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처음 - 갈피 못 잡는 청춘의 삶에 꽂은 당신의 책갈피 이매진의 시선 20
박범각 지음 / 이매진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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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 우리도 2서버에서 즐겜 한번 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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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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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구요. 제목은 『연애 결핍 시대의 증언』입니다.
첫 작을 냈던 여문책과 다시 한번 호흡을 맞춰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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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미움의 시대. 미움이 집요해진 만큼 사랑이 성실해진 것 같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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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년생으로 이 땅에 태어난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썼습니다. 사랑이 부족한 시대에 관해서 썼고, 청춘에 관해 썼습니다. 아니 이 시대 청춘의 사랑은 불황기 구직과 닮았다고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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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삶의 문턱에 관해서, 살았던 공간에 관해서, 공간에 대한 애착에 관해서, 상처받은 일과 상처입힌 일에 관해서, 대학과 군대와 경쟁에 관해서, 이 땅에 건너와 착실히 삶을 꾸려가는 이방인에 관해서, 포경수술과 세대 구분에 대해서,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삶에 관해서, 그리고 연민에 관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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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습니다. 이 책은 증언이면서 현실이면서 한편으로는 미움의 시대를 꿋꿋하게 살아왔던 제 성장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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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요한 미움의 시대를 살아온 한 사람의 이야기를 쓰는덴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자꾸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쪽으로 유도하는 세상에서 조금 더 불성실해지기 위해 이 책을 썼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쓰면서, 저는 제 자신과 화해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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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증명과 경쟁의 연속으로 힘든 시절을
무작정 거쳐온 당신에게,
책 속의 저는 언제든 친해질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책에 담긴 열두 가지의 에피소드와 함께
두 팔 벌려 당신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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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초반 기세가 중요합니다. 많은 성원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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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열심히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부대 안에서 틈틈 글을 썼는데, 그렇습니다. 제 두 번째 책이 나옵니다. 90년대생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세상을 살아낸 방식, 제가 바라보는 세상을 그린 에세이구요. 여문책과 한 번 더 호흡을 맞추게 되었습니다. 제목은 <연애 결핍의 시대 : 이 시대 청춘의 사랑은 불황기 구직자와 닮았다> 정도로 갈 것 같구요.. 연말에 급하게 마감 칠 일이 생겼네요. 응원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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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평]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 





‘20대 담론’은 소위 ‘88만 원 세대’, ‘아프니까 청춘’, ‘N포 세대’ 등 기성세대에 의해 다양한 이름으로 정의되고 재현되곤 했다. 그런데 유독 하필 90년대생 담론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는 90년대생들이 가정·직장·정치 영역에서 부모인 386세대에 사사건건 도전하고 반발하는 자식 세대로서 등장했기 때문이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뒤따르는 것이 물리 세계의 법칙인데, 정치 담론의 세계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기성세대는 선거에 질 때마다 ‘역사의식’ 내지는 ‘안보의식’이 모자라다며 ‘20대 철부지론’으로 수렴되는 책임 전가형 프레임을 내세웠다. 이에 대한 청년세대의 반발은 늘 어느 정도 있어 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문재인 정권 탄생에 몰표를 주었던 청년세대의 이탈이 가시화되고, 정권과 386 운동권 세대에 적대적인 ‘이대남’이라는 집단의 출현이 최근 치러진 선거에 유의미한 결과를 몰고 왔다. 이로 인해 산발적이던 ‘90년대생 세대론’은 ‘이대남’으로 응축되며 본격적인 관심의 도마에 올랐다.


  강남역 사건 이후 세대를 초월해 여성들을 결집시키며 풍부한 현상 설명의 틀을 가졌던 페미니즘과 달리, 그동안 ‘이대남 현상’은 일시적 현상이거나 돌연변이 식이라는 피상적 분석만 있었을 뿐, 그것에 합당한 설명 틀을 가지지 못했다. 이것이야말로 94년생 청년 작가 임명묵의 『K를 생각한다』가 일약 베스트셀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이 아닐까 한다.


 


■ 386세대의 자아분열을 고발하려고 했으나... 여전히 찜찜한 무언가



  이 책의 부제는 ‘90년대 생은 대한민국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이지만, 이 책은 세대 일반을 다루기보다는 철저히 남성향이다. 여성의 경우는 90년대 생 특유의 ‘커뮤니티 화력전’을 창조하여 전이시킨 아이돌 팬덤 문화를 제외하고, 책에 별다른 언급이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 영역에서는 독보적으로 페미니즘이 세대를 아우르는 설명력을 갖고 있고, 젠더를 담는 것은 이 책의 범위를 벗어난다고 저자 스스로 판단했으리라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저자 임명묵의 주된 비판 대상은 정치경제 엘리트 지위를 차지한 운동권 출신 386세대이자 그들이 만들어 놓은 세계관의 허점이다. 그는 K-방역을 다루는 제2장에서 386식 세계관에 비판의 포문을 열기 시작한다. 민주화를 추종하는 세력의 소망과는 별개로 한국의 코로나19 방역 성공의 비결은 민주적 이념이나 시민의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보다는 권위주의 군사정부가 남겨준 강력한 행정 동원력과 반민주적인 동선 공개 및 추적, 말단 제조업 역량이라는 산업화의 유산이라는 것이다.


  아예 책의 제4장은 통째로 386세대 비판에 할애했는데, 그 요는 ‘90년대 생이 고통받고 있는 이유는 세대 불평등 탓이며, 그 변화의 상당수를 기득권이 된 386세대가 주도하거나 이용한 탓’ 정도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저자가 더욱 집요하게 비판하는 지점은 386세대의 자아분열(책의 표현으로는 이중사고)이다. 즉, ‘평등의 낙원을 꿈꾸며 혁명운동으로 젊음을 바친 386세대가 이제는 선진국의 상류 중산층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으면서도, 기득권이 된 본인 세대의 객관적 위치를 부정하며 아직도 청년기 비주류적 마인드로 투쟁적 사고방식에 머물러 있다’는 점이다.


  저자는 노동시장의 이중구조에 직접 신음하는 90년대생은 386세대의 자아분열을 위선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지적한다. 말하자면 386세대가 태극기 세대를 ‘시대착오’적으로 보았다면, 90년대생은 386세대를 ‘시대 고착’으로 생각한다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필자 또한 90년대생의 한 사람으로서, 386세대의 사회 경제적 위상에 대해 두 세대가 각각 내리는 가치평가가 크게 엇갈린다는 점, 386세대가 공동체의 평등을 추구하는 ‘공적 자아’와 개인의 욕망을 실현시키는 ‘사적 자아’ 사이의 혼란이 존재한다는 분석에 충분히 동의한다. 그러나 여전히 전적인 책임을 어느 한 세대 일반에 지울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따른다.


  사회 양극화와 신자유주의적 흐름은 민주정권이 들어서기 이전부터 진행되어온 흐름이며, 자본소득이 노동 소득을 뛰어넘어 불평등을 고착화시키는 문제는 토마 피케티가 일찍이『21세기 자본』에서 선진국 자본주의의 병폐로 지적한 바 있다. 이중적 노동시장의 형성 또한 재벌 일가와 대기업, 그리고 부동산이라는 한국 사회의 고질적이고 오래도록 해묵은 문제를 빠뜨릴 수 없다. 이것을 논외로 두고 특정 세대 일반의 욕망추구를 지나치게 과장했다는 느낌도 든다.


  한때 운동가가 소시민이 되자 (청년기의 이상을 배반하고) 자기에게 유리한 정권을 세워 지대를 추구하는 듯한 위선의 부각은, 저자의 의도와 다르게 애초부터 그런 구조를 의도적으로 설계하고 활용했다는 인상으로 흐르기 쉽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자칫하면 ‘386 원죄론’으로 쉽사리 환원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 또한 90년대생 역시 지금은 공정을 부르짖지만 언제든 불공정의 유혹과 특권 활용을 서슴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결국에 이는 서 있는 위치에 따라 이익 추구의 방법이 달라질 뿐이라는 주장으로 귀결될 뿐이라, 세대론의 독특성에서 출발하여 황급히 일반론으로 빠져나가는 듯한 인상을 주어, 책이 제시한 분석과 진단 프레임이 갖는 논리적 정합성에 비해 다소 아쉬운 부분이다.




■ 하층의 세계화에 대한 한국식 포용


  이 책에서 가장 살아있는 부분을 꼽자면, 아마도 한국식 다문화와 이주노동자 문제를 다룬 제3장일 것이다. 저자는 어머니가 운영하는 조치원 김밥 가게를 배경으로, 직접 여러 외국인 노동자를 마주하여 얻은 경험이 생생하게 녹아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터넷상에서 난무하는 난민에 대한 혐오 발언의 정도에 비해, 실제 한국에서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차별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고 주장한다.


  추정컨대 이촌향도로 인해 일손이 귀한 시골에서 관념적 혐오보다는 경제적 필요가 크게 작용해 외노자에 대한 차별이 상쇄되고 있다는 측면인 듯하다. 저자의 취재에 따르면 작업에 대한 특별한 교육 없이 고강도로 생산성을 재촉하는 한국적 노동 문화가 힘든 것은 사실이며, 이에 적응하지 못해 상처받고 탈락하는 외노자들도 물론 다수 존재한다.


  그러나 육체노동에 종사하는 현장의 한국 사람들은 일만 잘하면 국적은 관계없이 ‘쳐주는’ 경향이 일반적이며, 언어장벽을 넘어서고 한국식 눈치 문화에 ‘빠릿하게’ 적응한 외국인들은 현지인만큼 ‘짬 대우’를 받아 작업반장 자리에 오르기도 한다고 말한다. 오히려 현장에서는 능력을 인정받은 외노자가 현지인을 지휘하는 ‘역전된’ 케이스도 존재한다고 소개한다.


  물론 살아남은 이들의 주관적 경험을 모아 객관적으로 외노자에 대한 차별이 없다고 단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저자가 주장하는 의도는 도시 중산층이 외면한 지방 3D 업종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층의 세계화’ 속에서는 나름대로 ‘능력주의의 순기능’이 작용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코리안 드림’을 이루는 경우가 상당하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즉, 능력을 매개로 하는 한국적 다문화는 꽤나 포용적 측면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 글쎄, 과연 K-능력주의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그러나 한국적 다문화에서 ‘쓸모있는 외국인은 한국에 포용된다’던 저자의 논리는 교육 파트에 들어서자 ‘쓸모를 찾지 못한 한국인을 그대로 배제된다’라는 전도 논리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동시에 저자는 외노자에 대해서는 온라인상의 혐오에 비해 현실이 덜하다고 말하면서도, 오히려 자국민인 90년대생은 유독 오프라인보다 온라인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주장이 대상에 따라 각각 다르게 적용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인데, 그것이 나와 있지 않다는 것도 책을 읽을 때 상기할만한 지점이다.



  1장의 ‘90년대생은 누구인가’에 따르면 90년대생은 전반적으로 ‘탈 가치화’된 정보화 세대다. SNS를 통한 끊임없는 비교에 노출되는 인정투쟁 속에서 극심한 피로를 느끼는 상태다. 90년대생은 주로 익숙한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여론을 형성하고 불만을 분출하고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세계화로 인해 노동시장이 극단적으로 분화되자 양질의 취업 문이 급격히 좁아진 반면, 대학은 취업에 필요한 적절한 지식을 제공하지 못했다. 그로 인해 구직으로 인한 좌절의 기간이 대폭 늘어난 것은 물론, 격렬한 경쟁 끝에 얻은 학벌이 취업시장에서 능력을 보여주는 주요한 수단으로서 지위를 잃어가고 있다고 진단한다.


  위와 같은 진단은 결국 원활하게 능력주의를 펼칠 공간은 ‘표준화된 시험’ 영역밖에 남지 않는다는 결론을 도출한다. 즉, 정보화 시대에 발맞춰 독창적 콘텐츠를 생산할 창의력이 없는 다수에게는 계층 상승을 위해서 유일하게 주어진 길은 오직 ‘공직 시험’만이 남는다. 따라서 ‘공정’이라는 가치는 90년대생에게 그 자체로 생존과 취업에 필수적인 토대이자, 건드려서는 안 되는 정치적 ‘뇌관’이 되는 셈이다.


  이러한 흐름을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해법이 ‘능력주의의 제대로 된 작동’임이 은근하게 드러난다. 따라서 마지막 장은 논리적으로 계층 상승의 기초 사다리인 입시일 수밖에 없다. 저자는 단호한 어조로 한국 교육은 능력주의를 표방하면서도 그 작동을 방해하는 자기 기만적이고 분열적 시스템이라 진단한다.


  즉, 386세대가 주도한 공교육이 표방하는 ‘겉의 가치’는 ‘좋은 말의 향연’에 불과하며, 명문대에 진학하고자 하는 학부모·학생들의 ‘속의 욕망’과 어긋나기 때문에, 무수히 많은 제도가 들어선들 본질적으로 제대로 된 효험을 낼 수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속의 욕망’을 겉으로 드러내 인정하는 쪽으로 유도하여, 제대로 된 능력주의를 구현한다면 학벌과 세대의 지대추구를 막을 수 있다는 쪽으로 귀결하는 듯 보인다.


  공교육의 표리부동이 낳은 저효율에 관한 문제의식에는 동의할 수 있더라도, 능력주의를 그대로 드러내 서열화를 양성화했을 때의 경각심은 부족한 듯 보인다. 학벌의 좁은 사다리마저도 특정 계층과 좋은 학군의 학생들이 독식하고 있으며, 사다리 바깥에는 ‘지잡대’로 추락한 이들이 영영 저자가 말한 하층의 노동시장에 그대로 갇혀서 나오지 못하는 실정이다. 한국사회에서 능력주의는 필연적으로 학벌주의와 연동되어 작동될 수밖에 없다. 욕망을 무차별적으로 내버려둘 경우 학벌을 통한 지대추구는 오히려 공고해질 것이다.


  또한 사회 양극화와 대물림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그 속도를 늦추는 작업도 꽤나 의미 있는 일이다. 극단적으로 벌어지는 사회의 간극을 줄이려는 모든 노력은 다 무의미하고 무용한가. 저자는 위선마저 포기했을 때 벌어질 일들을 예상하지 못하는 듯하다. 무비판적으로 시장에 모든 걸 맡기면 알아서 잘 된다는 자유방임 논리의 아류로 흐르는 듯하다. 무의미와 무용의 레토릭에 90년대 청년의 시각이 녹아있느니 다소 어울리지 않은 부분도 느껴진다.




■ 90년대생의 초라한 자화상



 동 세대 청년작가의 혜안과 탁견에 감탄하면서도 위선에 대한 반감과 역설의 지나친 강조로 한 세대의 자기기만에 너무 천착한 나머지, 결론에서 급격히 무게중심을 잃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 안에서 90년대생은 쪼그라든 자화상만을 갖기 때문이다.


  임명묵 작가가 그린 청년의 모습에는 공동체를 고민하는 공적 자아가 느껴지지 않는다. 현실보다 주로 온라인에 서식하며 능력에 따른 서열화를 좋아하면서도 거기서 좌절된 욕구를 분출하는 청년 남성의 얼굴이 보인다. 이것은 현재 우리 세대의 상태에 대한 어느 정도 객관적인 묘사를 담고 있지만, 그것이 그렇게 머물러있어도 되는지에 대한 고민을 낳는다.


  청년 세대의 자아 축소는 심각한 문제다. 공적자아를 형성할 기회가 부족한 청년의 삶에 대해 세상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청년의 불만을 정치권의 양지로 수렴하는 방안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공적 자아 없는 청년의 욕망은 결국에 냉소로 흐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민낯을 보여주는 것만큼 중요한 작업은 미래에 우리가 풍부한 표정을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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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기억
류주연 지음 / 채륜서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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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은 한 사람의 인생을 읽어내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내 안의 상처를 치유 받는 때가 있다. 나에게는 이 책은 치유의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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