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
마야 스토르히 지음, 장혜경 옮김 / 푸른숲 / 200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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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목마르다.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누군가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누군가 그 물음에 답해준다면 난 '그건 내가 아닌데요'라고 반박할 것이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나를 정의하는 것은 결국 내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쓸만한 도우미를 찾기가 어렵다. 혼자서 겹겹이 쳐있는 껍데기를 벗고 알맹이 나와 조우하는 것은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 아닐까?

언제부턴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난 여성들에 관해 써 놓은 책들을 읽어왔다. 난 그 책들을 샘물처럼 느꼈다. 너무나 시원했다. 여성들이 겪고 있는 각종 부조리 혹은 허위를 세밀하게 분석하고 친절하게 안내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난 희열을 느꼈다. 난 남자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 경험 때문에 난 여성을 다루는 글들(페미니즘 이론서에서 시작해서 그 외 다양한 것들까지)을 거의 항상 재미있게 읽는다. 이 책도 마찬가지다. 더군다나 이 책은 내가 고민하고 있는 '사랑'을 다루었다. 제목도 매력적이다. <강한 여자의 낭만적 딜레마>라니... 하하 웃으면서 책을 골랐다. 역시 후반부에 약간 지루할 뻔 했지만 전체적으로 유쾌한 책이었다.

심리학을 공부한 경험이 없어서 융이란 사람이 얼마나 신뢰할 만한 이인가를 알 수는 없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이름인 것으로 보아 융이 유명인인 것만은 틀림없다. 이 책에서는 융의 심리학 이론을 축으로 '강한 여성들'이 겪는 사랑 문제를 분석해 놓았다. '외유내강'이나 '외강내유'란 말처럼 융의 정신분석에서는 겉으로 강한 여성의 무의식에 존재하는 이질적인 존재를 상정한다.

이성과 무의식 간에 존재하는 대립과 균형잡기 때문에 강한 여성들은 사랑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주된 논지이다. 더군다나 강한 여성이 갖고 있는 '아니무스'와 그것의 투영으로 선택하게 되는 마초는 강한 여성들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자신과 상대이다. 저자는 완전히 혼자일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여 자신의 무의식과 화해하고 억압되어 있는 무의식을 계발할 때 비로소 사랑문제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 '참을 수 없는 불일치의 무거움'은 비단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주제가 아니다.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난 여성을 다룬 글들을 읽으면서 해방감을 맛본다. 하지만 2% 부족하다. 진정한 '남성학'이 얼른 내 앞에 얼굴을 들이밀었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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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 혁명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51
전진성 지음 / 책세상 / 200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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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사, 혹은 사상사를 공부하면서 깜짝 깜짝 놀라곤 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동시대에 가장 앞서나가는 사상가들의 담론과 유사한 담론들을 과거에서 자주 발견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나처럼 얼치기로 대충 공부하는 사람은 지적으로 정교하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 사상가들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 동시대 사상가들에게 조소를 보내는 경험을 자주 하고 있으리라 짐작한다.

이 책-<보수혁명-독일 지식인들의 허무주의적 이상>-에서 소개하는 사상가들의 지적 괘적을 보고 나는 또 한번 놀라움을 느꼈다. 이들의 이야기들이 소위 68혁명 이후에 서구의 비판적 포스트모더니스트(그런데 우습게도 난 포스트모더니즘을 공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의 주장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틀.

이 책에 등장하는 사상가들이 16세기 이후 유럽인들이 자랑스럽게 이야기 해왔고 아직도 진행중인 이 거대한 프로젝트에 대해 자신들의 견해를 밝히면서 주장하는 내용들은 이미 근대를 뛰어 넘고 있는 듯 하다. 당시의 여러가지 요소들을 고려해 볼 때 이들의 의도와 주장은 다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했지만, 만약 이들이 만들어 놓은 텍스트만을 분석해 본다면 소위 좌파적 지식인들이라도 이들의 주장에 공감하는 부분이 많이 있을 것이다. 이는 그만큼 당시에 이미 근대의 부작용들이 사회에 만연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나와 같은 서투른 독자는 이런 상황에서 혼란에 빠지게 된다. '보수주의자들의 비판들이 정당하다면 도대체 보수와 진보를 가르는 기준이 있기나 할까?'라는 의문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여기에 근대의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근대에서 과거로의 회귀는 더이상 동시대인들의 동의를 얻어낼 수 없다. 오직 앞으로 나아가기. 그것만이 근대인들에게는 가능한 것이다.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이유는? 당연히 현재의 부조리를 극복해야 한다는 의식이다.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 모두 현재의 부조리를 인식하고 있다. 근대에는 현재의 부조리를 묘사하는 개념들을 서로 전유하기 위한 경쟁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근대에 사는 것은 어렵다. 우리는 언제나 선택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선택을 하는 절대적인 기준이 존재하는가? 절대적 기준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추상성 때문에 묘사 혹은 이해의 차이가 결정적으로 존재한다. 이데올로기 경쟁? 그렇지만 정말 옳은 무엇이 존재한다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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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 지성의 근본주의 비투비21 5
마크 네오클레우스 지음, 정준영 옮김 / 이후 / 200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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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인가? 누군가가 '일상의 파시즘'이란 말을 들고 나와서 지성계를 떠들썩하게 만든 일이 있다. 그 전까지 나에게 파시즘이란 단어는 20세기 정치사에서만 의미가 있었는데, 일상의 파시즘 논쟁을 경험하면서 나는 더 이상 파시즘을 정치사에만 국한해서 사용하지 않았다. 일상의 파시즘 논쟁을 통해 파시즘이란 단어는 사회 이곳 저곳에 두루 사용되었다.

이런 현상은 일정부분 바른 현상이었지만 부작용도 일으켰다. 파시즘이 마치 에이즈나 암처럼 은유로 사용되면서 의미의 경계가 모호해졌기 때문이다. 의미의 경계가 모호해진 단어는 아무데나 쓰여서 결국 단어가 본래 갖고 있던 뜻이 약해지게 마련이다. 그 결과 원래 단어가 의도하던 것과 큰 연관이 없는 지점까지 사용되어 나쁜 결과를 낳는 경우를 흔하게 접할 수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동기는 위에서 언급한 것과는 큰 상관이 없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면 파시즘이란 말을 사용할 수 있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를 구분할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파시즘의 죄악을 고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씌여지지 않았다.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파시즘이 기반하고 있는 철학적 배경, 파시즘이 의도하고 있는 바, 파시즘의 현재적 의의 정도 이다.

저자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것은 파시즘이 단순히 정치 체제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수주의자들은 파시즘을 특정한 정치 체제에만 국한시켜서 의도적으로 파시즘을 축소한다. 그러나 파시즘은 하나의 경향으로 현재까지 존재하며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이러한 지적은 정당성을 갖는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파시즘을 공부한 기억이 내겐 없다. 따라서 저자의 파시즘 분석에 문제가 없다고 자신있게 말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저자의 우려가 기우가 아니라는 인식이 내 안에서 또아리를 트는 것은 왜 일까? 꽤 명확하고 재미있게 파시즘을 풀이한 이 책을 읽어 보는 것은 즐겁고 오싹한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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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 반대한다 - 우리시대에 고하는 하워드 진의 반전 메시지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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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미국인으로서 미국이 일으켰던 전쟁들이나 미국이 참가한 전쟁들을 비판한다. 그러나 저자의 비판은 미국이 일으킨 전쟁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저자는 근본적으로 모든 전쟁에 반대한다. 저자에 따르면 전쟁은 전쟁을 일으키거나 전쟁에 참여하는 나라의 일부 권력 집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하기 위해 힘이 없는 일반인들을 동원하여 역시 상대 나라의 일반 피동원인들을 살육하는 것에 지나지 않을 따름이다. 그 과정에서 전쟁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각종 미사여구는 실재하는 가치를 언어로 옮겨 놓은 것이 아니라 거짓을 신화적으로 포장한 것일 뿐이다.

저자는 고대 아테네 시대의 전쟁에서부터 현대의 전쟁에까지 전쟁이란 전쟁은 모두 이런 본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마키아벨리주의를 넘어서'라는 꼭지로 몇 개의 글이 따로 묶여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시점은 마키아벨리주의 혹은 '맹목적 현실주의'에 대한 비판이다. 통치자만을 위한 철학인 마키아벨리주의가 근대 이후 거의 모든 정치인이 갖춰야 할 덕목으로 자리잡은 것을 저자는 이성의 실종으로 파악한다. 목적의 정당성은 생각하지 않고, 현실적으로 통치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해내는 것. 이것은 근대인들이 그렇게 자랑스러워한 이성의 진보를 스스로 포기한 자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런 일을 해왔던 근대인들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한다. 자신들은 ~~~~~~한 사명을 띠고 있는 자랑스런 -----라고(미국의 경우 지독한 냄새가 나는 '미국 예외주의'라고 정의한다). 자신의 경험과 연구들을 바탕으로 전쟁에 감춰져있는(그러나 전쟁을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지 않을까?) 추악함을 들춰내고 '더 이상 전쟁은 안된다!'라는 선언을 하는 저자의 모습을 보고, 어느새 이상한 모습으로 변해버린 나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 책은 좋은 내용에도 불구하고 기초적인 부분에서 오자가 많았다. 이런 실수는 책을 싸구려처럼 만들어 버린다. 그러나 이 책은 싸구려 책이 아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기초적인 부분에 좀 더 신경을 써 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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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
클라스 후이징 지음, 박민수 옮김 / 문학동네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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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장난감이 될 수 있다.' 나에게 있어 위 문장은 만화책에만 해당되었다. 그렇다고 내가 모든 만화책을 장난감으로 여겨온 것은 아니다. 어떤 만화책-용비불패, 열혈강호, 앨프를 쫒는 사람들, 해왕기, 그 외 몇 가지-만이 내게 장난감이었다. 확언하건데 내가 읽었던 만화책의 2/3는 철학책, 사회과학책, 역사책의 연장선상에 있다.

만화책도 그럴진데, 그 외의 책들은 어떠할 것인가? 무협지와 야한 소설을 제외한 다른 모든 책은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벅찬 상대들이다. 내용을 잘 파악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가능한 빨리 읽어야 한다는 조금함, 최소한 남들이 이해하는 만큼은 이해해야 한다는 열등감, 학생은 공부를 해야 한다-그것도 책을 통해서-는 고정관념. 나는 이 모든 것들에 철저하게 예속되어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내게는 다른 무엇보다 진지하고 고된 작업이었다.

<책벌레>(이하 이 책)를 알라딘 북리뷰 코너에서 처음 보았을 때, 난 이 책의 제목에 매료되었다. 이유는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지만 책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기 때문에 책을 구입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그렇다고 내가 이 책을 사고 싶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책을 구입할 충분한 근거들이 부족했을 뿐이다). 그래서 학교 서점에서 이 책을 보았을 때도 눈맞춤만 했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정말 우연이다.

이 책의 '차례'(나는 목차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이 책에 목차가 아닌 '차례'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나는 이 책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차례'라는 단어를 사용하기로 마음 먹었다)는 매우 혼란하다. '한층 더 정확한 독서를 위한 정중한 초대'라는 첫 번째 차례, 첫번째 양탄자에서 아홉번째 양탄자, 그 외의 다른 차례들은 나(독자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싶었지만, 무리한 일반화라는 생각이 들어서 나라는 단어로 교체)를 혼란에 빠뜨렸다. 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었다. 동시에 강한 호기심이 내 안에 자리잡았다.

이 책의 초반부는 상당히 흥미롭다. 대뜸 인물의 초상을 하나 올려 놓고, 그것에 대해 야기하기 시작한다. 아주 유쾌한 방식으로 말이다. 여러번 웃음을 참은 후에야 다음 장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책의 초반부는 양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주로 인물의 행동을 통해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목적에 할애되었다. 모두 아주 유쾌하다. 독자의 관심을 끄는 것이 저자의 목적 중에 포함되어 있다면, 작가는 그 목적을 충분히 성취해냈다.

하지만 후반부로 넘어갈수록 이 책은 뭔가 심상치 않은 것을 말하려 한다는 인상을 준다. 초반이 책벌레들을 묘사했다면, 후반은 책벌레를 경고하고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텍스트로의 순수한 몰입, 텍스트의 해체와 독자의 해체(이 해체가 데리다의 '해체'인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컨텍스트를 제외한 순수한 텍스트의 이해(도대체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그리고 (지금의 내 능력으로 알 수 없는 것들)

저자는 독자에게 꼼꼼하게 텍스트를 읽을 것을 요구한다. 거기에 굴하지 않고 텍스트를 쭈욱 읽어나가는 독자도 있겠지만, 나는 저자의 요구에 반쯤 철저하게 응했다. 내가 그런 독서를 선호한다는 점도 어느 정도 작용했다. 그래서 책을 앞으로 넘겼다가, 다시 원래 읽던 자리로 돌아오고, 여기를 폈다가, 다른 곳도 펴보고, 끈기를 가지고 꼼꼼하게 읽으려고 하고, 어쩌구 어쩌구.... 이 책은 완전한 장난감이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의 내 일대기에서 매우 이례적인 일이다. 책이, 그것도 포스트모던을 현란하게 표현한 책이(하지만 난 포스트모던이 뭔지 모른다. 그냥 느낌일 뿐이다) 내게 장난감의 이미지로 다가오다니. 아마 이것은 꿈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나중에 심심해졌을 때 다시 이 책을 읽기로 했다. 좋은 장난감이 있으면 즐거우리라는 생각에서 술 먹는 자리에 한 번 빠지고 이 책을 사기로 맘도 먹었다. 그렇지만 이것은 경계해야지. '텍스트에 몰입하여 내가 해체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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