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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르츠 바스켓 23 - 완결
타카야 나츠키 지음, 정은 옮김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후르츠 바스켓의 의미는 만화 중간에 나왔다.
과일바구니에 담길 수 없는 것을 갖고 불러주기만 기다린 토오루.
이 후르츠 바스켓은 연재 시작부터 끝이 보이지 않았기에(언제 12명이 다 나온단 말인가!)
구매를 좀 미뤘다가 나중에 구매했을 정도로 긴긴 여정이었다.
이 작품은 전반적으로 따뜻한 마음을 가진 토오루의 이야기이지만
일본작가의 작품이어서 정서가 다른건지
아니면 내 정신세계가 다른건지 몰입을 방해하는 몇몇 요소들이 있다.
우선, 늘 '적재적소'에 딱 듣고 싶은 말만 해주는 거의 신과같은 말솜씨가 거슬렸다.
10여편이 지난 뒤부터는 그런 토오루식 화법이 '짜고치는 고스톱'같아서
영 공감대가 형성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한꺼번에 보면 괜찮은데,
연재당시 띄엄띄엄 한권씩 보다보니 더 그랬던듯 하다.
그리고, 어찌되었건 12지들은 굉장히 유능한 사람들이다.
인물이 좋은것은 기본이고(따라서 인기폭발이다), 공부를 잘하거나, 운동을 잘하거나 돈이많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가슴아픔이 다들 내재해 있지만
오로지 그들은 문제의 해결을 '구원받는것'으로만 몰고 간 점이다.
그 구원의 원천이 토오루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듣고 싶은 말한마디 해주고 엄마같은 역할을 해준다해서 모든 문제가 사라질까?
아이를 키우고 여러 아이들을 지켜보고 있는 나로서는
'그건 아니지'라고 말하고 싶다.
특히나 이놈의 '구원'타령이 한꺼번에 '그남자 그여자의 사정'과 맞물려
같은 시기에 '후르츠바스켓'까지 두 타령을 듣게 되었으니
'일본인은 남이 구원해주지 못하면 사람구실하기 힘든가?'
하는 다소 이상한 생각까지 떠오를 지경이었다.
물론 이부분에서 구원타령은 '그남자 그여자'쪽이 더 억지스럽다.
후르바는 이 점에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부모같지 않은 부모' 잔치를 마련했다.
여기에 나온 대부분의 부모가 정말 이상한 사람들이다.
주인공이 갖고 있는 아픔을 함께 하는건 부모가 더 크지 않을까?
심지어 선천적인 질병이든 후천적인 질병이든 너무 힘들고 가망이 없어
다들 포기하라고 해도 미련스럽게 아이들 더 껴안아보는게 부모심정이 아니던가.
(그건 우리나라만의 정서는 아니지않겠는가....)
내 아이가 고양이로 변한다해서 내아이를 때리고 내버릴 수는 없기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사랑받는 이유는 '소재의 독특함'을 들고 싶다.
12지 소재도 그렇고, 제목인 후르츠바스켓 게임도 그렇다.
그리고 묘하게 환타지와 학원물을 넘나들고 있지만,
충실하게 순정만화의 기본 구도를 지키고 있다.
모든 멋진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을 사랑하며,
여자 주인공은 외면적으로 장점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알수없는 신의 말솜씨와 측정할 수 없는 따뜻함으로 무장하고 있다.
그리고 억지스러운 악역 캐릭터들이 속속 등장하지만
이 작품의 기본 구도는 어디까지나 따뜻한 인간미를 바탕에 두고 있기때문에
읽는 내내 '잘 될거야'하는 안도감이 함께 하고 있고,
토오루는 그 바램대로 침착하게 주인공의 역할을 해내갔다.
다시 읽다보니 이 책의 단점에 대해서만 구구절절 논한것 같은데
시작 초기의 기대감에 갈수록 못미치는 전개방식에 다소 실망감이있어 그런점이 있다.
내내 호감을 표시하던 유키가 갑자기 엄마에 대한 사랑이라며
신사답게 물러서 준 것도 좀 공감대 형성이 어려웠고
그 무서운 본가의 아키토가 토오루의 '친구합시다'에 스르르 무너지는 점도
급하게 마무리한 감이 없잖아 있기 때문이다.
다만, 12지에 고양이가 낄 수 없던 이유는 내 나름대로의 해석이 있다.
12지는 매우 상징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12지를 만들 때 고양이와 호랑이가 함께 있으면 그림상 식별이 어렵다.
그래서 인간과 친근하지만 호랑이가 들어가고 고양이가 빠지지 않았을까 하는 점이다.
이 모든 점을 고려하더라도 이 작품은 전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괜찮은 작품이다.
아마 외전이 나오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그건 마무리 부분이 다소 급한 감이 있었고
아무래도 부족한 부분이 자꾸 생각나기 때문이다.
마음의 상처는 치유하기 어렵다.
그건 자꾸 다른 것들로 채워나가고, 본인이 이겨나가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누구나 토오루가 필요하다.
하지만, 토오루를 기다리기 보다는 내가 누군가의 토오루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건 또 그 나름대로 성공한 삶이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