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서와 금서 사이에서





쟁의 전장에서 원치 않게 지적 보증을 서야하는 억울한 책들이 다. 보통 이 책들은 이념 진영의 성서(Bible)로 불리는 데, 그 유명세와는 달리 제대로 읽은 사람이 드물다. 대표적으로 칼 마르크스와 프리드리히 엥겔스의『공산당 선언』이 그렇고,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쓰고 밀턴 프리드먼이 나중에 출판 50주년 기념 서문을 덧붙인 이 책『노예의 길』또한 그에 못지않은 악명(惡名)을 가졌다. 단순히 한 권의 책을 넘어서 방대한 세계관과 심오한 의미로 좌우 사상적 영토를 담았다지만, 세간에 오르내리는 건 오직 그 이름뿐이다.


왼손잡이와 오른손잡이는 다투지 않지만, 좌파와 우파는 늘 다툰다. 좌뇌와 우뇌는 각자의 영역을 도맡아 하나의 육신을 협력하여 다스리지만, 보수와 진보는 하나의 국가에 화해할 수 없는 세계관을 주입하기 위해 사사건건 다툰다. 이데올로기란 흡사 종교와 비슷한 속성을 가졌다. 그래서 종종 철학의 양극단은 서로의 성경에 사기죄의 혐의를 덧씌우곤 한다. 서로가 서로의 확신범이다. 양분되는 이념의 지형에서 빈번히 전투가 벌어진다.



2. 저기, 읽고 싸웁니까?



민주사회에서는 총칼대신 말글로 싸운다. 언어의 격투장에서는 뼈대가 부실한 의견은 도태되고 굳건한 의견은 채택된다. 완력의 전쟁이 아닌 지성의 논쟁에서는 자신의 주장을 논리정연하게 보일 지적 성실성을 요구받는다. 제대로 된 독해와 경청하는 자세. 사실검증과 충분한 논증, 숙고와 소화과정을 통해 나만의 정제된 의견을 표출할 지적 노동이 필요하다. 그렇게 해야만 경쟁과정에서 의견들이 더욱 세련되고 단련될 뿐만 아니라 그 수준이 고양되는 효과가 있다.


문제는 그 책을 믿는다고 자부하는 이들이 정작 그 책을 읽지 않고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는 논쟁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분명 누구에게나 표현의 자유는 동등히 보장되지만, 그 표현의 수준과 질이 동등한 것은 아니다. 반드시 논쟁에는 승부가 있다. 그러나 이들은 책의 명성, 저자의 권위로 상대방의 정당한 의견을 묵살하는 '논쟁의 불로소득'을 누리며 '성전'에 임한다. 책에는 잘못이 없다. 책의 그 이름값이 실추되는 것은 종이에 적힌 내용보다는 추종자들의 무지의 소산일 가능성이 크다. 명성에 호소하는 논증방식이 이념의 십자군을 낳는 게다.





3. 『노예의 길』의 노예가 된 사람들




하이에크는 이 책에서 무수한 철학적 시사점을 던지고 있다. 자연력을 최대한 쉽게 끌어 내는 시장 메카니즘과 경쟁의 원리, 인간의 인지능력의 한계와 계획의 불가능성,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양립불가능성 계획경제의 전체주의로의 경로의존성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진보적 성향에 가까운 필자가 '불온도서'『노예의 길』 을 읽고난 단상은 하이에크의 위험하지만 탄탄한 논지가 아닌, 하이에크를 받아들이는 어떤 세태에 관한 의구심이었다.


사상의 독재를 경계했던 하이에크와 노예가 되지 말라고 쓴 『노예의 길』이 정작 수많은 이념의 노예를 낳았다는 것을 그는 알까? 그의 책 노예의 길이 정작 또 다른 차원의 노예를 자처하는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게 되는 것을 그는 알까? 정작 이념의 십자군들은 책의 가르침과 반대로 살고 있을 확률이 높다. 책의 복음을 전파하겠다며 앞장서는 이들이 외려 책을 펼쳐보는 것조차 하지 않았다니 정말 아이러니 한 일이다. 상대방의 책은 물론, 자신들의 책마저 제대로 읽지 않았다. 생산적인 논쟁이 이뤄질 수 있을까?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끼리 도무지 말이 될 리가 없다. 이것이 지적 노동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정말 그 책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는지, 그런 말을 했다면 제 맥락에 맞게 말뜻을 전달한 건지 확인하고 변명할 기회를 누군가는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사실 나는 이 말 한마디를 던지기 위해 오늘도 피곤한 독서를 자처한다. "이념적으로 가장 편협한 자들이야말로 실은 지적으로 가장 게으른 자들이다."


-2018.04.13 @PrismMaker

※ 본 페이퍼의 저작권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