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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헌책을 사면 그 안에서 별것이 다 나온다. 책장과 책장 사이는 무언가 얇은 것을 숨기기 좋은 장소인 것이다. 나의 경험으로는 오래된 엽서를 본 적도 있고, 우표를 본 적도 있다. 꽃잎이나 나무 잎사귀도 흔하다. 여학생들이 그런 것들을 책갈피 사이에 넣어두었다가 편지를 보낼 때 붙여 보내곤 했는데, 깜빡 잊어버리는 바람에 뒷날 헌책을 산 사람이 발견하는 것이다.

 

얼마 전 내가 사는 해운대와 가까운 일광 쪽으로 갔다가 고물가게에서 책을 몇 권 샀는데, 그 책 속에서 일제강점기의 우편저금통장이 나왔다. ‘東萊郡 機張面(동래군 기장면)’ ‘大日本婦人會 機張面支部 貯金組合(대일본부인회 기장면지부 저금조합)’이란 푸른 도장이 찍혀 있고, 안에는 돈을 언제 얼마 저축했는지 적혀 있었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것이지만, 한편 재미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버리지 않고 서가에 얹어두었다.

 

옛날 책이라고 해서 다를 것은 없다. 어느 대학에 계시는 분에게 들은 이야기다. 고서점에서 책을 한 권 샀는데, 안에서 희한한 것을 보았노라고 한다. 무슨 고서냐고? 흔하디흔한 논어(論語)맹자(孟子)중용(中庸)대학(大學)이런 것이다. 집에 와서 책을 들추다 보니, 책갈피 안에 무언가가 있었다. 고서는 인쇄한 종이를 접어서 책으로 맨다. 그러니 접힌 종이 안에 무언가를 넣을 수 있다. 그 무언가를 끄집어내었더니, 좀 이상한 그림이었다고 한다. 그림이라고? 무슨 그림? 공부하는 학생들이 보아서는 곤란한 그런 그림이다. 이쯤 말해도 모르시겠는가? 춘화(春畵), 다른 말로 포르노그래피다. 물론 빼어난 작품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볼 만한 것이었다고 한다. 이 책의 주인은 거룩한 성인의 말씀을 공부하다가 좀 지겨워지면 춘화를 꺼내서 감상했던 것인데, 그것을 넣어두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이다.

 

어떤 장면이 떠오른다. 젊은 아들은 과거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하지만 시험공부란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지겨운가. 엄한 아버지의 눈초리에 목이 늘 당긴다. 공자왈 맹자왈을 수없이 반복하다가 스트레스가 쌓이면 책갈피에 넣어놓은 춘화를 꺼내보며 야릇한 상상에 빠진다. 이런 기억은 누구에게나 있으리라. 그런데 일은 늘 공교롭게 일어나게 마련이다. 실로 오랜만에 춘화를 꺼냈는데, 그때 마침 어흠, 어흠, 아무개 있느냐하는 아버지의 음성이 문밖에서 들린다. 후다닥 춘화를 책 속으로 집어넣고 하고 답한다. 어디로 심부름을 갔다 오라는 하명이시다. 이러구러 세월은 흘러 그 책 속 어디에 춘화를 넣어두었는지 까마득히 잊고 만다. 그게 백수십 년을 뛰어넘어 어느 고서점에 출현하게 된 것이다.

 

말이 옆으로 빠지지만 불쑥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중학생 때 친구들 가운데 좀 올된 녀석들은 어디서 구했는지 이상한 사진을 가지고 왔다. 쉬는 시간에 교실 한구석에 뭉쳐서 그것을 보느라 선생님이 오신 줄도 모르다가 결국 사진을 빼앗기고 사진을 가져온 녀석은 교무실로 불려가 출석부로 머리를 통타(痛打)당하기도 했다. 요즘에는 이런 책을 보는 학생이 없을 것이다. 인터넷에 그런 희한한 것들이 지천이니 말이다.

 

 

휴머니스트·현진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이란 책을 보면 책갈피 속의 물건과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하나 실려 있다. 이 책은 규장각 서리를 지낸 유재건(劉在建, 1793~1880)이란 인물이 편집한 책인데, 양반이 아닌 부류들(주로 중인 계층)의 전기를 모은 것이다. 조선 후기에 역관. 의관 등 기술직과 서울 각 관청의 서리들이 자의식을 가지고 문예운동을 활발하게 벌였는데, 대개 그런 인물을 중심으로 비양반층의 전기와 일화를 모아서 편찬한 책이다.

 

유재건은 이 책에 자신이 쓴 겸산필기(兼山筆記)를 잔뜩 인용해두었다. 그중 홍윤수(洪胤琇)란 인물에 대해 짤막하게 쓰고 있다. 홍윤수는 가난한 독서가다. 양반이 아니니 과거에 응시할 일이 없다. 하지만 독서인이다. 그는 필사(筆肆, 붓 가게)와 책시(冊市, 서점)를 오가는 것으로 생계를 꾸렸다. 무슨 붓 가게나 서점을 냈다는 것은 아니고, 판매자와 구매자를 연결해주고 구문을 받는 거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금속활자의 나라 조선에는 희한하게도 책을 만들어 파는 출판사가 아예 없었고, 서점도 19세기나 되어서야 출현했다. 위의 책시란 것 역시 19세기의 것일 터이다. 사정이 이랬으니 책을 사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이고 팔기를 원하는 사람도 개인인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양자 사이에서 중개를 하는 사람을 책쾌(冊儈)라고 한다. 책거간(冊居間)이란 뜻이다.

 

홍윤수가 하루는 친구가 팔아달라고 내놓은 경서 몇 함을 구매해주는 단골 책가게에 가져다주기 전에 훑어보는데 그 안에서 금은과 대모갑(玳瑁甲), 곧 바다거북의 등딱지로 장식한 칼 한 자루가 있는 것이 아닌가. 제법 돈이 될 만한 것이었다. 처자식들이 늘 굶주리는 판이었다. 자신이 그 칼을 가진다 해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갈등이 없지 않았겠지만, 그는 즉시 친구를 찾아 칼을 돌려주었다. 이게 제법 의리 있는 일로 평가를 받아 기록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렇기는 하다. 하지만 그 비싼 칼까지 책 속에 넣고 잊어버리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내가 대학 다닐 때 존경하던 어느 선생님께서 돌아가신 뒤 제자들이 서재의 책을 정리하다가 희한한 책을 하나 발견했다. 책 안에서 편지 봉투가 나왔는데, 현금 약간과 어디에 얼마를 썼는지를 꼼꼼하게 적은 종이쪽이 있었던 것이다. 그분이 활동하던 시절에는 인터넷뱅킹도, 현금카드도 없었다. 월급을 종이봉투에 현금으로 넣어 주던 시절이었다. 인품이 훌륭하신 분이었지만 어쩌다 생기는 현금을 한곳에 따로 두고 사모님 몰래 관리했던 것이다. 그 점잖으신 분이 서재에서 사모님이 보지 않게 봉투에 현금을 넣고 빼는 광경을 생각해보면 웃음이 절로 난다. 하하!

 

그러고 보니 나 역시 10년 전쯤 어떤 논문집에 현금을 약간 넣어두고 뒤에 찾으니 씻은 듯이 없었다. 착각을 했나 싶어 가지고 있는 논문집을 죄다 꺼내놓고 샅샅이 뒤졌지만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 몇 해 전 논문집들이 자꾸 불어나 한데 묶어 버렸는데, 아마도 그 논문집에서 현금을 약간 발견하고 기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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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0-20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너무 와닿아서 웃으며 읽었어요^^

몽당연필 2016-10-23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다 덮은 책에서 빳빳한 지폐 한 장이 나올땐 횡재한 기분이 들어요 ^^

백팔배 2016-12-19 0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해운대에 사는데 선생님같이 책을 좋아하는 분을 뵙게되면 참 좋을 것같아요.
 

대학 다닐 때는 별로 없던 책이 대학원 시절부터 본격적으로 늘기 시작했다. 영인본을 외상으로 사서 달마다 갚아나갔다. 그렇게 해서 늘어나는 책을 보면서 내 지식이 늘어나는 것인 양 착각하며 뿌듯해한 적도 있었다. 한데 대학에 자리를 잡고 나니, 책이 불어나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책을 사는 핑계도 여럿이다. 지금 진행 중인 연구에 꼭 필요해서 사들이는 경우는 나무랄 필요가 없다. 하지만 연구와 관계없는 책도 사들이는 데 문제가 있다. 전공과는 상관없지만 워낙 고전으로 소문난 책이라서, 그 책을 읽지 않으면 무언가 시대에 뒤떨어질 것 같아서 산다. 또 내가 이런 책을 사주지 않으면 누가 사주랴 하는 어쭙잖은 동정심(?)에서 사들인 책도 있고, 심지어 장정이 너무 좋아서 산 책도 있다. 이러니 연구실은 물론 집에도 책이 자꾸 쌓인다.

 

17년 전 이사할 때 가장 큰 방 사면에 책장을 둘러 넣어 책을 쌓기 시작했고, 나머지 방도 아이들이 자라서 집을 떠날 때마다 하나씩 책방으로 바꾸었다. 그러고도 책이 넘쳐 일부는 솎아서 버렸다. 공부에 소용이 닿지 않을 것 같아서, 또 영원히 볼 것 같지 않아서 버린 것이지만, 한 권 한 권 살 때의 추억이 떠올라 적잖이 섭섭했다.

 

정년이 되면 이 책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가까이 지내는 교수님들과 이따금 이 문제를 한가한 이야깃거리로 삼는다. 그분들 역시 공부 욕심, 책 욕심이 많은 터라 적지 않은 책을 가지고 있다. 자녀가 부모와 같은 분야의 학문을 하는 경우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그냥 물려주면 된다.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는 아주 드물다.

 

어떤 교수님은 정년 뒤 어디에 큼지막한 공간을 빌려 거기에 책을 모두 가져다놓고 작은 도서관을 만들면 어떻겠느냐고 제안한다. 그 작은 도서관에 매일 출근해 책도 보고 저녁이면 석양주도 한잔하는 것이다. 하지만 공간을 빌리는 비용이며 책 관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당장 공상이란 핀잔을 들었다.

 

대개 사람들은 정년 뒤에 자신의 책을 대학 도서관에 기증하기를 원한다. 그런데 예전에는 도서관에서 무척 좋아했지만, 요즘은 썩 반기지 않는 눈치다. 대학에 부임한 해 어느 봄날이었다. 정년퇴임을 한 노교수님이 연구동 복도에서 혀를 차면서 무슨 이런 짓을 하누?” 하신다. 여쭈어보니 도서관에 장서를 기증한 뒤 시간이 지나 찾아갔더니 복본을 모두 골라서 한구석에 쌓아놓았더란다. 짠한 마음에 자신이 수십 년간 있었던 연구동으로 다시 가져왔다는 것이다. 집으로 가져가기 위해서였다.

 

평생 애지중지 끼고 살던 책들이 버림을 받아 팽개쳐진 꼴을 보면 분하고 섭섭한 마음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도서관의 처지도 이해는 된다. 책은 쏟아져 나오고 서고는 부족하다. 무한정 받아들일 수는 없는 일이다. 해서 복본을 버릴 요량으로 솎아내어 둔 것이리라. 그게 기증자의 눈에 띄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마침 눈에 띄는 바람에 기증자를 한없이 서운하게 한 것이리라. 이런 이유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책 많기로 소문난 어떤 교수님은 대만에 기증했고, 어떤 교수님은 일본에 기증할 예정이란다.

 

한동안 한 달에 두어 번 보수동 헌책방 골목을 찾았다. 버스를 타고 남포동에서 내려 먼 길을 산보 삼아 걸어갔다. 골목을 지나면서 이따금 눈에 걸리는 책을 사서 배낭에 쑤셔 넣었다. 그런 나를 보고 아내는 집에도 책이 적지 않건만 보지도 않을 책을 왜 그리 사느냐고 나무랐다. 대답할 말이 궁했다. 공부하는 딸에게 물려줄까도 생각했지만, 전공이 달라 필요한 책만 좀 솎아내면 나머지 책은 갈 곳이 없다. 앞서 말한 것처럼 도서관에 기증할까 생각해보았지만, 대부분이 도서관에 있는 책이고 희귀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대부분 솎아내어 버릴 것이다. 요컨대 도서관 직원만 귀찮게 할 뿐 결코 반가운 대상은 아닐 것이다. 에라, 그래, 그럼 묶어서 팔아버리자! 속이 갑자기 시원해진다.

 

그런데 이따금 보수동 헌책방 골목에서 책을 뒤지다가 아는 분의 장서인이 찍힌 책을 보면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묶어서 판 책들이 그곳까지 흘러온 것이리라. 사정이 이러니 묶어서 파는 것도 보류할 수밖에.

 

다시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묘안을 생각해냈다. 어느 날 보수동 골목을 걷다가 아내더러 정년 후 보수동에서 책방을 내면 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집에 쌓인 책에 넌덜머리가 난 아내는 즉각 정말 괜찮은 생각이라고 하면서, 작은 책방에 들러 이런 규모의 가게를 얻는 데 얼마면 되냐고 물어보기까지 했다. 그리 많은 돈이 들지는 않았다. 또 내가 가진 책이면 그런 책방 서너 개는 채울 수 있을 것 같았다. 참으로 황홀한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 휴머니스트·현진

 

 

점잖게 책방에 앉아서 책을 읽다가 손님이 오면 책을 챙겨주면 그만이다. 돈을 벌자고 하는 일이 아니니 책이 안 팔린다고 안달복달할 것도 없다. 친구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오면 그날 책 판 돈을 가지고 아래쪽 동네, 곧 깡통골목, 국제시장, 남포동, 광복동으로 건너간다. 구석구석 좋은 술집 천지다. 대폿잔을 기울이면서 하루를 마친다. 어떤가? 황홀하지 않은가.

 

이 기막힌 계획을 주위 교수님들에게 털어놓았더니, 모두들 환호작약하면서 좋은 생각이라고 칭찬이 자자하다. 더욱 고무적인 것은 여러 교수님이 자신의 책도 강 교수의 책방에 내놓을 터이니, 팔아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책방을 아지트로 삼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한다. 대충 계산해보니, 그 교수님들의 책만 모아도 몇만 권을 훌쩍 넘는다. 그러므로 책의 공급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아마 이 소문이 나면 다른 교수님들도 동참할 터이고 그러면 강 교수의 책방20, 30년은 계속할 수 있을 것이다.

 

책의 입장에서도 폐가 도서에 꽂혀 있다가 소각되는 운명을 맞는 것보다 헌책방의 서가에서 자신을 읽어줄 새 주인을 기다리는 것이 훨씬 더 행복할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나는 정년 뒤 책을 처리하는 방법이며 인생 이모작 계획까지 벌써 완벽하게 세웠구나! 행복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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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loe 2016-10-20 04: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끔은 저도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몽당연필 2016-10-23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이 읽지도 못할만큼 쌓여있으면서도 책 들이기를 게을리하지 않는지라 저도 비슷한 고민을 합니다. ㅎㅎ

가을고양이 2016-11-18 0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에는 수납공간때문에 종이책보다 전자책을 많이 이용하고 있는데 그래도 종이책이 가득 쌓여있는 공간의 매력은 무시를 못하겠네요ㅎㅎ 잘 읽었습니다.

2016-11-2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헌책방의 로망..행복감에 저절로 웃음꽃이 핍니다

푸른나라하늘장군 2016-11-28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보수동이 어딘지 급 궁금해지네요~^^

범고개 2016-11-29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내 자식들은 읽지 않아도 어느 훗날 그의 자손이 읽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버리지 못합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인용부분의 파랑색 글자가 잘 안보입니다. 제가 광맹(?)일까요?)

지니 2016-12-14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있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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