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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의 연구 암실문고
앨 앨버레즈 지음, 최승자 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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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승자 시인의 에세이를 읽은 적이 있다. 서점 책장 사이를 걷다 단발의 노년 여성이 담배를 들고 있는 흑백사진을 보자 마음이 끌렸다. 삶을 초연한 듯한 흐릿한 시선, 담배 연기, 노년. 이 시인은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이토록 자연스럽게 강렬한 포즈를 만들었을까. 그렇게 고통스럽고 쓸쓸하고 허무하고 강인한 시인을 처음 만나게 되어, 죽음과 죽음의 너머, 죽음의 죽음까지 이어지는 이야기를 읽게 되었다.

을유 '암실문고'에 새롭게 추가된 앨 앨버레즈의 『자살의 연구』는 40년 전 최승자 시인의 번역본의 개정한, 국내 최초의 완역판이다. 사회적으로 사실상 금기인 '자살'에 대한 연구, 그것도 항상 죽음에 대해 생각해온 최승자 시인의 번역이라면 고민할 필요가 없다. 인간의 마음 속 깊은 암실 속으로 시인의 번역과 함께 들어갈 준비가 되었다.

저자인 앨 앨버레즈는 영국 옥스포드 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시 평론가로 활동했다. 그는 1960년 초 실비아 플라스와의 만남으로 책을 시작한다. 실비아의 남편인 테드 휴스는 뛰어난 시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했으나, 실비아는 '시인으로서의 존재는 지워진 채 젊은 엄마와 가정주부'로 지내던 시기였다. 저자는 휴스 부부와 자주 만나며 실비아의 시에 대해 자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르며 저자는 실비아에게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으며, 그녀에게 자살은 '성인 여성이자 자유로운 행위자로서 스스로 청할 권리가 있다고 느끼는 행위'라는 것을 느꼈다. 마침내 실비아는 시를 통해 끝없이 에너지를 방출한 후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 저자는 실비아의 죽음으로부터 자살과 문학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자살과 자살자에 대한 공포가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그리스와 로마의 전통에서 '중용과 높은 절조'의 결과물인 합리적인 행위였다. 하지만 기독교의 시대로 접어들며 순교에 대한 광기와 세례를 받아 원죄를 씻은 뒤 자살하는 행위가 유행하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살을 용서받을 수 없는 죄로 규정한다. 이후 자살은 천년 이상 용서받을 수 없는 죄가 되었다. 하지만 과학이 발전하며 마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값싸고 덜 고통스러운 죽음의 방법들이 발견되자 자살에 대한 담론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작가는 4장 자살과 문학에서 단테의 중세부터 시작해 사무엘 베케트, T.S. 엘리엇에 이르는 현대까지 여러 작가와 문학, 예술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의 긴장, 죽음의 에너지가 작품으로 터져나오기까지의 과정을 차곡차곡 밝혀낸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 '어른이 되기 위해 죽음의 거의 끝까지 가야'했던 개인적인 체험을 고백하는 것으로 책을 마무리한다.

작가는 자살과 자살자에 대한 무조건 적인 비난을 하지 않는다. 그는 개인적인 경험, 역사적인 추적, 문학적인 연구를 통해 자신의 생을 걸고 세상에 저항한 운명들에 대해 말한다. 벗어날 수 없었고 끝을 향해 전력으로 내달릴 수 밖에 없었던 예술적 에너지에 대해 논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살아내는 것이 맞다는 어설픈 윤리적인 결론을 억지로 끌어내는 것보다 용기있는 마무리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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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번트가든의 여자들 - 18세기 은밀한 베스트셀러에 박제된 뒷골목 여자들의 삶
핼리 루벤홀드 지음, 정지영 옮김, 권김현영 해제 / 북트리거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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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런던은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급속하게 팽창했다.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몰려들고, 코번트 가든 극장, 드루리 레인 극장 등 다양한 극장들이 생겨나며 문화적으로도 활기가 넘쳤다. 하지만 이는 밝은 부분일 뿐, 어둠 역시 드리우고 있었다.

극장들은 도시 문화의 중심지로서 귀족, 신흥 부자 등 상류 계층 뿐만 아니라 문화 사업에 종사하는 일반인들, 그들을 위해 일하는 하층민들까지 끌어들였다. 이러한 고급 문화와 어두운 측면이 교차하는 독특한 공간이 바로 코번트 가든이다.

1757년 코번트 가든을 뒤흔든 리스트가 출판됐다. 소위 '해리스 리스트'라고 알려진 소책자는 시인이자 무명 작가인 사무엘 데릭이 포주 잭 해리스의 도움을 받아 코번트 가든 주변에서 활동하는 여성들의 외모, 특기, 가격 등을 자세하고 위트있게 그려 인기를 끌었다.

핼리 로벤홀드의 『코번트가든의 여자들』은 '해리스 리스트'의 감춰진 뒷 이야기를 유쾌하고도 치밀하게 밝혀낸다. 해리스 리스트의 여성들은 부도덕하거나 성적으로 타락한 것으로 묘사되는 반면, 실제 리스트를 만든 사무엘 데릭, 잭 해리스, 샬롯 헤이즈는 경제적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음에도 거의 비난을 받지 않았다. 또한 리스트의 여성들이 극심한 가난이나 성폭행으로 매춘에 빠질 수밖에 없었떤 가혹한 사회, 경제적 현실을 조명한다.

'해리스 리스트'는 데릭이 사망한 후에도 계속 출판됐으며, 성매매에 대한 여론이 악화되자 리스트의 출판에 관여한 사람들에 대해 처벌을 내리며 막을 내렸다. 이제는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진 리스트이지만, 로벤홀드는 이들을 잊지 않았다. 책의 마지막에 '해리스 리스트'의 애독자들 명단을 첨부해 이들의 악명을 길이길이 남겼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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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랑전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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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체』의 번역가로 잘 알려진 켄 리우의 두 번째 SF단편집이다.

켄 리우는 이력이 매우 특이하다. 1976년 중국에서 태어나 11살 때 미국으로 이민, 하버드대 영문과를 졸업하고 마이크로소프트에서 프로그래머로 일한 후 하버드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7년간 일했다. 그래서인지 동양의 소재들을 이야기에 잘 버무려 사용하는 듯 하다.

이번 소설집에는 13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2011년부터 2019년까지 발표된 작품들이다. 아무래도 스마트폰, SNS, 암호화폐, 인공지능, 테라포밍 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여서 일까? 기존 소설집에서보다 더욱 트롤링, 타인의 고통, 식민지에 대한 고민이 깊은 작품들을 소개한다.

우선 전시되는 고통과 트롤링에 대한 소설로 「추모와 기도」, 「비잔티움 엠퍼시움」이 있다. 「추모와 기도」에서는 총기사고로 딸을 잃은 어머니가 추도 영상을 공유하지만, 트롤링으로 딸의 죽음은 조롱거리가 되어 고통받는 이야기다. 「비잔티움 엠퍼시움」 은 제3세계의 고통을 1인칭으로 경험할 수 있는 콘텐츠를 공유, 암호화폐를 통해 직접 후원하는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다. 하지만 직접적인 고통의 경험 역시 또다른 콘텐츠로 소모되고 마는 씁슬한 현실을 읽어낼 수 있다.

인류는 결국 지구를 망가뜨리고 다른 행성으로 또는 다른 공간으로 이동한다. 「일곱 번의 생일」에서는 마인드 업로딩을 통한 시뮬레이션 세계로, 「메시지」에서는 여러 행성으로, 「혼령이 돌아오는 날」에서는 테라포밍에 성공한 행성에 살던 멸망한 외계인과의 혼혈 인간을 만들기도 하고, 「은둔자」에서는 화성을 테라포밍 하는 시기에 다시 예전 지구로 돌아온 특이한 은둔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류는 끊임없이 우주로 뻗어 나가지만 마치 식민지처럼 그 행성을 착취하기도, 과거에 대한 노스탤지어로 지구를 찾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동양적인 소재를 잘 사용한 소설도 있다.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여성 자객 이야기인 「은랑전」, 『삼국지』 도웡 결의를 새롭게 쓴 「회색 토끼, 진홍 암말, 칠흙 표범」, 민들레왕조 연대기인 「폭풍너머 추격전」 등은 익숙한 듯 낯선 환상 세계이다.

우리가 SF를 읽는 이유는 현재를 비틀어 낯설게 보고, 이를 통해 현재를 더 잘 이해하기 위함일 것이다. 켄 리우가 보여주는 세상은 차가운 기계의 세상이 아니라 따뜻한 마음이 남아있는 인간적인 미래다. 마치 「메시지」 에서 외계인들의 문명을 연구하며 그들과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받고, 미래에 멸망한 자신들의 문명을 방문한 누군가를 위해 경고 표시를 한 외계인들처럼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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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 - 나의 생존과 운명, 배움에 관한 기록
임승남 지음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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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말 그대로 이르는 것, 타인이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칭하는 것, 즉 나의 정체성이다. 비록 타인이 짓고 타인이 부르지만 이름을 통해 나로 바로 선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지은 한 사람이 있다. 나이도 이름도 정확하지 않고 남대문 지하도에서 '걸을 달아' 먹고 도둑질로 연명하며 소년원과 교도소를 밥먹듯 드나들던 한 소년은, 우연히 만난 책 한 권을 통해 인생이 송두리째 바뀐 경험을 한다. 스스로 자신의 이름을 짓고 서툴지만 연필을 깎아 정성껏 자신의 이름을 써내려간다. 임 승 남.

이 책은 돌베개 출판사의 사장을 지낸 임승남 작가의 자전적 에세이다. 사실 작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작가의 이력만 보고 군부독재 시절 정의를 위해 힘쓴 실천적 지식인의 기록이라고 생각했다. 돌베개 출판사를 운영한 사람이라면 응당 한국의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경험하고 저항하며 싸워온 지식인일 것이라고 지레 짐작했던 것이다. 그런데 목차에서부터 예상과는 전혀 다른 전개가 시작됐다. 전쟁 고아, 양아치, 전과자 등. 전쟁과 가난, 군부독재라는 격동적인 근현대사를 온몸으로 겪어낸 작가의 삶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작가는 감옥에서 우연히 철학자들의 명언이 가득 적힌 『마음의 샘터』라는 책을 읽고 인간답게 살기 위해 노력한다. 고아로 자라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답게 사는 것인지 배우지 못했기에, 순간순간 치솟는 분노를 참고 동물적인 본능을 누그러뜨리려고 끊임없이 자신을 다스렸다. 하지만 고된 삶이기에 출소를 하고 다시 도둑질로 교도소에 들어오는 삶을 반복한다. 십 수년을 '야수'처럼 살았는데 그리 쉽게 변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출소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고칠 점을 물어보고 반성하는 자세를 통해 스스로를 인간으로 만들어냈다.

이후 감옥에서 시작된 인연으로 출판사 일을 시작하게 되고, 이해찬 전 국무총리와 연이 닿아 돌베개 출판사에서 일하며 『전태일 평전』과 같은 책을 펴내기도 한다.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출판사를 지키기 위해 사장직을 스스로 내려놓았지만 일하는 내내 '사회에 조금이라도 이바지할 수 있는' 책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왔다.


작가는 1981년 『걸밥』이라는 자전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다. 그리고 2023년 다시 『이토록 평범한 이름이라도』라는 제목으로 에세이를 발표한다. 무엇이 작가를 40여 년의 시간이 지나 새로운 글을 쓰게 했으며, 2023년의 독자는 왜 이 책을 읽어야 할까? 1) '오직 작가만이 할 수 있는 인간적인 이야기', '잘 쓰지는 못하더라도 작가만이 쓸 수 있고 작가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인생의 황혼길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뛰게 하고 세상을 밝게 하는 이야기를 남기고 있는 것이다. 2) 책을 통해 변화된 한 사람의 간증이다. 고아로 자라나 야수같이 살았던 한 나쁜 사람이 책을 읽고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함으로 변화한다. 21세기에 각종 영상매체나 인터넷을 통해 쉽게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데 왜 책을 읽어야 하냐는 물음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있다. 3) 잊지 말고 기억해야할 민주화의 기록이다. 최근 천만 관객을 돌파한 《서울의 봄》을 보고 분노하는 것처럼 민주주의는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너무 어릴 때 고아가 되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배운 바가 없었다. 그 때문인지 주로 생각보다는 동물적인 본능에 따라 살았다. 그런 본능을 갑자기 억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바짝 선 마음속 칼날을 한 번만 드러내면 감방살이가 편안해질 터였다. 그것을 억지로 참으며 삽자루를 붙들고 나 자신과 씨름했다. - 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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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키7 : 반물질의 블루스 미키7
에드워드 애슈턴 지음, 진서희 옮김 / 황금가지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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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봉준호 감독의 신작 《미키17》의 티저 영상이 공개됐다. 《트와일라잇》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진 로버스 패티슨이 주인공 미키 반스를 연기하는데,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열일곱 번째 복사된 미키이다. 막 재생 탱크에서 꺼내진 그는 당혹스럽고 혼란스러운 듯하다. 《미키17》의 각본 작업은 『미키7』이 출판되기 전부터 진행됐지만, 시나리오 초기 작업에서부터 에드워드 애슈턴이 함께 했기 때문에 기본적인 아이디어는 같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미키7 반물질의 블루스』는 인류가 새로운 행성에 정착지를 개발하고, 목숨에 위협이 되는 어려운 일은 '익스펜더블'이라는 소모 인력이 대신하는 미래를 그린 『미키7』의 후속작이다. 어느 날 니플하임 본부의 에너지 동력망이 크게 망가져 크리퍼들이 갖고 있다는 반물질 폭탄을 가져와 동력원으로 사용해야 할 위기에 처한다. 지휘관인 마샬은 미키에게 크리퍼를 설득해 반물질을 가져오라 명령하고, 미키는 연인 나샤와 함께 크리퍼를 만나러 간다. 그동안 크리퍼는 인간의 발화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익혀 말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반물질은 크리퍼가 아닌 남쪽에 다른 존재가 갖고 있다는 정보를 알게 되었다. 미키는 팀을 꾸려 남쪽으로 떠나며 니플하임의 외계 종족들과 접촉한다. 


이 소설에서 재미있는 지점은 1) 불멸의 삶을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 비참한 존재로 강등시켰다는 것, 2) 외계에 지성을 가진 생명체를 만났을 때 인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인간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하려고 한다는 것, 3) 인류의 테라포밍은 외계 생명체의 입장에서 본다면 말살일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SF를 읽어야 하는 이유는 끊임없이 '만약에~' 상황에 대해 질문하고, 현재에서 확장된 인류의 사고방식에서 대답하고 그려내며 윤리적인 이슈에 대한 답을 찾아나가기 때문이 아닐까.

"그들은 희생을 요구하는 게 아니야. 저들이 요구하는 건 부속물 하나지. 부디 너희는 이곳에서 이방인이라는 걸 되새겨줘.우리에게 이런 건 관습이야." - 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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