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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의 중국식당
허수경 지음 / 문학동네 / 200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2002년 11월의 어느 토요일.
서울은 그날따라 며칠간의 스모그를 떨치고 맑게 하늘이 개여 있었지만 나는 어디로도 갈곳이 없었다.
그래서 전날 친한 친구에게 스쳐가듯 말했던 것처럼 홀로 산을 올랐다.
3시가 넘은 구기동 북한산 코스는 내려오는 사람들도 드물 정도로 인적이 드물었고 그 산길을 무슨 집착에 휩싸여 있었던 것인지 나는 이를 악물고 올라가고 있었다.
두시간여의 산행을 마치고 서서히 져가고 있는 해와 불편하기 짝이 없는 구두, 등산로 하나 제대로 익히지 않은 무지로 인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던 그 때, 그래도 지쳐쓰러질 때까지 산을 돌아다니고 싶었던 것은 무슨 열정이었을까?
산을 내려오는 기분은 그리 개운치 못했고 그 찝찝한 기분을 달래려 나는 습관적으로 영풍문고로 향했다.
책방에 꽂혀 있는 무수한 욕망덩어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로 지쳐간다는 친구와는 달리 나는 정복해야할 무엇인가를 발견한 기분을 느낌으로 해서 서점은 나의 기분을 전환해주는 긍정적 역할을 자주 해주곤 했었는데 그날은 그렇지 못했다.
한참을 책을 그저 멍하니 제목만 눈으로 살펴볼 뿐 책장을 열 수 없었다.
그 때 시집 코너에서 내 눈에 들어온 것이 바로 허수경의 시집 <내 영혼은 오래 되었으나>였다.
허수경에 대해서는 유하의 산문집에서 얼핏 본 기억이 있었는데 유하에게 구하기 힘든 비디오를 빌리고 저녁을 거하게 샀는데 알고보니 그 때 허수경도 끼니를 걱정할 정도로 힘든 사정이었다라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그 허수경에 대한 공감 비슷한 연민때문이었을까?
나는 시 한편도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그 책을 계산대로 가져갔으며, 산에서 갓 내려온 내 마음을 그 시집이 대변이라도 하는 듯 비장한 마음을 가졌었던 듯 하다.
그리고 책 앞장에 '산에서 내려오며...'이라고 적어놓아 그런 내마음을 公表했던 것이다.
그 허수경의 산문집을 오늘 만났다.
신간 코너 한구석에 그녀의 시집처럼, 책날개에 붙어있는 평범한 그녀의 사진처럼 아무런 눈길조차 받지 못한채로 꽂혀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를, 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러줘서 그녀의 존재에 생기를 불러넣어주는 이인양 그저 안쓰럽고 짜안한 마음으로 책을 덮썩 쥐었다.
그리고 책날개부터 찬찬히 보면서 슬며시 미소지었다.
"사춘기 시절, 나는 뚱쭝하고 우울한 소녀였다. 누가 뚱보라고 놀리면 나는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곳에서 책을 읽었다. 누군가에게 놀림을 받아 마음이 쓰라릴 때면 나는 또 구석에 앉아서 단팥이 들어간 빵을 집어먹었다. 빈속에 단맛이 들어가면 슬프고 외로웠다. 나는 그때마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그천장을 올려다보던 마음이 내가 문학으로 가는 모퉁이였다. 나는 혼자였고 외롭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놀림을 당하는 실존을 가졌다. 그것이 내 문학의 시작이었다."
책날개에 붙어있던 글이다.
그녀의 사진을 보며 슬쩍 웃었으며 그녀의 영혼의 한 단면을 아무런 의심없이 엿본 듯 했다. 그리고 그녀를 알듯 말듯 했다.
"마당있는 집
마당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하고 난 뒤 한동안 나는 마당에다 꽃이나 약초나 채소들을 심는 데 열중했다. 꽃도 꽃이지만 나는 우리나라 채소들을 심어서 먹고 싶었다. 교포 아주머니에게서 얻은 미나리와 깻잎, 고추와 갓을 나는 마당 한귀퉁이에다가 심었다. 기다렸다. 갓에서 싹이 나오고 깻잎이 자라고 고추에 작은 흰 꽃망울이 달리기 시작할 무렵, 우박이 내렸다. 갓김치에다 깻잎 장아찌에다가 고춧잎 무침을 먹어보리라고 기대에 잔뜩 부풀어올랐던 나는 우박이 내리고 난 뒤 마당 귀퉁이에 서서 울었다. 울화가 치밀었다. 약이 올랐다. 모든 게 다 꿈이었다. 그렇게 그런 것들이 먹고 싶으면 그곳으로 가면 되지 않는가. 이곳에서 사는 게 다 꿈이었고 , 그곳으로 가는 것도 다 꿈이었다. 붙잡힌 영혼이여, 몸이 무거운가, 왜 이곳에서 그곳으로 선뜻 움직이지 못하는가."
그녀의 신변에 대한 약간의 선이해가 있었기 때문일까? 그녀에 대한 선이해가 없었다면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난 그 여백에 담긴 그녀가 안쓰러워 그 얕고 가벼울 책을 쉬이 읽어가지 못했다.
그녀는 그렇게 '영혼이 붙잡힌 채로' 먼 타국에서 외로움을 껴안은체 살아왔고 살아갈 것이며, 나는 그 얼마후 한 여자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