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보다 : 가을 2025 ㅣ 소설 보다
서장원.이유리.정기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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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이랑 일본 사이엔 과거가 있잖아." 히데오의 이야기는 늘 그렇게 끝났고, 그러면 우리는 연극이나 학교 생활에 대한 이야기로 화제를 바꾸곤 했다. 만약 시간을 되돌려서 그때로 돌아갈 수 있다면 나는 아마 다른 이야기를 들려줄 것이다. 한국과 일본 사이에 과거가 있고 그것은 전혀 청산되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죄를 히데오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30쪽, 히데오)

이제 히데오는 그를 찾는 인터뷰마다 자신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어렸을 때 일본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심각한 이지메를 당했다고 고백하고, 그래서 한국으로 이주하여 보낸 학창 시절이 소중하다고 강조한다. 일본에서도 한국인 정체성을 포기하지 않았던 어머니에 대한 사랑을 전한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나는 이제 더는 히데오가 아닌 히데오를 히데오라고 부르곤 한다. (38쪽, 히데오)

나는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사람이며 나무며 모든 것이 엄청나게 작게 보였다. 까마득히 높구나. 여기서 떨어진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멈출 수 있다면, 당장 지상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중략) 안 죽어. 안전 바가 있잖아. 안 죽을 거 알면 그냥 재밌는 거지. 몇 번이고 떨어져도 안 죽는다고. (88-89쪽, 두정랜드)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승주는 늘 결백했다. 무엇에서든 오래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나를 속이지 않는 것, 그것만큼 중요한 것이 또 있을까? 요행은 금물. 바라지도 않는 편이 좋다. 오직 최선을 다한다. 그것이 승주가 생각하는 진실이었다. 승주는 나를 속이는 길과 속이지 않는 길, 그 갈림길 앞에 설 때마다 이 명제를 되새겼다. (122-123쪽, 공부를 하자 그리고 시험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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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세상의 끝으로]는 시인과 독자 모두를 스스로 당당해지게 만들고 시인과 독자 모두를 편드는 '시인선'이다.

199명의 시인들이 말하고 있는 '시란 무엇인가'와 그들의 시가 들어있다. 

신형철이 펴내는 글에 언급한 시인과 독자 각자의 고충에 동감한다. 

*누구나 한 때, 나 또한, 시를 썼고, 시인이 되고 싶었고, 무용한 것들을 사랑하면서 살아남은 지금의 시인을 볼 때, 선망과 질투 어린 시선을 주게 된다. 시인은 자신이 하는 일을 정당화해야 한다는 압력을 느낀다. 그래서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이미 시인이 되어서가 아니라 매번 시인이 되기 위해서다.

*시는 이해하기 어렵다기에 시인들은 느껴보라 말하지만, 시를 읽는 우리는 유난스러워 보일 뿐이다. 주변의 불만 가득한 시선을 업고 시를 읽는 나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시를 위해 세상과 대결하고 있는 듯한 억울함이 있다. 

*시인선은 시인과 독자의 고충을 동시에 해결해 준다.

'시가 진실한 것을 위한 하나의 장소'라는 매리언 무어의 말처럼, 

슈타이거가 말한,  '회감, 즉 시를 읽을 때 과거의 감정이 잠깐 돌아오고 다시 체감되는 경험'처럼, 

시인선을 통해 시인과 독자 모두는 삶의 깊이를 얻는 것이다. 

예로, 청소년기를 떠오르면 장정일의 '삼중당문고', 첫사랑을 생각하면 김이듬 '겨울휴관', 지금 몰입해야 할 때는 기형도 '질투는 나의 힘'과 김용택 '섬진강'이 딱이다. 마음을 알아주고 위로해 주던 시詩다.

예전 기억이 난다. 지하철타고 통근할 때 매일 처음 만나는 노숙인에게 천원씩 기부하고, 한 주에 한편씩 시詩를 외웠던 시절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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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우리를 세상의 끝으로 - 문학동네시인선 200 기념 티저 시집 ㅣ 문학동네 시인선 200
강정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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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란 무엇인가

시는 시의 선택이다. (25쪽, 고영민)

당신이 떠올릴 수 있는 건
무슨뿐일걸요 무슨과 무슨 사이에서 당신은
이제 막 깨어난 거죠 (34쪽, 김근, ‘혼자 있는 사람은‘ 중에서)

사랑의 세계에서는 꼭 무너짐이 무너짐을 뜻하지는 않았다 (48쪽, 김연덕, ‘사랑을 초청하고 밤낮으로 살펴‘ 중에서)

서로가 서로를 돌고 돈다
인간관계의 고민은 서로가 서로 사이에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하는 날들로 인해 생긴다. (68쪽, 박형준, ‘밤의 소리‘ 중에서)

시란 무엇인가

무언가를 쓴다는 것은
무언가를 번역하고 있다는 뜻이자,
그것이 결국 오역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럴듯한 말로 써내려가는 일이다. (121쪽, 이선욱)

시란 무엇인가

버틸 힘을 주고, 버틸 힘을 <버릴> 힘을 주는 것, 살아 있으라고 속삭이고, 그게 다가 아니라고 속삭이고, 절망과 슬픔을 정직하게 통과하라고 말해주는 것. (129쪽, 이승희)

시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지만 시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시인 것 같아요. (149쪽, 이은규)

우리는 아주 멀리까지 걸어서 왔는데
달라지지 않는다. 지키는 자는 멀리 가지 못한다.
먼 곳에서도 멀리 있지 못한다. (168쪽, 임솔아, ‘파쇄석‘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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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여명 가까운 시인들이 아직도 쓰지 않은 말에 조금 기미氣味를 보았다.

시를 읽는 이유는 앞으로 오는 시간을 미리 알려고, 지나간 시간에 용서를 빌려고, 현재를 다시 보고 또 다시 보면서 살려고 읽는다. 

시인들의 고백을 듣다 보니 그들로 별반 다르지 않구나. 

그러나,

그들은 후회하는 용도로, 고백하는 용도로, 최악을 피하기 위해, 진실이 진짜가 아님에 위안 받으려고, 맑은 눈 하나를 더 찾기 위해, 사랑의 자취를 보내기 위해, 말에 베인 상처를 핥아주기 위해, 추억을 기억하기 위해, 삶의 오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말이 법이 되고 밥이 되는 때로 만들기 위해, 불량 시詩로 폄하하면서 까지 투명과 불투명의 사이에서도, 자신들을 한번 더 동요하는 마음을 세상으로 내 보냈다. 

보이지 않는 마음이지만, 우리가 환하게 생생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시詩라 여겨진다. 

문학동네에게 고맙다.

최근 '더블 빌[Bliss & Jakie)' 현대 발레를 보았다. 숨죽여 보았다. 아주 간단한 무대와 선율, 절제되고 정제된 몸, 따로 또 같지만 다른 춤, 블리스에서는 기쁨과 행복을 느꼈다면, 재키에서는 춤에서 뿜어 나오는 수 많은 아픈 감정이 서로 교차되면서 그냥 빨려 들어갔다. 특히 입은 의상은 무용수들의 춤을 그대로 적나라하게 보여 줘 실력이 바탕이 되었겠지만 관통 당하는 느낌이었다. 

시인들이 마지막에 쓴 말과 무용수들의 춤은 그 분야에서 최고였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온전히 드러낸 최고의 정靜과 동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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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직 쓰지 않은 것 ㅣ 문학동네 시인선
최승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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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은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였다. (20쪽, 005 조인화)

첩첩한 산 너머, 중중한 물 건너 무엇이 있으랴만, 이 삶의 오지에서 시 아니면 또 달리 무엇을 구하겠는가. (21쪽, 006 이홍섭)

일고 쓰면서 인생을 버려가는 법만 배울까 두려웠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려움마저 즐거웠던 적이 있습니다. (26쪽, 009 김안)

세월이란 것이 겨우 몇 개의 목차로 요약된다는 것을 미리 알았다면 아마도 이 책의 대부분은 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탕진의 그 방대한 여백만이 시의 몸이 되었으니 지금 더듬을 수 없는 것만이 다시 희망이 될 것이다. 시를 써오는 동안, 내가 바란 것이 있다면 더이상 시를 쓰지 않고도, 견딜 수 있는 아름다운 날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30쪽, 013 천서봉)

투명과 불투명의 사이. 명징함과 모호함의 경계쯤에 시를 두고 싶었으나 뜻대로 잘 되지 않았다. 개판 같은 세상을 개판이라고 말하지 않은 미적 형식을 얻고 싶었으나 여의치 않았다. 말과 문체를 갱신해 또 다른 시적인 것을 찾고자 하였으나 그 소출이 도무지 형편없다. 저 들판은 초록인데, 나는 붉은 눈으로 운다. (38쪽, 020 안도현)

어느 날에는 손바닥에 그려진 실금들 중 하나를 골라 무작정 따라가고 싶었다. 동요하고 싶었다. 가장 가벼운 낱말들만으로 가장 무거운 시를 쓰고 싶었다. 그 반대도 상관없었다. 낱말의 무게를 잴 수 있는 저울을 갖고 싶었다. (중략) 아무것이, 아무것도, 아무것이나. 머리, 가슴, 배로 이루어진, 동요하는 어떤 낱말이. 그러고도 한번 더 동요하는 어떤 마음이. (58쪽,038 오은)

어떤 시간이 와도 시절을 탓하지 않고, 어떤 세상이 와도 공밥은 먹지 않게 되기를 바랄 뿐이다. (38쪽, 048 윤제림)

시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대신 시란 무엇이어야 하는가라고 물었다. 시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고 묻지 않고 시가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라고 묻곤 했다. (79쪽, 052 이문재)

말이 곧 시가 되고 노래가 되는
말이 곧 법이 되고 밥이 되는 때로 돌아가기, 아니
말이 곧 목화가 되고 햇콩이 되는 때가 다시 돌아오기까지
물렁물렁한 말의 혓바닥으로
깨어진 말의 사금파리에 베인 상처 핥아주기 (77쪽, 056 최서림)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은 어디에나 있다. (131쪽, 108 심재휘)

나는 있는다. (143쪽, 120 송승환)

시를 통해 눈 하나 더 찾게 될까 (149쪽, 126 정채원)

진실이 다 진짜이거나 진실만은 아니라는 것은 얼마나 커다란 위안인가. (중략)
세상이란 현실과는 상관없이 허구와는 다르게 한없이 얼마나 이따금 기껍고도 사랑스러운가. (160-161쪽, 137 채길우)

다른 사람이 되고 싶었다. 다른 삶을 살고 싶었다. 다른 시를 쓰고 싶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럴 수 없다는 것은 안다. 그 사이가 아득히 멀다. (172쪽, 148 김박은경)

최선을 다했지만 결과적으로 최악을 피했을 뿐이라고 (중략)
삶은 문제 해결의 과정이고 우리의 선택은 여전히
차선과 차악 사이에서 더 오래 머뭇거리고 있지만.
이 분명한 없음과 분별하기 힘든 있음들 사이에서 (중략)
낫 굿 낫 뱃.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삶은
좋았다가 나빳다가 하는 삶이지만
뜻한 바대로만 되지 않는 삶이라서
이미 읽은 전단지를 한나절 내내 뒤집어 읽는 공터의 바람처럼
필사적이고 간절한 기도가 더 빤하고 평범하기 쉽다. (중략)
내가 겪어보지 못한 아픔에게는 더 버려진 말보다는 흘러듣기 좋은 말이 필요했다. (185-18쪽, 160 이현승)

시를 후회하는 용도로 쓰고 있는 게 아닌가 걱정이다. (중략) 이제는 하다하다 시를 고백하는 용도로 쓰려고 하는가? 그럴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지껄이고 후회하고 고백하고 지껄이고 후회하고 고백하는 삶에 시가 끼어들어 자꾸 묻는다. 너 지금 뭐하느냐고. 너 지금 그렇게 사는 게 맞느냐고. 대답할 수 없어 썼다. 실패하는 마음의 한가운데에서 스스로 만든 지옥에 중독된 채로. (198쪽, 171 서효인)

그리고 무엇보다도 시는
마음이 없으면 필요 없어진다
우리는 마음의 노예까지도 아니다. (204쪽, 177 황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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