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자신의 삶을 수놓는 몇몇 순간들이 있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도래했었다. 몇 권의 책, 그리고 몇 명의 벗들과 더불어. 지리멸렬한 삶의 언저리에서 해갈의 단비를 내려주었던 책들이 있다. 지금은 비록 지난 시절의 광휘를 잠시 잃고, 책장에 덩그러니(쓸쓸히) 꽂혀 있지만. 그런 책들과 뒹굴며, 나는 내 얄팍한 지성과 허약한 사회 의식을 벼리고 또 벼렸다.

 누군가의 말처럼, 지성이란 기억력의 축적일 수도 있고, 평범과 분리되는 통찰일 수도 있다. 지성이란 이름으로 단순한 기억력의 축적에만 매달리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가? 머릿속엔 수많은 지식을 담고 있지만 밸이 꼬일 대로 꼬인 사람들이 있다. 입으로는 좌파인 양 떠들지만 실제 삶은 지극히 보수적인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의 참된 진리를 부르짖는 크리스천이지만 믿음의 알맹이는 지극히 기복(祈福)적인 사람들이 있다. 겉으론 페미니즘을 떠들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여전히 ‘남성중심적인’ 습속에 묻힌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수많은 ‘겉돎’과 ‘헛돎’의 쳇바퀴를 굴리며 허방 짚곤 한다.

 지성이 평범과 분리되는 통찰이려면, 무엇보다도 성찰이 필요하다. 성찰이 없는 교양과 지성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성찰(reflection)은 밖을 향해 있는 시선을 다시(re) 제 안으로 돌리는(flect) 것이다. 돌아봄이다. 나의 삶을 하나의 전범으로 삼아, 지성의 날을 세워야 한다. 그 날은 타인뿐만 아니라 나를 향해 있어야 한다.

 성찰은 또한 질문이다. 주어진 답에 질문을 던지지 않는 것, 주어진 물음을 다시 묻지 않는 것, 답을 찾는 과정에 의문을 갖지 않는 것, 그것은 죽어 있는 교양이다. 질문을 던져야 한다. 그래야만 답을 찾을 수 있다. 질문이 없는 곳에는 답도 없다. 다시 강조하지만, 지성은 답을 쌓아두는 게 아니다.

 답이 그르다면 질문을 달리하자. 답이 그릇되거나 싫으면 자기가 새로 문제를 만들어 답하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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