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자 룩셈부르크가 옥중에서 보낸 서신들 중에 나오는 이야기다. 유럽에서 철새들이 이동할 때 독수리나 매와 같은 맹금들도 그들의 최종 기착지인 나일강가에 도착하게 되면 며칠 동안이나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기진맥진하게 되는 험난한 여행을 경험해야 한다고 한다. 그런데 몸집이 작은 방울새니 나이팅게일이니 하는 연약한 새들은 어떻게 그렇게 멀고 힘든 항로를 날아갈 수 있는가? 룩셈부르크가 감옥에서 읽었던 조류학 관련 문헌에 의하면 철새들이 이동할 때면 하늘의 휴전이 성립한다고 한다. 즉 평소에는 잡아먹고 먹히는 관계에 있지만 이때가 되면 작은 새들은 몸집이 큰 맹금들의 등에 업힌 채 멀고 먼 하늘을 날아간다는 것이다. 거의 시적이라고 할 만한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주의 근본적인 짜임새가 경탄하리만큼 신비스러운 방식으로 빈틈없는 상호의존과 상호희생, 다시 말하여 무한한 사랑과 자비심으로 기초지워져 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 . . 김종철, <간디의 물레>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봤다. 예수의 수난은 눈물겨웠다.
하지만, 베드로의 배신은 그것 못지않게 눈물겨웠다. 아니, 그보다 더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나의 얼굴을 봤다. 펑펑, 울고야 말았다.
어제, TV에서 본 수험생들. 시험장을 빠져나오는 그들의 어깨에는 허탈함이 내려앉아 있었다. 아마, 그들도 9년 전 나처럼 물었겠지. 12년 동안 오늘 하루를 위해 달려왔다, 뭔가 있을 줄 알고 좆 빠지게(이런 상황에서 이 표현을 안 쓰면 대체 언제 쓸까.) 달려왔다, 그런데, 막상 결승점에 와보니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12년의 삶을 단번에 평가하고 앞으로 수십 년의 삶을 한번에 결단내릴 몇 장의 커다란 시험지뿐이다, 제기랄 정녕 이것뿐이란 말인가.
누군가 그러더군.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은 일평생 딱 두 번 긴장한다고. 입시와 입사가 그것이라고. 물론, 세상은 변했다. 무한 경쟁이란 말이 유령처럼 떠돈다. 명예 퇴직이란 알량한 이름을 가진 부품 교체 방식도 오래 전에 도입되었다. 자본은 최소한의 염치를 벗어던진 지 이미 오래다. 입시의 문도 다양해진 게 사실이다. 하지만, 여전히 변하지 않은 건 한 사람의 입사 지원서를 검토하는 2분 19초라는 짧은 시간 동안 인사 담당자의 눈길이 머물 곳은 여전히 몇 군데 안 된다는 점이다.
<슈퍼사이즈 미>란 영화가 있다. 비만을 다룬 영화다. 더 정확히는, 다국적 기업인 맥도널드를 비판한 영화다.
미국은 지금 두 개의 비만으로 위태롭다. 하나가 병리적 비만이라고 한다면, 다른 하나는 정치적 비만이다. 한없이 비대한 미국은 이라크를 우적우적, 씹어 삼켰다. 아마, 북한이 좀더 육질이 좋고 기름졌더라도 그들의 이빨이 벌써 북한의 심장에 박혀 있지 않았을까. 그런 다음, 핵무기(가 존재한다고 하면)는 이쑤시개로 사용했겠지.
맥도널드는 전 세계인의 일상이 되었다. 두려운 건, 전 세계 사람들이 미국식 삶의 패턴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지체되지 않는 욕망 충족의 세계. 그것은 풍요이면서 악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