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계단 -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밀리언셀러 클럽 29
다카노 가즈아키 지음 / 황금가지 / 2005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길을 가다 떡 하니 몇 사람이 일렬 횡대로 길을 가로막고 있는 걸 볼 때면, 복잡한 지하철에서 무감하게 서로를 치고, 버스나 지하철 할 것 없이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있는 남정네들을 볼 때면, 더군다나 조금 불쾌한 기색에 찰싹 달라붙어 옆으로 다리를 오므리려고 해도 아무 생각 없이 그러고 있는 걸 볼 때면, 분명 내리는 사람이 내리고 나서 타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리는 쪽으로 쳐들어오는 사람들을 볼 때면,

아이구 저 인간들을 어쩌나, 혹은 저 사람들이 무슨 죄겠어, 잘못 가르친 이 사회가 잘못이지, 그걸 용인해 온 오래된 관습이 문제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 않고 세상을 떠들썩하게 하는 사건들을 보면, 쳐죽일 놈들, 하는 생각이 불쑥불쑥 고개를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기에 쉽게, '죄는 미워하되 사람을 미워할 수는 없다' 혹은 '사형인의 죄가 옳다는 것이 아니라, 사형제도만큼은 폐지하자!'는 의견에 동조하다가도, 세상 살아가다 보면 어느덧 좀 강력한 응징이 있어야 사람들이 세상 무서운 줄 알게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사실이다.

<13계단>을 읽은 지금도, 사형제도를 폐지해야 하는가, 극악한 범죄(로 보이는 것까지 포함)는 어떻게 막을 수 있는 걸까, 혹은 원인이 어떻든 끔찍한 사고(상해)를 당한 피해자 본인과 가족에 대한 보상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에 대한 명확한 주장을 펼치지기는 어렵다.
그만큼 하나의 끔찍한 사건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연루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13계단>은 특이하게도, 교도관과 보호관찰대상자(일전에 범죄를 저지르고 가석방된)를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그들이 사형까지 3개월밖에 남지 않은 또 다른 인물의 무죄를 증명하게 한다.
그리고 밝혀지는 진실들은, 약간의 반전을 포함해서 가슴을 저리게 한다. 단지 독자들을 놀래키거나, 교묘하게 사건을 꼬거나, 트릭을 이용하지 않고, 정직하게, 그리고 진지하게 사건에 얽힌 다양한 맥락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면서 이야기를 풀어 나가는 것이다.

가장 명확한 것은, 사형'제도'라는 것이 결국에는 사람이 하는 일이기에, 특히나 정치인들이 끼어 있는 일이기에, 말 그대로 공정할 수 없다는 것, 그 적나라한 헛점을 드러낸다는 점만으로도 이 작품은 의미가 크다.
가끔 CSI를 볼 때도 느끼는 것이지만, 세상에는 결국 사연 없는 무덤이 없고, 이유 없는 결과는 별로 없다. 다 할 말이 있는 것, 그 할 말을 종합하여 판단하는 것 역시 사람의 몫.
그러기에 법전만 외운다고 모든 게 이뤄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앞서 봤던 <손님은 왕이다>도 그렇지만, 이 작품 역시 추리소설이라는 장르의 공식에 기본적으로 충실하면서도, 한발 나아가 등장인물들의 개연성, 사람과 사람의 얽힘, 사건과 사건의 얽힘,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적 합의와 제도를 잘 엮어냈다고 할 수 있다.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추리소설이기에, 단지 캐릭터들이 멋지거나 개성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간적인 고뇌와 노력, 그리고 어찌할 수 없음을 잘 보여 주고 있기에 꽤 괜찮은 장르소설로 탈바꿈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미스틱 리버>와 함께, 인간에 대해, 그 운명에 대해, 살인에 대해, 제도에 대해 한번쯤 깊게 생각해 보게 해 준 썩 괜찮은 작품이다!

(그 복작거리는 지하철역에서 어느 날인가 계단을 오르던 한 여자의 손에 <블랙 다알리아>를 봤다. 드 팔머 감독이 영화한다고 어디선가 들은 거 같았는데, 우리나라에도 나왔구나 생각했는데, 알라딘 등을 보니 절판이다. 헹... 어찌 찾아 볼 수 있을까? 지하철, 좋은 정보도 가끔 주고, 재밌는 인간군상도 많이 볼 수 있고, 그나마 젤 편한 교통수단인데...... 참 알 수 없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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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트너 SE (3disc) - 할인행사
피터 잭슨 감독, 마이클 J. 폭스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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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 마지막 상영작이었다.
이 영화 역시 앞서 본 <와일드 번치>처럼 초반부에는, 피터 잭슨 왜 이러시나? 하는 느낌을 가졌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역시 피터 잭슨! 할 수밖에 없었다.
초반 영화는 피터 잭슨의 장기인 B급 코믹 호러로 시종일관 흘러가는 줄 알았고, 그러기에는 그의 유머가 별로 느껴지지 않아 서운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중반 이후로 흘러가면서 영화는 제대로 된 호러와 연쇄 살인마 이야기, 그리고 코믹이 제대로 버무려지면서, 쑥쑥 빨려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마이클 J. 폭스의 연기 훌륭했고, <캐리> 이후 제대로 된 음습한 여자 캐릭터를 만난 걸 큰 수확으로 꼽겠다.
솔직히 지금 봐도 손색 없는 웨타의 CG 기술은 영화를 제대로 된 귀신 영화로 만들어 줬으며(한 대로 시작한 웨타의 컴터가 수십대로 늘어나면서, 그걸 어떻게 써먹야지 하는 고민 끝에 나온 게 <반지의 제왕>이라며 피터 잭슨은 이야기한다.), 오프닝부터 대번에 알아챌 수 있는 대니 앨프먼의 사운드트랙 역시 영화와 딱 맞아떨어진다.
약간 깜짝 놀라는 호러 씬들이 있기는 하지만 딱 한두 군데 정도고, 초반부의 코믹, 중반부의 드라마, 후반부의 스릴러는 적절한 재료와 양념이 섞인 비빔밥이라고 할 수 있다.
전체 3장의 디스크로 이뤄졌는데, 나머지 2장의 서플먼트에는 또 어떤 얘기가 담겨 있을지...
드디어 슬슬 피터 잭슨 콜렉션이 완성돼 가고 있다.
이제 <천상의 피조물>과 <Meet the Feebles> <데드 얼라이브>를 채워 넣으면 되겠다. 아, 그 전설의 <포가튼 실버>도 있군...
생각난 김에... 팀 버튼 컬렉션도 구축해야겠는데, 이 양반 작품들은 나오긴 나왔지만 더 엉망으로 제작된 게 많아서 좀 걱정이다.
하여간, 지름신은 좀 재워 두고, 제대로 제작된 놈들 나올 때까지 느긋하게 기다려 봐야겠다.
ㅋㅋ, 괜시리 기분 좋다.

다음 주에는 좀 차분한 영화들 관람을 해 볼 요량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른 오늘, 내일 마감을 해서 마음 편히 한 주를 보내야지...
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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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일드 번치 SE 골든 라벨 한정판 (2disc)
샘 페킨파 감독, 윌리엄 홀덴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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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영화가 시작되고 40여 분 지날 때까지는, 그래, 역시 고전은 고전이지 뭐. 도대체 오승욱, 류승완 등은 왜 그렇게 난리였던 거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건 오해였다.
아, 단순히 폭력의 미학이니, 어떤 것을 갖다 붙이는 걸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그야말로 '샘 페킨파'의 영화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영화다.
그러고 다시 얼핏 얼핏 코멘터리를 보면서 다시 되돌려 보니, 영화 전체가 꽉 짜여진 한 편의 서사시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본과 독재, 무정부주의,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한 딜레마를 가득 안겨 주는 고전적인 비극의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다.
도대체 돈이 뭐길래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인지,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길래 저렇게 다른 사람을 짓밟는 건지, 도대체 누굴 악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건지, 도대체 누군 죽여도 되고 누군 죽이면 안 되는 건지, 그리하여, 인간은 나는 누구인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초반 그저 그런 서부극으로 출발하여, 강탈 영화의 면모를 띠다가, 비극적인 반영웅담으로 마무리짓는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거니와
누구나 다 이야기하는 액션 씨퀀스는 한순간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연출력의 정점이다.
훌륭한 배우들, 더없이 훌륭한 화면, 그리고 이야기, 최고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를 보고 나니 <관계의 종말 pat garret and billy the kid>가 너무나 다시 보고 싶다.
예전에 비디오로만 봤는데, 다시 골든 라벨로 출시되어 만날 수 있으면 너무 좋겠다.
이 영화만큼 훌륭하게 knocking on heaven's door와 만난 영화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갯어웨이> 역시 얼른 다시 봐야겠다.
샘 페킨파, 엄청 찍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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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 리딕 한정판
피터 정 감독, 빈 디젤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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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필요없다.
피터 정의 <애니 리딕>은 <에이리언 2020>과 <리딕>을 잇는 브릿지 같은 역할이라고 서플은 이야기하지만,
이건 그냥 피터 정의 <애니 리딕>일 뿐이다.
역시 짧은 애니메이션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게 중심이 되는 하나의 이야기를 긴장감 있게 잘 묘사하고 있다.
리딕의 액션은 보는 것 이외에 설명할 방법이 없고
독특한 캐릭터 디자인은 왜 '피터 정! 피터 정!' 외쳐대는지를 잘 보여 준다.
서플먼트도 꽤 알차고 좋다.
특히 피터 정의 인터뷰는 꽤 진지하고 새겨들을 만하다.

이 애니를 보고나서 드는 느낌 하나
<이온 플럭스> 박스세트는 왜 안 나오는 거야?
쭉 안 나올 계획이라면, 어쩔 수 없이 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내 잘못이 아니라, 제작사들의 잘못임을 나는 미리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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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스, 안달루시아의 여름(1disc) - 아웃케이스 없음
코우사카 키타로 감독 / 프리미어 엔터테인먼트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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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라, 이런 애니메이션도 있구나.
50분 안쪽의 중편 애니메이션이지만, 길이의 미학을 잘 살린 작품이다.
길이 때문에 너무 함축적으로 이야기를 풀어 가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를 하다 만 느낌이 드는 것도 아니다.
세계 3대 자전거 레이스 대회 중 하나라는 스페인 벨타 아 에스파냐(Vuelta a Espana)의 한 코스(영화에서는 이걸 뭐라고 하던데... 하여간, 긴 레이스 중 하루 정도 소화하는 코스다)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이야기는, 그 중간중간에 그의 형, 그리고 전 애인이었던 여자와 형의 결혼, 동네 사람들의 이야기를 교차시키면서, 단지 아름다운 풍광이 아니라, 헉헉대는 레이스와 풍경, 그리고 이를 응원하는 가족과 동네 사람들을 보여 준다.
어쩌면 고향의 그리움을 얘기하는 단순한 주제로 볼 수도 있지만, 지친 레이스 중 보여지는 마을의 풍경, 경기가 끝난 후 바라본 노을진 하늘, 교차되는 과거 등은 '한낮의 현재'와 그를 관통하는 이땅의 인생을 잘 보여 주면서, 묘한 여운을 남긴다.
아, 애니메이션이란 물론 이야기 구조가 중요하고, 이 작품 역시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를 지닌 애니메이션이지만, 무엇보다도 그 이야기 구조가 살 수 있었던 것은 과장하지 않고 담담하게 이끌어가는 그림이 아닐까 싶다.
압도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바로 우리가 살았던 땅의 이야기처럼 보여지는 그림들은 낯익으면서도 따뜻하기에 천천히 그러나 얕지 않게 가슴 속에 칠을 한다.
또한 헉헉대는 레이스 장면은 이야기를 잘 끌어주고, 마지막 결승 지점에서 폭주하는 스케치들, 흔들리는 얼굴의 배치는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안 보면 후회했을, 꽤 괜찮은 애니메이션이다.
그리고, 짧은 서플먼트 중 성우들의 인터뷰가 있는데, 포복절도할 만담이다, ㅋㅋㅋ
여기서 '나스'는 가지의 일본말이며, 이 애니는 '나스'라는 작품집에 들어 있는 세 개의 이야기 중 하나라고 한다.

그러고 보니, 박흥용의 <내 파란 세이버>는 만화 혹은 영화로 만들어질 생각을 안 한다. 잉, 두 가지 모두 다 훌륭하게 나올 수 있는 작품 같은데... 누구 없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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