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벌리힐스의 집들은 납작 엎드려 있거나 우뚝 솟아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플로레스의 집은 60년대 모더니즘이 허용하는 한도 내에서 최대한 납작했다. 그런데도 전망이 굉장했다. 집에 딸린 조각공원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시를 한눈에 굽어보는 전망이었다. 평평하게 보여도 사실은 바다와 마주한 완만한 언덕에 위치한 베벌리힐스 저택들이 누리는 호사였다. 조망점이 도시의 스카이라인 바로 위에 있어서, 해질 때 노을이 한층 붉었다. 여기서 보면 로스앤젤레스도 충분히 아름다웠다.

 
탤리는 저택 입구에 섰다. 전에 왔을 때와 눈에 띄게 달라져 있었다. 벽에 걸린 작품들이 전에는 탤리에게 구입한 근대미술이 주류를 이뤘는데 이제는 현대미술로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변화가 집에 에너지를 주입하고 있었다. 식당 벽에는 사기싱크대를 중국 음식 테이크아웃 상자처럼 펼쳐놓은 로버트 고버(미국 조각가. 인체와 일상의 사물처럼 익숙한 것들을 기이하고 낯설게 해체해 현대인의 소외감과 불안감을 표현했다)의 조각품이 걸려 있고, 벽난로 위에는 유리창만 한 거울에 선반을 달고 알약을 진열한 데미언 허스트의 작품이 붙어 있었다. 분위기가 전보다 활기차진 것이 탤리의 눈에도 보기 좋았다. 뜻밖에 현대미술 일거리를 가져와 첨단을 느끼게 해 준 레이시가 기특할 따름이었다. 탤리가 통상적으로 접하는 근대미술의 세상은 아늑하고 편안했다. 반면 이곳의 새로운 오브제들은 어리둥절하고 들뜨게 했다. 이미 한 잔 걸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모인 사람들 중에 한 잔 걸친 기분 정도로 만족할 사람은 없었다. 그들은 위스키가 제공되는 거실에 모였다.

 

[로버트 고버,「X의 세 부분」, 1985년] 

 

집주인은 아직 등장하지 않았다. 하지만 게일 스마일리는 나타났다. 게일은 이 집의 현대미술을 에두아르도 플로레스에게 판 장본인이 자기라는 것을 아낌없이 드러냈다. “고버 작품 멋지지 않아요?” 게일은 벌써부터 자신이 미는 작품들 홍보에 열을 올렸다. 배우 스털링 퀸스와 그의 꽤 오래가는 여자친구 블랑카가 도착하자 파티 분위기가 제대로 나기 시작했다. 스털링은 지난 5년 동안 부동의 TV스타 자리를 지켰고 매년 출연료가 고공행진했다. 하지만 그는 그냥 부유한 사람일 뿐이었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지음. 이재경 옮김. 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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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옷을 다 입은 레이시가 나타났을 때, 나는 레이시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레이시의 차림은 업타운에서는 첨단이었고 다운타운에서는 고전이었다. 레이시는 두 세계 모두에 속해 있었다. 레이시는 어느 쪽에서도 자기 개성을 부정할 필요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여자였다. 난 이날 그걸 깨달았다. 하기야 전부터 레이시는 언제나, 심지어 상황이 안 좋을 때도 끼를 발산했다. 레이시는 진흙투성이 장화를 신고 길을 가다가도 『뉴욕타임스』 기자에게 사진 찍혀서 앞서가는 스타일로 소개될 타입이었다. 하지만 내 눈에 레이시가 어린 여자가 아니라 여자로 보인 것은 이날이 처음이었다.


레이시가 『타임스』에서 읽은 레시피로 박하술을 만들었고 우리는 창가에 있는 작고 동그란 탁자에 앉아서 할머니들처럼 홀짝거렸다. 집이 남향이어서 일몰이 임박하자 노을이 거리를 따라 쏟아지며 창문들을 황금색과 진주색으로 물들였다. 레이시는 어디로 가든 언제나 빛 한가운데 있었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다. 그런 건 일부러 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이날 레이시는 어느 때보다도 아름다웠다.


우리는 택시를 타고 어퍼 이스트사이드로 갔다. 탤리 갤러리는 정장에 넥타이를 맨 사람들로 북적였다. 벽에는 조르지오 모란디의 절제미 있는 정물화가 걸려 있었는데 크기는 대부분 찻쟁반보다 클까 말까했다. 옅은 갈색들, 창백한 회색들, 부드러운 파란색들이 사람들로 하여금 조용조용 속삭이게 했다. 고함을 치면 그림이 소스라치며 망가질 것 같았다. 모란디 그림에 있는 병과 카라페와 도자기 그릇들은 서로의 체온을 찾아 옹기종기 모인 작은 짐승들 같았다. 수줍은 그림들이었다. 하지만 피카소나 마티스 옆에 걸려도 꿀리지 않을 힘이 있었다.


레이시는 갤러리 안의 사람들을 훑어보다가 나에게 “우리, 여기서 뭐해?”라는 표정을 지었다. 참석자들 태반이 예순이 훌쩍 넘은 사람들이었다. 레이시는 금단추 달린 양복 상의와 체크무늬 바지와 풀 먹인 흰색 깃과 줄무늬 셔츠 차림의 남자들을 보다가 내게 말했다. “저 사람들 죄다 해군 제독이야?”

 

 

 

[조르지오 모란디, 「포도주 병이 있는 정물」, 1957년]  


탤리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그는 레이시를 오랜 친구처럼 끌어안으며 유별나게 반가워했다. 함께 러시아로 모험을 떠났다 오더니 동지애가 눈부셨다. “모란디 말이야, 놀랍지 않아!” 탤리가 말했다. “모두 같으면서도 모두 달라. 내가 모란디로 시즌을 연 이유가 있어. 입이 떨어져야 비판을 하든지 할 거 아냐! 모란디 그림과 에드워드 호퍼 그림을 같은 방에 걸고 어느 그림이 더 침묵을 유발하는지 보고 싶어. 그건 그렇고 레이시,” 탤리가 화제를 바꿨다. “소더비에 있는 게 따분해지면 나한테 전화해. 나는 자네를 오만 가지로 써먹을 수 있어.”
탤리의 제안에 다른 흑심은 없었다. 레이시는 그걸 알기에 기분이 우쭐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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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세 사람은 미술에 질렸고, 음식이 고팠다. 그들은 다시 현실 세계로, 사람들로 붐비는 그랜드 호텔의 중정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아메리칸 샌드위치를 시켜먹은 뒤 오후 회의 전까지 각자 방에서 쉬었다.
오후 3시에 셋은 호텔 로비에서 만나 다시 차를 타고 에르미타주로 가서 이번에는 미술관장실로 안내됐다. 관장은 영어를 했고, 일행을 반갑게 맞았다. “저희 그림 좀 보셨나요, 몇 점 안 됩니다만.” 관장이 농담을 던졌다. “이리 오시죠.”
관장이 넓은 도서관으로 통하는 옆문을 열었다. 책장이 방을 빙 두르고 있었는데, 허리 높이의 선반에 록웰 켄트 그림 여덟 점이 나란히 놓여 있었다. 그린란드를 그린 대형 그림들이었다. 썰매개, 그린란드 사람들, 바다의 부빙들, 그리고 한밤의 태양. 맞은편 벽의 레일 위에는 러시아 화가 아이바조프스키(러시아 풍경화가)의 안개 낀 풍경과 마코프스키의 마을 풍경 열두 점이 놓여 있었다. 어떤 것은 크고 어떤 것은 작았다. 작은 것들은 바닥에 있었다. 켄트 그림과는 비교가 안 돼. 레이시가 생각했다.

 

 [이반 아이바조프스키, 「달빛에 물든 나폴리 만」, 1850년경]


“러시아에서 자국 미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관장이 말했다. 이 말을 신호로 협상이 시작됐다. 나름 흐루시초프 시대 쿠바 미사일 위기에 버금가는 긴박한 협상이었다. 레이시는 자신도 거기 있을 이유가 있다는 티를 내려고 열심히 기록하는 척했다. 45분이 흘렀고 양편 모두 지쳤다. 협상 결과는 회의 5분 만에도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러시아 그림 열두 개 대 켄트 그림 여덟 개 어때요?”
모두에게 보드카가 돌아갔다. 다들 가운데 테이블에 둘러앉아 웃고 건배하며 협상을 마무리 지었다.
(중략)

몇 분 후, 눈이 돌아가게 아름다운 흑발의 여자가 방에 들어왔다. 어찌나 미인인지 레이시는 평소답지 않게 의기소침해졌다. 레이시는 여신의 등장을 보는 남자들의 반응을 살폈다. 파트리스는 점잔을 빼며 의식하지 않는 척하는 반면, 탤리는 여자의 목과 무릎 사이를 연신 훑었다. 여자는 반 고흐의 수채화를 들여와서 레일 위에 올려놓았다.
“아이바조프스키 그림들은 내려놔요.” 관장이 말했다. “그편이 그 그림들한테도 좋겠어.”
흑발 미인은 양옆의 아이바조프스키 그림들을 바닥에 내려서 반 고흐 구아슈가 숨 쉴 공간을 만들었다. 관장이 탤리를 향해 말했다. “이 그림 아십니까?”
파란 바다 옆 노란 모래 위의 녹색 배를 그린 그림이었다.
길이 46센티미터, 폭이 61센티미터였고, 유리로 덮여 있었다.
“물론 압니다. 하지만 구아슈 기법이 쓰인 줄은 몰랐습니다. 놀랄 만큼 상태가 좋군요.” 탤리는 일어나서 그림을 가까이 관찰했다.
레이시도 가까이 갔다. ‘Vincent’라고 쓴 서명을 보니 반 고흐가 옆에 있는 느낌이었다. 그림은 반 고흐가 종이에서 막 붓을 뗀 것처럼 생생했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480쪽. 홍시.

 


방안의 다섯 사람 사이에 갑작스런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가만히 있고 싶은 욕구가 동시에 모두를 덮친 것처럼 몇 초간 미동 없이 서 있었다. 그리고 몇 초간 다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이것은 파는 물건이 아니었다. 거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 수준을 뛰어넘었다. 반 고흐가 직접 그림을 그들 앞에 놓아준 것 같았다. 그들만을 위해서, 그들만 보라고 있는 것 같았다. 신성한 순간이었다. 이렇게 짧은 조우에도 정이 들었다. 그림이 조용히 앉아 있었다. 모두들 조용했다. 그림이 침묵으로 말을 걸었다. 그 순간에 납득될 수 있는 언어는 침묵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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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체리의 방에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록웰 켄트(미국의 화가 겸 삽화가)가 누군지 알아?” 체리가 물었다.
“조금요.” 레이시가 말했다.

“『모비딕』 삽화를 그린 사람 아닌가요? 화가이기도 하고요.”
“주로 화가지.” 체리가 대꾸했다.

“미국 최고의 화가 축에는 못 들지만, 그림이 워낙 귀해. 켄트는 거장 로버트 헨리(미국의 사실주의 화가)와 인연이 있고, 로렌 해리스(캐나다 풍경 화가들의 그룹인 '그룹 오브 세븐'의 일원) 쪽과도 관계가 있어. ‘그룹 오브 세븐’ 알지? 풍경화가들 말이야. 켄트의 그린란드 풍경화가 유명해. 얼어붙은 피오르드를 배경으로 에스키모인들과 에스키모개들을 깨알처럼 그렸어. 켄트가 살아 있을 때, 그림은 찬사를 받았지만 정작 그림을 사는 사람은 없었어. 켄트가 공산주의 동조자로 몰렸거든. ‘인민’의 친구였다고 할까. 그래서 주요작들을 켄트 본인이 고스란히 가지고 있었어. 그러다 1950년대 러시아 동조자에 대한 탄압이 극에 달했을 때 켄트가 미국에 대한 반발심리로 그림들을 거의 다 러시아에 기증해 버렸어. 정말로 ‘러시아 인민’에게 줘버린 거지. 안 그래도 밉보였는데 제대로 찍혔어. 하지만 40년 전 얘기야. 지금은 켄트의 공산주의 성향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삽화 같은 자잘한 것 말고, 제대로 된 록웰 켄트 그림을 원하는 사람들이 생겼어. 그럼 뭐해. 구할 수가 있어야지. 그런데 정작 켄트에는 관심도 없는 러시아에 큼지막한 켄트 그림이 여든 점이나 잠자고 있단 말이지.”

 

 

 

[록웰 켄트,「11월의 그린란드」, 1932년]


체리는 말을 마치고 서류를 뒤적였다. 나머지 얘기는 레이시가 알아서 파악하라는 듯이. 레이시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레이시는 그 생각을 말했다.
“값이 얼마나 나가는데요?”
“최고작의 경우 40만에서 60만 달러.”
“곱하기 80.” 레이시가 말했다.
“그건 아니지.” 체리가 말했다. “그림들을 시장에 한꺼번에 내놓을 수는 없거든. 그리고 개중에는 수준이 떨어지는 것도 있을 테고. 하지만 알아주는 미술관들에 몇 작품 걸고, 매년 한두 작품씩 시장에 풀면 꾸준한 금맥이 되겠지.”
레이시는 그 금맥을 잡을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다. “우리가 러시아에서 빼내올 순 없어요?”
“그게 바로 우리가 알아봐야 할 일이야. 월요일에 바튼 탤리를 만나 볼래? 그쪽 갤러리에서. 오전 11시쯤.”

 

 

 

 

그림, 돈 그리고 음모

레이시 이야기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480쪽. 홍시

 


레이시에게 그 주 주말은 유난히 길었다. 레이시는 록웰 켄트 회수 작전에 자신이 어떤 식으로 개입하게 될지 못내 궁금했다. 그리고 흥분됐다. 이번 임무는 승진과 연결될 수 있었다. 잘만 하면, 간에 기별도 안 가는 사다리타기식 승진이 아니라, 단걸음에 무대 중심으로 훌쩍 도약할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레이시는 원래 대담무쌍하게 주인공에게 접근하는 스타일이었다. 다만 상대는 레이시가 접근한 게 아니라 자기가 발견했다고 믿었다. 그렇게 믿게 하는 것도 재주였다. 하지만 소더비의 촉수는 불시에 날아들었다. 그 촉수가 약이 될지 병이 될지도 알 수 없었다. 탤리가 체리에게 전화했고 체리는 레이시를 추천했다. 레이시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다. 하지만 어떤 업무에 추천했는지는 미지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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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시는 국립미술관 때와 마찬가지로 허시혼 미술관을 빠른 속도로 훑었다. 머리를 앞뒤로 돌려가며 명작들 앞을 달렸다. 그때 한 작품이 그녀의 발을 붙들었다. 에드 루샤(미국의 팝아트 미술가)의 1967년도 작품으로, 대형캔버스에 불타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을 그린 그림이었다. 그림 속 미술관 주변에는 인적이 없었다. 미술관 건물만 섬뜩한 색조와 또렷한 윤곽을 과시하며  서 있고, 건물 뒤편에서 불길이 일고 있었다. 이 그림은 레이시가 앞서 봤던, 불탄 들판처럼 형체 모를 추상화들과 정반대였다.
추상화는 감성적인 반응을 요했다. 반면 이 그림은 지적인 반응을 요했다. 내가 지금 보는 것이 비극적 이미지인가? 아니면 초현실적 이미지인가? 건물 안에서 벌어지고 있을 아비규환은 전혀 드러나 있지 않았다. 그 부분은 오로지 보는 이의 상상에 기대고 있었다. 건물 안에 사람들이 있기는 한 걸까? 그림 앞에서 이런 질문들을 던지며 생각이 굳어지기를 기다릴 때였다. 갑자기 레이시의 마음이 철커덕 생각을 멈췄다. 질문들이 멈췄다. 잠시 동안 그녀의 뇌가 부글거리는 것을 멈췄다. 레이시는 그림을 그저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불타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에드 루샤, 1968년

 

레이시는 허시혼 미술관 휴대품 보관소로 향하며 손목시계를 흘깃 보았다. 이번에도 애브리 그림이 말썽을 일으켜 시간을 잡아먹으면 큰일이었다. 이제는 정신 차리고 기차시간을 챙겨야 했다. 이번엔 아무 일 없이 무사히 그림을 회수했고, 트루먼이 그녀를 태우고 지체 없이 기차역으로 달렸다.
레이시는 다시 기차로 몇 시간을 달려서 밤 10시에나 아파트에 도착했다. 그림을 여전히 끌고 다니는 신세였다.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스카치위스키 생각이 간절했다. 레이시는 얼음 위에 한 잔 따라서 침대에 드러누웠다. 여름철 나뭇잎에 분산된 가로등 불빛이 방 안으로 들어와 어른어른 움직였다. 레이시의 몸은 알코올이 들어오기도 전부터 술 생각에 반응하다가 술이 혀에 닿기 무섭게 나른해졌다. 살짝 열린 창틈으로 여름 밤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레이시의 시선이 어둑한 방 안을 정처 없이 헤맸다. 위로, 아래로, 꽃병에서 작은 부엌으로, 사진으로, 램프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리고 벽장문으로, 그리고 거기 기대놓은 애브리 그림으로 흘렀다. 그림이 우리 집에 있어. 레이시가 생각했다. 그림은 걸어야 맛이지.
레이시는 그림의 포장을 조심조심 벗겼다. 워싱턴 국립미술관 사람들이 끄를 때보다도 조심해서 끌렀다. 그리고 그림을 벽에 걸었다. 레이시는 서랍장 위의 램프를 가져다가, 그림 앞 낮은 걸상 위에 놓아서 빛이 그림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게 했다. 그런 다음 다시 드러누웠다. 레이시는 보지도 않고 손을 뻗었다. 스카치위스키 잔에 손이 정확히 얹혔다.
(중략)

 

 

 

 

 

레이시 이야기 : 그림, 돈 그리고 음모

스티브 마틴 장편소설, 이재경 옮김.

 


아트비즈니스에 들어온 지 2년이었다. 그동안 레이시가 깨닫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이 순간 레이시는 그게 무엇인지 절실히 깨달았다. 이 예상치 못한 교감의 순간에, 이 짧은 몇 분 동안, 레이시는 사람들이 왜 미술품을 소장하고 싶어 하는지 깨달았다.
레이시는 다시 방을 둘러보았다. 전에는 평범한 사진과 부엌과 꽃병이었던 것들에 지금은 형용사가 붙었다. 애송이의 사진, 애송이의 부엌, 애송이의 꽃병. 반면 애브리 그림은 어른의 물건이었다. 어른의 눈에 위한, 어른의 눈을 위한 것이었다. 이 아파트, 여기 물건들은 순식간에 레이시의 과거가 되었다. 그것들은 퇴장해야 할 것들이었다. 팔아버리거나 상자에 넣어 치워버릴 것들이었다. 레이시는 애브리 그림을 통해 위험한 영약을 맛봤다. 레이시는 애브리 그림처럼 고급스러운 것들, 아름다운 것들을 갖고 싶었다. 어른이 되고 싶었다. 더는 애송이로 살기 싫었다. 이제 레이시에게 필요한 것은 급격히 높아지는 눈을 받쳐줄 돈이었다. 그리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이제껏 흑백으로 나눠져 있던 윤리관을 애매한 회색으로 칠해야 했다. 레이시는 그동안 머릿속에 가설처럼 세웠던 검은 생각을 실행에 옮길 필요를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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