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헐거운 마음인 채로 어디에서건 자유로웠고 무엇 앞에서건 거침없었다. 떠난 길에서 나는 그랬다. 그 자유는 행동의 자유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음이 하는 일, 마음이 저 홀로 하는 일로부터 나는 자유로웠다. 사랑도, 욕망도, 번민도 죄다 마음이 하는 일들이다. 마음이 제 주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 홀로 하는 일로부터 나는 자유로웠다. 떠난 길에서 나는 그랬다.

 

통영, 미륵산 정상에서 바라본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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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나서다. 떠나는 자는, 떠나려는 맘과 떠나지 못하는 몸 사이에서 서성인다. 혹은, 떠나고자 하는 몸과 떠나지 못하는 마음 사이에서. 한참을 그렇게 서성이고 나서야 떠날 수 있는 것이다.
떠나기 전날 밤, 몇 개의 짐을 꾸리며 나는 외롭다. 오로지 혼자다. 떠난 길에는 기댈 누군가도, 손을 잡을 누군가도 없을 것이다. 가방에 짐을 챙겨 넣으며 얼마나 떠나 있을지 가늠한다. 일정을 정하고 가방을 싸는 게 아니라, 가방을 싸면서 대강의 일정을 정하는 것이다. 다른 것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갈지, 어디서 머물지, 정하지 않은 채 나는 다만 헐거운 마음으로 떠나고자 한다.
떠나는 자는, 필요와 피로 사이에서 갈등하며 짐의 무게를 가늠한다. 짐의 무게를 저울질하며 제 한계를 생각한다. 담아가지 않으면 아쉬울 것이나, 담아가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제 짐의 무게만큼 나는 나아갈 수 있다. 정확히 그만큼이 내가 가야 할 길인 것이다. 짐을 싸다말고 삶의 무게를 생각하니 눈물겹다. 과연, 나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아니, 어디까지 살 수 있을까.
― 떠나기 전날의 기록




 

 

 

 

 

 

 

 

 

 

 

강릉, 경포 해수욕장에서 바라본 석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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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은 답안지를 보건대 상당히 주어진 공부를 열심히 하고 나름대로 자신의 앎을 위해서 애를 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앎이란 우선 그렇게 편지를 따로 써서 주장할 만큼 대단한 것은 아닙니다. 이렇게 쓰는 이유는 물론 학생의 앎이 대단하지 않다는 뜻은 아닙니다. 앎이란 것 자체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학생의 경우처럼 자신의 오류를 인정하지 못하게끔 이끄는 것도 앎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지식은 그래서 자신의 '눈'을 흐리는 기능도 가지고 있지요."

 

4학년 2학기, 영화사 수업에서 만난 강사가 내게 던진 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그 과목 성적이 낮게 나와서 분한 마음에 메일을 보냈더니 내게 돌아온 답이 저랬다. 그리고, 족히 A5 다섯 장은 되었을 긴 편지가 시작되었다. 그 장문의 편지에서, 내 답안의 문제와 글쓰기의 한계를 그는 백일하에 알몸 그대로 드러냈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아무에게도 그 편지를 보여줄 수 없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그런 나무람을 들어본 적이 없었던 나는 망연자실했다. 처음에는 다소 분하고 억울한 감정도 없지 않았지만, 찬찬히 들여다본 그 글은 정연했고 날카로웠다. 무엇보다 내 속살을 정확하게 헤집고 있었다. 어린애처럼 울고 싶은 심정이었으나, 장성한 나는 쓰게 웃었을 뿐이다. 그날 대학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훈계다운 훈계를 들었던 것이다. 선생다운 선생이 내리는 매는 매웠고, 매운 만큼 절절했다. 20대 중반에서야 비로소 나는, 내 오류와 허영을 깊숙이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쩌면, 저 글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었는지 모른다. 나란 사람이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던 게 말이다. 그것 말고도, 앎 자체가 그리 대단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과 때로 어떤 앎은 '알지 못하는 것'(무지)보다 무의미할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다른 누군가의 허물을 통해서가 아니라 내 오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다. 오로지 그의 글만으로 내가 학문의 길을 벗어던진 건 물론 아니었다. 공부를 하기에는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능력도 턱없이 모자랐다. 어찌되었든, 공부에 대한 꿈을 접는 데 그의 글은 한 1퍼센트쯤은 기여했다. 그는 편지 말에서, 좋은 학자적 자질을 훼손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서 편지를 띄운다는 말을 덧붙였다. 내 글(시험 답안지, 중간 리포트, 항의성 메일) 어디에 학자적 자질이 묻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내자 지닌 얼마 안 되는 학자적 자질을 버린 대신 다른 것을 얻었다. 그것이 어쩌면 공부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언제나 저 말을 내 가슴에 새겨두며 살고 있는지는 의문이나, 적어도 나는 아직까지 내 자신을 성찰하는 데 게으름 부리지 않으려 한다. 오랜만에 들취본 그의 편지는 저 문장으로 끝을 맺고 있었다.

 

"아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아는 것을 쓰는 지혜와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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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을 띄엄띄엄 함께한 내 친구들. 서로 학교가 다르고 사는 곳이 달라, 또 가끔은 각자의 연애에 빠져 띄엄띄엄 만날 때도 있지만 우리는 10년 넘게 한결같이 지내고 있다.

누군가 힘들 때 서로의 어깨를 빌려 줬고, 누군가 제 안에서 북받치는 울음을 토해낼 때 말없이 받아줬다. 넷 중 둘은 이미 여러 번 눈물을 보였다. 가끔, 그 일을 가지고 놀려먹을 때도 있지만, 우리는 그 누구보다 그 눈물에 담긴 슬픔과 설움을 잘 안다. 나는 아직 한번도 녀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인 적이 없다. 녀석들에게 내 눈물을 숨기고자 그랬던 건 아니다. 단지, 녀석들보다 내가 조금 덜 치열했을 뿐이고 덜 상처받았던 탓이다. 비교적 운이 좋았던 나는 녀석들보다 덜 실패했는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그만큼 몸 사리며 살았다는 반증밖에 되지 않는다. 적어도 어떤 부분에 관해서는 그럴 것이다.

두 녀석은 녹두에서, 나는 신촌에서 학교를 다녔고, 다른 녀석은 얼마 동안 광주에서 살았다. 그러다, 올해부터 우리들은 다시 뭉치게 되었다. 우리는 지난 10년 동안 넷에서 다섯, 혹은 여섯이 되기도 했고, 그러다 셋, 혹은 둘이 되기도 했다. 누군가 군대에 가야 했고, 또 누군가는 멀리 광주로, 혹은 바쁜 일터로 가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셋이 되었다 다섯이 되었다 하며 우정의 몸피를 줄이기도 하고 늘이기도 했다. 어떤 친구들이 왔다가 가버렸고, 또 어떤 친구들은 기웃거리다 사라졌다. 그 결과 이렇게 넷이 남게 되었다. 하여간, 우리들 넷은 올 한해를 온전히 함께했다. 그 시간이 이제 며칠, 혹은 몇 달 뒤면 다하게 된다. 한 녀석은 늘그막에 군대에 가게 되었고, 다른 녀석은 1월부터 새 직장이 있는 아산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스물의 끝자락에서 우리는 이곳에서 각자의 새로운 자리로 옮아가게 된 것이다. 하여, 우리는 넷에서 둘이 되었다. 나와 한 놈만이 서울에 남아 우리가 함께했던 시간들을 추억할 것이며, 다시 우리가 함께할 시간들을 기다릴 것이다.

우리는 여느 20대 후반의 아저씨들처럼 놀기도 하지만, 대개는 그렇지 않게 논다. 난 당구를 아예 못 치고, 포카(나 화투), 컴퓨터 게임도 할 줄 모른다. 그런 나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우리는 대개 방구석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면서 노가리를 까곤 한다. 어쩌면 그런 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없을 때 지들끼리는 더러 당구도 치고, PC방에 가서 게임도 곧잘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내가 있을 때도 간혹 지들끼리 화투나 카드를 한 적이 있긴 하지만, 내 기억엔 그리 많지는 않다. 그런 날에는 난 가만히 녀석들 옆에 누워 그네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소일하거나 책을 읽곤 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흔한 나이트도 같이 가본 적이 없다(한두 번?). 세상의 여자들을 꼬여서 침대로 이끄는 데 지극히도 서툴렀던 우리는, 우리들의 방에 모여앉아 각자 얼마나 여성의 호감을 살 수 있을지 비교, 평가했던 적도 있다. 그나마 어색하지 않게 여자들과 이야기 나누고, 체질적으로 분위기 띄우는 걸 즐기는 내가 없었더라면, 그네들 셋이 방바닥을 박박 긁어대며 보냈을 날들은 더 많아졌으리라.

우리는 그저 방바닥에 앉아 영화를 보거나 술잔을 기울이거나 토론을 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 끝없이 토론을 벌이기도 하고, 서로의 관점과 입장을 신랄하게 비판하기도 했지만, 우리는 서로의 차이를 잘 알고 있었고 그 차이를 인정하는 가운데 극복하려 애썼다. 웃고 떠들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다가 나란히 누워 옛 노래를 흥얼거리며 함께 부르기도 하고, 새벽까지 가까스로 이야기를 이어가다 스르르 잠들곤 했다.우리는 10년 동안 그렇게 살을 부비고 말을 섞으며 지냈다.

서른 즈음의 나이에도, 우리는 만나서 애들처럼 다투고 투정부리기 일쑤다. 가끔은 유치하게 먹는 걸 가지고 티격태격 싸우기도 하고, 그런 모습을 두고 짐짓 어른스레 나무라는 녀석도 아이처럼 토라지기는 마찬가지다. 가끔은 그렇게 먹는 걸로 싸우기도 하지만, 때로는 맛있는 걸 먹으며 서로를 생각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의 벗은 몸을 아무렇지 않게 대하고, 그 몸에 척척 손과 발을 갖다대며 장난치기 좋아한다. 장난스레 똥구녕을 찌르기도 하고, 한 녀석이 밤새 게워낸 토사물을 다른 녀석이 몸에 두른 채 잤던 적도 있다. 유달리 깨끗한 척하는 나는 그런 장난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몸이 근질거리는 날에는 빠데루를 하며 힘을 겨루고, 누구 발이 더 높이 올라가는지 발차기 시합을 벌이기도 한다. 녀석들과 그러고 있노라면, 난 도리 없이 19살의 나로 돌아가고 만다. 문득, 녀석들의 얼굴에서 19살의 그네들을 볼 것만도 같다.

이제 헤어지면, 언제 다시 만나 일없이 빈둥대고 애들처럼 싸울 수 있을까. 그러기엔, 우리의 나이가 이미 꽉 차버렸는지 모른다. 돈을 벌어야 하고, 결혼을 해야 할 나이인 것이다. 차도 사야 하고, 집도 장만해야 한다. 그리고 나선, 자동차 배기량을 늘리는 데 열을 내고 아파트 평수를 넓히는 데 눈벌게지겠지. 아쉽지만, 우리의 추억은 여기까지인지 모르겠다. 나와 한 놈은 여전히 이곳에 남아 그 추억을 곱씹으며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그 추억을 고스란히 간직하여 새로운 추억에 잇대리라. 그래서, 2년, 혹은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우리가 다시 만났을 때 변함없는 모습으로

너희와 함께 청춘을 이야기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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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전 겨울이었다. 이불 안에서 켜곤 하던 드라이기의 추억. 옥탑방은 지상의 맨 꼭대기에서 겨울 바람을 맞았다. 보일러는 고장났고 전기 장판은 없었다. 냉동고와 다름없는 옥탑방에 냉장된 채 온몸으로 추위와 싸워야 했던 날들. 그런 날이 며칠 동안 계속됐다. 보일러 배관은 꽁꽁 얼었고 그게 녹아야만 보일러를 고칠 수 있었다. 날이 풀려 자연히 녹기만을 기다리는 수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두꺼운 겨울 이불을 두 겹씩 이고 잠들어야 했다. 몸을 내리누르는 압박감이 오히려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있음을 그때 알았다. 그 두꺼비 껍질 같은 이불 속으로 따스한 바람을 넣어주던 드라이기. 그 바람은 겨울 바람을 막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부족했건만 그나마 그것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다. 너무 추운 날에는, 그래서 이불의 무게와 드라이기의 바람만으로 추위를 견딜 수 없는 날에는 가스레인지를 켜놓곤 했다. 가스레인지 위에서 온몸을 뒤트는 마른 오징어의 삶이 부러운 시절이었다.


 


그로부터 3년 전 겨울이었다. 싱크대에 내리꽂히던 오줌발의 추억. 그때도 겨울은 여지없이 추웠고 허기졌다. 선배 자취방에서 책을 양식 삼아 버티던 날들이 며칠 동안 계속됐다. 하루 한 끼 먹을 수 있었던 밥은 오직 김치가 찬의 전부였다. 지독히 간소했지만, 지극히 맛있었다. 가끔 운이 좋은 날에는 선배가 사다 준 라면으로 하루에 두 끼를 먹기도 했다. 읽고 자고 일어나서 또 읽고. 그렇게 나는 육체의 주림을 책으로 채워나갔다. 아주 춥고 배고픈 날들이 이어졌다. 그때도 날카로운 바람이 조그만 방 밖에서 웅웅거리며 무섭게 휘몰아쳤다. 외따로 떨어진 그 집의 옥외 화장실은 그런 날은 더욱 곤혹스러웠다. 겨울바람이 끔찍이도 싫은 날에, 새벽녘 다급한 요의에 잠을 깬 우리는 싱크대에 오줌을 누곤 했다. 묵묵히 나의 오줌을 받아 주던 그 싱크대는, 묵묵히 내 치기 어린 말들을 받아 주던 그 선배와 많이 닮았었다. 선배는 내 오물 같은 말들을 수챗구멍처럼 커다란 귀를 열어 다 받아 주곤 했다. 그 당시, 젊은 날의 내 언어는  허공에 뜬, 날것 그대로인 감정의 찌끼와 책임질 수 없는 이성의 오물들이었다. 선배는 그런 나를 조용히 들어 주었다. 선배의 그 귀를 생각하면 내 안의 말들이 땅을 패는 오줌발처럼 마구 쏟아질 것만 같다.


 


이불 속에 바람을 넣어 주던 그 드라이기의 존재를 나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아마, 그 드라이기는 이사오면서 버려졌던 것 같다. 나의 오줌을 묵묵히 받아내던 싱크대도 잊고 살았다. 그 싱크대와 더불어 선배의 존재도 잊고 지낸 건 아닌지 모르겠다. 가난했지만 힘들었지만, 사실 그리 힘들 것도 초라할 것도 없는 시절이었다. 사랑이 있었고, 선배가 있었기에. 사랑을 잃고, 선배를 잃고 나는 이 글을 쓴다. 오래 전 그녀는 떠났고, 그보다 더 오래 전 선배는 죽었다. 아무 말도 남기지 않은 채 선배는 세상에 대한 기억을 떠메고 고독하게 갔다. 아무도 그의 죽음을 몰랐다. 이 생에서 그가 살았던 방식 그대로 마지막까지도 철저히 고독하게 그는 떠났다. 그녀는 두 번이나 자신을 뿌리쳤던 나에게로 돌아왔었다. 하지만, 난 나를 놓아버린 그녀에게 돌아가지 않았다.


모두들 내가 떠나보냈고, 내가 놓아버렸는지 모른다. 빌어먹을 내가. 다 추억의 한때가 되었다. 그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온전히 나만의 추억이. 아련히 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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