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수와 바다 이야기
마르틴 발저 외 지음, 크빈트 부흐홀츠 그림, 조원규 옮김 / 민음사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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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일종의 편견을 갖고 있었다. 그림과 글이 일대일로 같이 있는 책에서 공간을 함께하는 그림과 글은 서로를 설명하고 있다는 생각 말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편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처음에는 그림과 글을 연관지어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만 삼분의 일 정도 보다보니 그런 생각이 무모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글과 그림이 서로 독립적으로 전개되면서 서로 완전히 어긋나지는 않기. 어쩌다가 우연히 글과 그림에서 서로 통하는 면을 발견했을 때는 인연이란 말이 떠오르면서 반가운 느낌이 들기도 했다.

이 책에는 삶의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경험하는 다양한 감정들, 갈등들, 교감들. 나와 내가 포함되어 있는 세상의 순간들과 거기에서 갖게 되는 다양한 생각들. 따라서 어떤 글들은 이해할 수 있고, 어떤 글들은 이해할 수 없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내 맘을 쏙 빼놓지는 않지만 현실이면서도 온전한 현실은 아닌 그림들은 아름답기까지 해서 보기에 좋았다. 반면에 글은 너무 사적이란 느낌이 들어서 내게 낯설었다. 하지만 사적이란 점은 어떤 이에게는 더할나위 없이 좋은 것이 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 어떤 이는 내가 될 수도 있다. 현재의 나와 앞으로의 나는 완전히 동질한 존재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고요함과 소박함으로 채워져 어찌보면 나른해지기까지 하는 이 책은 혼자만의 시간을 소중히 가꿔나갈 사람들에게는 좋은 선택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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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마야 스토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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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목마르다.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군가 그 물음에 답해준다면 난 '그건 내가 아닌데요'라고 반박할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쓸만한 도우미를 찾기가 어렵다. 혼자서 겹겹이 쳐있는 껍데기를 벗고 알맹이 나와 조우하는 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닐까?

언제부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난 여성들에 관해 써 놓은 책들을 읽어왔다. 난 그 책들을 샘물처럼 느꼈다. 너무나 시원했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각종 부조리 혹은 허위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난 희열을 느꼈다. 난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경험 때문에 난 여성을 다루는 글들(페미니즘 이론서에서 시작해서 그 외 다양한 것들까지)을 거의 항상 재미있게 읽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이 책은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랑'을 다루었다. 제목도 매력적이다. <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라니... 하하 웃으면서 책을 골랐다. 역시 후반부에 약간 지루할 뻔 했지만 전체적으로 유쾌한 책이었다.

심리학을 공부한 경험이 없어서 융이란 사람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이인가를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인 것으로 보아 융이 유명인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 책에서는 융의 심리학 이론을 축으로 '강한 여성들'이 겪는 사랑 문제를 분석해 놓았다. '외유내강'이나 '외강내유'란 말처럼 융의 정신분석에서는 겉으로 강한 여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상정한다.

이성과 무의식 간에 존재하는 대립과 균형잡기 때문에 강한 여성들은 사랑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논지이다. 더군다나 강한 여성이 갖고 있는 '아니무스'와 그것의 투영으로 선택하게 되는 마초는 강한 여성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과 상대이다. 저자는 완전히 혼자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자신의 무의식과 화해하고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을 계발할 때 비로소 사랑문제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참을 수 없는 불일치의 무거움'은 비단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주제가 아니다.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난 여성을 다룬 글들을 읽으면서 해방감을 맛본다. 하지만 2% 부족하다. 진정한 '남성학'이 얼른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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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혁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1
전진성 지음 / 책세상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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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 혹은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가장 앞서나가는 사상가들의 담론과 유사한 담론들을 과거에서 자주 발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얼치기로 대충 공부하는 사람은 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 사상가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동시대 사상가들에게 조소를 보내는 경험을 자주 하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이 책-<보수혁명-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에서 소개하는 사상가들의 지적 괘적을 보고 나는 또 한번 놀라움을 느꼈다. 이들의 이야기들이 소위 68혁명 이후에 서구의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그런데 우습게도 난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의 주장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틀.

이 책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이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왔고 아직도 진행중인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면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이미 근대를 뛰어 넘고 있는 듯 하다. 당시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의 의도와 주장은 다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만약 이들이 만들어 놓은 텍스트만을 분석해 본다면 소위 좌파적 지식인들이라도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당시에 이미 근대의 부작용들이 사회에 만연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와 같은 서투른 독자는 이런 상황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의 비판들이 정당하다면 도대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있기나 할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근대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근대에서 과거로의 회귀는 더이상 동시대인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기. 그것만이 근대인들에게는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현재의 부조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식이다.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 모두 현재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근대에는 현재의 부조리를 묘사하는 개념들을 서로 전유하기 위한 경쟁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근대에 사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선택을 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가? 절대적 기준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추상성 때문에 묘사 혹은 이해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 경쟁? 그렇지만 정말 옳은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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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5
마크 네오클레우스 지음, 정준영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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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인가? 누군가가 '일상의 파시즘'이란 말을 들고 나와서 지성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있다. 그 전까지 나에게 파시즘이란 단어는 20세기 정치사에서만 의미가 있었는데, 일상의 파시즘 논쟁을 경험하면서 나는 더 이상 파시즘을 정치사에만 국한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일상의 파시즘 논쟁을 통해 파시즘이란 단어는 사회 이곳 저곳에 두루 사용되었다.

이런 현상은 일정부분 바른 현상이었지만 부작용도 일으켰다. 파시즘이 마치 에이즈나 암처럼 은유로 사용되면서 의미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의미의 경계가 모호해진 단어는 아무데나 쓰여서 결국 단어가 본래 갖고 있던 뜻이 약해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원래 단어가 의도하던 것과 큰 연관이 없는 지점까지 사용되어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파시즘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파시즘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씌여지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파시즘이 기반하고 있는 철학적 배경, 파시즘이 의도하고 있는 바, 파시즘의 현재적 의의 정도 이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은 파시즘이 단순히 정치 체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파시즘을 특정한 정치 체제에만 국한시켜서 의도적으로 파시즘을 축소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하나의 경향으로 현재까지 존재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지적은 정당성을 갖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파시즘을 공부한 기억이 내겐 없다. 따라서 저자의 파시즘 분석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인식이 내 안에서 또아리를 트는 것은 왜 일까? 꽤 명확하고 재미있게 파시즘을 풀이한 이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즐겁고 오싹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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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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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이 일으켰던 전쟁들이나 미국이 참가한 전쟁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의 비판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근본적으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저자에 따르면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나라의 일부 권력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힘이 없는 일반인들을 동원하여 역시 상대 나라의 일반 피동원인들을 살육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각종 미사여구는 실재하는 가치를 언어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거짓을 신화적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저자는 고대 아테네 시대의 전쟁에서부터 현대의 전쟁에까지 전쟁이란 전쟁은 모두 이런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주의를 넘어서'라는 꼭지로 몇 개의 글이 따로 묶여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시점은 마키아벨리주의 혹은 '맹목적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통치자만을 위한 철학인 마키아벨리주의가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자리잡은 것을 저자는 이성의 실종으로 파악한다. 목적의 정당성은 생각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통치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해내는 것. 이것은 근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이성의 진보를 스스로 포기한 자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일을 해왔던 근대인들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자신들은 ~~~~~~한 사명을 띠고 있는 자랑스런 -----라고(미국의 경우 지독한 냄새가 나는 '미국 예외주의'라고 정의한다). 자신의 경험과 연구들을 바탕으로 전쟁에 감춰져있는(그러나 전쟁을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추악함을 들춰내고 '더 이상 전쟁은 안된다!'라는 선언을 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고, 어느새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은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기초적인 부분에서 오자가 많았다. 이런 실수는 책을 싸구려처럼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책은 싸구려 책이 아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기초적인 부분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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