘20세기 마지막’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긴 여름이 끝난다고 해서 가을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줄까? 아니, 사람들은 그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에어컨을 사기 위해서 바둥거릴 것이다. 내가 있는 곳이 시원하면 열풍이 거리로 쏟아져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것이다. 아니, 생각 자체를 재미 없어할 것이다. 지겨워할 것이다. 즉각적으로 쾌락의 충족이 가능한데 생각은 무슨!

무엇이, 정말 무엇이 18세 소년 제화공을 죽게 만들었는가? ‘연탄가스 중독’이라고 대답한 당신은 바보다. 손이 뭉개졌고, 방화를 저지르려고 했는데 연탄가스 중독으로 죽다니 서프라이징 엔딩으로서 조금 부족한 걸, 이렇게 말하는 당신도 바보다. 조금 생각하는 듯하다가 ‘자본주의 아냐?’라고 하는 당신은 부족한 대답을 내놓았다. 그럼 너는 뭐라고 대답할 거냐고 한다면 이 이야기로 대답을 대신하겠다.


예수의 발목 

몇 해 전, 명동 성당 입구에서 병원 노조원들이 농성하고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들은 가톨릭 재단 병원이 성당에 피신해온 노동자들을 사복경찰을 동원해서 폭력 연행했다고 주장하면서 비디오를 상영하고 있었다. 병원 지하에 있는 성당에는 노동자들이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여성 노동자를 남자 경찰이 연행하려하자 노조원 한 명이 성추행이다, 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경찰 간부가 핸드 마이크에 입을 대고, ‘여경 투입’이라고 소리쳤다. 곧 여자 경찰이 들이닥쳐 여성 노조원들을 전원 연행해 갔다. 중요한 장면은 바로 그 다음이다. 몇 명의 노동자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쳤다. 신부님! 신부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경찰 간부가 소리쳤다. 이미 성당에 들어와도 좋다는 서명을 받았어요. 화면으로 사제복을 입은 사람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그는 황급히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경찰은 이제 십자가에 매달린 노동자들만 처리하면 집에 가서 쉴 것이다. 끌어내, 라는 소리가 나왔다. 사복 경찰이 십자가를 붙들고 있는 노동자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사람 키만한 십자가가 흔들거렸다. 못 박힌 예수도 흔들렸다. 자칫 잘못하면 십자가가 떨어져서 파손될 수 있었다. 경찰간부가 소리쳤다. 몇 명은 십자가 붙들고 있어. 십자가 파손 안 되게. 경찰이 몇 명 더 투입되어서 십자가를 벽에 안전하게 밀착시켰다. 노동자들은 전원 연행되었다. 예수는 발목이 아파도 여전히 두 손에 못이 박힌 채 십자가에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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