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지옥의 전쟁, 그리고 반성의 기록, 개정증보판 서해문집 오래된책방 2
유성룡 지음, 김흥식 옮김 / 서해문집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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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발굴단


         본 코너에서는 제가 읽은 책에서 발견한 좋은 문장들을 기록합니다.

왜 선정했는지 뭐가 좋았는지에 관한 제 의견이나 코멘트를 따로 덧붙이지 않고,

단순하게 기록에만 집중합니다. 제가 추려낸 부분이 도움이 되었길 바랍니다.





당시 나라는 평화로웠다. 조정과 백성 모두가 편안하던 까닭에 노역에 동원된 백성들은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와 동년배인 전 전적典籍 이로李魯도 내게 글을 보내왔다.


이 태평한 시대에 성을 쌓다니 무슨 당치 않은 일이오?’

그러곤 조정의 일에 불만을 늘어 놓았다.


삼가 지방만 보더라도 앞에 정진 나루터가 가로막고 있소. 어떻게 왜적이 그곳을 뛰어넘는단 말이오. 그런데도 무조건 성을 쌓는다고 백성을 괴롭히니 참으로 답답하오.’


아니 넓디넓은 바다를 사이에 두고도 막지 못한 왜적을 이까짓 한 줄기 냇물로 막을 수 있다니 내가 더 답답했다. 당시 사람들의 의견이 한결같이 이러했고 홍문관弘文館 또한 그런 의견을 내놓았다. pp.37-38



"가까운 시일 내에 큰 변이 일어날 것 같소. 그렇게 되면 그대가 군사를 맡아야 할 터인데, 그래 적을 충분히 막아 낼 자신이 있소?"


신립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그까짓 것 걱정할 것 없소이다."


내가 다시 말했다.


"그렇지가 않습니다. 과거에 왜군은 짧은 무기들만 가지고 있었소. 그러나 지금은 조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만히 볼 상대가 아닌 것 같소."


그러나 신립은 끝까지 태연한 말투로 대꾸했다.


"아, 그 조총이란 것이 쏠 때마다 맞는답디까?"


pp.45-46


당시 요동에서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략했다는 말을 얼마 전에 들었다. 그런데 다시 임금이 한양을 버리고 서쪽으로 피란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더니, 이윽고 왜적이 평양까지 닿았다는 소식을 접하자 의심을 품기까지 했다. 아무리 왜적이 강하다 하더라도 이렇게 빨리 올라올 수는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조선이 왜구의 앞잡이가 되어 이끌고 온다"라고도 했다. p.97



또 순찰사 정언신이 그에게 녹둔도의 둔전 방어를 맡겼을 때의 일이다. 안개가 자욱한 어느 날, 군사들은 모두 나가 곡식을 거두고 있었고, 진영에는 불과 수십 명만이 남아 있었다. 그때 갑자기 적 기병의 급습을 받았다. 이순신은 급히 진영의 문을 닫고 유엽전을 쏴 수십 명의 적을 말에서 떨어뜨렸다. 그러자 적들이 놀라 모두 달아나기 시작했다. (…) 이외에도 이순신이 세운 공은 참으로 많았다. 그러나 누구도 그를 추천하지 않았다. 과거에 급제한 지 10여 년 만에 겨우 정읍 현감에 올랐을 뿐이었다. p.40 (역자주 : 사건의 결과 이순신은 북병사 이일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 했다. 경비를 소홀히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이순신이 강력히 항의하자 조정에서는 이순신을 파직하고 백의종군하도록 명령했다.)




결국 조정에서는 의금부도사를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하고 대신 원균을 통제사에 임명했다. 

  그러나 임금께서 이 내용이 모두 진실인지 의문을 품으시고 성균관 사성 남이신을 한산도에 파견, 사실을 조사해 오라고 했다. 그가 전라도 땅에 닿자 병사와 백성 모두 나와 길을 막고 이순신이 무고하게 잡혀갔다고 호소했다. 그러나 남이신 또한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다. p.194





"그는 명장이오니 죽여서는 안 되옵니다. 군사상 문제는 다른 사람이 판단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 또한 짐작하는 바가 있어 나가 싸우지 않은 것이라 생각됩니다. 바라건대 너그러이 용서해서 후에 대비토록 하십시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을 한 다음 사형을 감형하고 삭탈관직만 시켰다. 이순신의 노모는 아산에 살았는데 그가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는 고통스러워하다 목숨을 잃고 말았다. p.195 


그러자 진린은 임금께 이런 글을 올렸다.

'통제사는 천하를 다스릴 만한 인재요, 하늘의 어려움을 능히 극복해 낼 공이 있습니다.'

이런 글을 쓴 것은 그가 마음으로부터 감복했기 때문이다. p.213


화살이 빗발치는 속에서도 이순신은 직접 나서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알에 맞고 말았다. 총알은 가슴을 관통하고 등 뒤로 빠져나갔다. 주위 사람들이 그를 부축해 장막 안으로 옮겨 놓자 그는, "지금 싸움이 급한 상태다. 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리지 말라" 하고는 숨을 거두었다. p.217


이순신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사들은 각 진영에서 통곡을 그치지 않았는데, 마치 자기 부모가 세상을 떠난 듯 슬퍼했다. 그의 영구 행렬이 지나는 곳에서는 모든 백성이 길가에 나와 제사를 지내면서 울부짖었다. p.218


그는 말과 웃음이 적었고, 용모는 단정했으며 항상 마음과 몸을 닦아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속으로는 담력과 용기가 뛰어났으며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행동 또한 평소 그의 뜻이 드러난 것이었다.(…)그는 뛰어난 재주에도 불구하고 운이 부족해 100가지 경륜을 하나도 제대로 펴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p.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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