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 존슨의 <모던 타임즈 I,II>를 졸꾸하게 빡독하여 완독했다. 한 대가의 조예가 무엇인지를 명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1. 폴 존슨은 전향한 사회주의자다. 보수주의자면서 자유시장주의적 입장에서 극단적 이념의 시대, 그로 말미암은 열전과 냉전의 시대를 그렸다. 물론 보수적인 그의 사관이 다소 진보적이고 좌파에 호의적인 나와는 맞지 않은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선명성을 입증하기 위해 반대 진영에 악랄한 저주를 퍼붓거나 비열한 공격을 가하기보다는 역사가로서, 또 저술가로서의 본분을 잃지 않고 부드럽고 재치있게 역사를 정리했다. 정체성 정치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 시대에 꽤나 귀감이 되는 태도라 할 수 있다. 충만한 정의감의 발산 보다 차분한 비판을 기다리는 태도 말이다.

 

 

2. 니체가 신의 죽음을 선고하고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입증함에 따라, 인류는 도덕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게 되었다. 이른바 상대주의의 시대, 절대적인 도덕이 사멸하고 인간의 책임은 갈피를 잃었다. 인간은 무엇이 옳고 그른지, 무엇이 좋고 나쁜지 판단할 줏대를 상실했다. 상대주의의 시대는 상실의 시대였다.

 

그 결과 인간은 종교 대신 이데올로기에 의존하게 되었다. 유발 하라리의 지적처럼 인간에게 기독교나 공산주의는 같은 역할을 맡는 일종의 믿음 체계였다. 아니 이데올로기는 현대의 종교였다. 열전과 냉전은 현대판 종교 전쟁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신과 교회 대신, 이념과 정치에 열광했다. 이념에 따라 현실을 개조하고 싶은 욕구를 숨기지 못했다. 그것은 사회공학이라는 지적인 오만이었고, 오만의 결과 열광을 제어하지 못한 인류는 나치즘, 파시즘, 군국주의, 스탈린주의 따위의 전체주의 괴물을 만들어냈다. 

 

사회공학이 낳은 이념의 프랑켄슈타인은 세계대전을 일으켰고, 냉전시대를 야기했으며, 탈냉전시대 제 3세계 국가의 독재자들을 잉태했다. 후쿠야마의 말대로 역사가 끝났는지는 모르겠으나, 폴 존슨은 이제 막 인류가 사회공학의 괴물에게서 벗어나 다시 자유를 회복한 상태라 말하며 책을 끝낸다.

 

3. 16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을 읽으면서도 단 한 번도 지루하거나 난삽하다는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그의 글에는 사람을 빨아들이는 묘미가 있었다. 번역자가 실력이 좋은 덕인지, 원문이 좋았던 것인지는 추후 원서를 재독하면서 파악해 보기로 하겠다.

 

확실한 것은 그의 번뜩이는 통찰력과 문장력, 사상과 역사의 흐름을 하나의 큰 줄기로 모아내는 능력은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배울 점이 많은 책이었다. 폴 존슨은 기억해둘만한 사건과 이야기들을 자기가 잡은 역사의 큰 가닥에 덧붙여 전개하면서도, 소위 문돌이들이 취약점인 과학, 철학, 예술도 빠짐없이 정리해낸다.

 

4.

오랜만에 읽으면서 머리에 스파크가 튀는 책을 만났다. 독자를 추종의 길로 이끌기보다는 읽는 이에게 지적인 자극을 주는 책이었다. 왼쪽 심장이 타오르는 청년에게 꽤나 당혹감을 안겨주는, 공부하는 보수의 지적인 결실물이라 할 수 있겠다. 니체와 다윈, 프로이트, 그리고 김학준의 러시아 혁명사를 새로 봐야겠다는 감정이 완독의 만족감과 함께 떠오른다. 이만하면 방학에 떠난 해외 여행치고 괜찮은 여행이었다.

 

 

덧붙이는 말

 

최근 학위논문 일정과 출판원고 마감으로 인해 알라딘 서재/북플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오랜만에 간략한 서평으로 인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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