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계층을 타겟 삼아 홍보하는 컨텐츠는 좋아하지 않는다. 82년생 김지영 같은 류의 책이 대표적일 것이다. 특정 계층에 속했다는 단순한 이유로 수많은 이를 적당히 묶어 피해를 호소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고, 작품적으로도 내러티브가 단순하여 흥미를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코리안 티처도 홍보 방식이 정말 자극적으로 보였고, 또 ‘비정규직‘ ‘여성‘을 무기 삼는 듯한 그저그런 평작의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1차적으로 한국어학당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정말로 궁금했고, 미리보기로 읽어 본 몇 페이지는 마치 어느 르포 기사같아서, 작품 소재가 불러일으킨 호기심이 많은 의심을 이겨 버릴 정도였다.
누가 이런 책을 읽고 있다는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입혀 두었던 책커버를 벗긴 것은, 교육이라는 미명 하에 가려진 교육 사업 안에서 벌어지는 강사들에 대한 노동 착취에 대한 비교육적 노동 환경에 대한 고찰이 수박 겉핥기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이었다. 끝을 모르는 고갱님들, 사업가들의 부당한 요구는 대체 언제 멈출까 싶은 숨막히는 현실을 다시 책에서 직면하게 하는 것만 있고, 내 삶의 고통을 덜어줄 해결책이 없는 이 책은 잔혹한 상담 세션과 같았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던 것은 4명의 주인공들이 주는 매력 때문이었다.
영 읽을 맛이 나지 않는 문장력이나 후반부로 갈수록 더 김이 빠지는 구성력을 보면 작가의 실력이 의심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각 인물들에 대한 입체적인 성격 부여하는 것이 탁월했다. 좀체 누구하나에게 정을 주기는 힘들었지만, 멀리서 보면 무명씨의 평범한 사람들이건만, 모든 인물이 각자 복잡한 면이 있어 개성이 있고 현실감이 높았다. 

코로나로 어려움을 겪으며 버티는 와중에 수상 소식을 들었다는 쫓기는 작가의 현실이 의아할 정도로 건조하고 관조적인 서술 방식이 좋았다. 시제와 인생을 엮은 고찰이나 인물의 양면성 등 부분 부분 놀라운 원석의 흔적을 보이는 재능이 놀라운데, 이를 끝까지 제대로 못 풀어낸 것이 아깝다. 상술한 부분에 대해서 다시 치열하게 고민하고, 장편소설가로서 실력을 쌓아서 다른 작품을 써 줬으면 한다.

독서실에서 혼자 공부를 하다가, 아침에 샤워를 하다가 배가 아픈 건 도무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아플 때는 길을 걷다가도 주저앉을 정도로 심하게 아팠지만, 약을 먹으면 이내 괜찮아지고는 해서 병원에 가지는 않았다. 그래서 시험장에서 배가 아팠을때도 물도 없이 약을 씹어 먹었고, 이내 괜찮아지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1교시에 시작된 복통은 2교시, 3교시까지 이어졌고 3교시에는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선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배를 움켜쥐었다.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감독관이 선이에게 다가와 괜찮냐고 속삭였을 때 선이는 울고 있었다. 처음부터 3년을 계획하고 시작한 시험이었다. 그날이 마지막이었고, 선이는 자신이 모두 망쳐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모교 취업지원팀에서 한국어 강사 국가고시 대비 과정이 개설된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선이는 시험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시험공부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 P34

미주는 강의평가 점수가 잘 나오지 않는 편이었는데도 크게 동요하지 않았다. 강의평가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강의평가에는 ‘수업을 통해 한국어 실력이 향상되었는가‘라는 질문이 있었다. 학습자 본인의 노력에 달린 한국어 실력 향상을 강사의 자질 평가에 이용하다니 - P75

이 모든 변화를 제가 직접 설명하고 강사님들의 허심탄회한 의견 역시 제가 직접 듣겠습니다.

정말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하면서 미주는 벌떡 일어나 분쇄기에 원장의 편지를 넣었다. 원장이 떠들어대는 혁신과 진보, 변화가 뭔지는 미주도 대충 알고 있었다.
지난 학기에 베트남 학생들이 집단 도주했을 때, 원장이 이게 모두 관리 부족이라며 복도에까지 들릴 정도로 소리를 질렀다는 말이돌았다. 원장이 직접 에이전시에 전화해서 책임지라고 소리쳤고, 에이전시에서 깡패들을 고용해 베트남 커뮤니티를 뒤지고 있다는 말도 돌았다. 시골 공장에 숨어서 일하는 학생을 발견하면 깡패 둘이서 양팔을 하나씩 잡아 그대로 공항으로 끌고 간다고 했다.
원장이 책임 강사 회의에서 "강사들의 기강을 똑바로 잡을 것입니다" 라고 한 것은 그대로 각급 회의를 통해 평강사들에게 전달되었다. 덧붙여 학생 상담을 강화하고 상담 일지를 원장에게 직접 제출할 거라고 했고, 강의평가 순위를 매겨서 상위권 10퍼센트에게 인센티브를 주고, 하위권 10퍼센트는 수업 영상을 찍어서 평가받는 시스템이 만들어질 거라고 했다. 그리고 영상을 찍었는데도 하위권이나온다면, 책임 강사들의 표현에 따르면 ‘애석하게도‘ 다음 학기 강의를 받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말을 전달하는 책임 강사와 이미 싸운 바있는 미주로서는 간담회를 생각하기만 해도 속이 뒤틀렸다.  - P77

미주가 벌인 또 다른 사고를 듣고 큰 소리로 웃고는 했다. 그리고 "너는 참 못됐다"라면서 미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미주는 아버지를 자주 보지 못했으므로 크게 좋아하지도, 미워하지도않았다. 좋아하지 않았으니 기다리지 않았고, 기다리지 않았으니 미워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머리를 쓰다듬는 아버지의 커다란 손에서전해지는 온기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고모들이 미주 흉을 볼 때마다 아버지가 "못됐으니까 혼자 씩씩하게 잘 사는 거야"라고 미주를 두둔해줄 때는 기분이 좋기도 했다.
미주는 요즘도 조카들을 만나면 "착한 건 아무 쓸모 없어" 라거나 "그렇게 남의 말만 듣고 남의 생각만 하고 살면 네가 좋아하는 건 언제 할래?"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문득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와 손길이 생각나기도 했다.
- P84

그날 이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혼자 하교했다. 앞자리 애처럼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친구와 싸울 수도 있고, 친구들이 나를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저렇게 울고 싶지 않았다. 그게 뭐 별거라고.
혼자 하교하는 길은 편했다. 떼를 이루어 걷는 무리들 사이에서혼자 걷는 것이 좋았다. 가장 좋았던 것은 자신이 혼자 걷기를 선택했다는 것이었다. 교실에 혼자 남아 울고 있던 애는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그룹에 끼어들었고, 눈치 보는 얼굴로 친구들을 따라다녔다. 미주는 그 애의 주눅 든 얼굴을 보는 것이 싫었다. 저런 얼굴이 그 애를 우스워 보이게 만들었고, 괴롭힘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 누구도 미주를 괴롭힐 수 없었다. 미주는 괴롭지 않을 테니까. 미주는 혼자여도 괜찮았고, 언제나 그럴 것이었다. 친구들이당시 유행하던 편지장을 주고받자고 했을 때 단칼에 거절한 것도그런 이유에서였다.
준비를 충분히 마쳤으므로 친구들이 자신을 두고 먼저 하교한 것을 알았을 때 미주는 울지 않을 수 있었다. - P85

미주는 친구들을 쏘아보면서 말했다. 친구들은 여전히 웃음기얼굴로 뭘 그만하냐고 물었다.
"그만 웃으라고, 걔보다 너네가 더 참기 힘드니까."
어이없어하는 친구들을 두고 미주는 다시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그날부터 미주는 친구들과 밥을 같이 먹지도, 하교를 같이하지도않았다. 친구들은 미주 뒤에서 "야, 웃지 마. 쟤가 못 참는다잖아"라는 식의 말을 하면서 셋이 몰려다녔다. 저런 애들과 같이 밥을 먹고야자 시간에는 일부러 옆자리로 옮겨 공부를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이제는 상관없어진 것이 다행스럽게 여겨지기도 했다.
(중략) 자신이 여전히 괜찮다‘는 것이 자랑스럽게여겨졌다. 쉬는 시간마다 자신에 대해 떠드는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책을 읽기 시작했고, 지리멸렬한 친구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고결한 책 속 인물들에게 빠져들었다. 
- P86

그날의 마무리 집회는 동대문에서 열렸다. 각 깃발 아래에 동그랗게 모였는데, 선배가 ‘맨발의 새내기‘ 라며 미주를 원 안으로 밀어넣었다. 사람들이 손뼉을 쳤다. 미주는 더 참지 못하고 선배를 향해돌아서서 "집회라고 말을 했어야지, 왜 사기 쳐요?"라고 소리쳤다.
순간 장내가 고요해졌다. 미주는 바닥이 새카매진 양말을 벗어 던지면서 정의를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도 되는 거냐고 쏘아붙였다.
"후배를 조직 대상이 아니라 하나의 인격체로 보았으면 이런 일은 있지 않았겠죠."
미주는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 하는 선배를 노려보면서 양손에 들고 있던 구두를 바닥에 떨구었다. 부은 발은 구두에 들어가지 않았다. 미주는 구두 뒤축을 접어 신고 원 밖으로 빠져나가 그대로집으로 향했다. 누구도 미주를 붙잡지 않았다.
- P88

"일어나세요, 선배."
미주는 소리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작게 속삭이지도 않았다.
"안 자고 있는 거 알아요. 일어나세요."
선배는 여전히 등을 구부리고 누워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선배, 일어나서 사과하세요."
명령하는 듯한 말투였지만, 미주는 사실 사정하는 마음이었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라고, 자신이 무지했고 폭력적이었다고 무릎을 꿇으라고, 그러나 끝내 선배는 일어나지 않았다. 동이 터오고 있었다. 미주는 일어나 동방을 나섰고, 풍물패 임원단 전원에게 단체문자를 돌렸다.

저는 사과를 받고 싶습니다.

(중략) 사흘 뒤 선배가 "만나서 이야기하자"는 문자를 보냈는데, 미주가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사과하세요"라고 말하자 더 이상 답이 없었다. - P90

미주는 대자보를 붙이고 나서 여전히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선배들과 동기의 눈을 한 명씩 맞추면서, 공개 사과 대자보가 옆에 붙기전에는 자신의 대자보를 뗄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했다. 옳다고 믿는 것을 위해 싸울 것. 포기하지 말 것. 그런 것들이 풍물패 활동을 하면서 배운 거라고 말했다. 풍물패에서 어떤 신념을 배우기에는 미주가 활동했던 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걸 지적하는 사람은 없었다. - P91

미주는 딱딱하지는 않았지만 엄격한 선생이었다. 열심히 공부하려는 학생들에게는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그다지 공부에 관심 없는 학생들은 미주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유급한 학생들이 미주를 싫어했다. 학기 첫날 미주가 담임인 것을 알게 된 유급생들이 행정실에날 정도로 엄격하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었다.
(중략)
행정실에서는 학생들을 구슬려 보내면서 미주에게도 조금 살살해달라는 식의 말을 전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미주는 몇 학기씩 유급하면서 수업 시간에 지각하고 게임을 하는 학생들에게는 관대할 필요가 없다고 대꾸했다. 그런 학생들을 내버려두다면 성실한 학생들이 피해를 받게 된다. - P94

미주는 "제 수업은 제가 알아서 준비해요. 단지 학교에 귀속되는 급 전체 자료는 책임 강사가 해야죠. 그런 일 하라고 책임 강사가 있는 거잖아요? 라고 반박했다. 그런 식의 싸움이 매주 반복되었고, 늘 한희가 혼자 맡아서 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 - P104

시험지를 백지로 내고는그다음 날부터 일주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고 있었다. 메이트가 니카에게 전화를 해보는 게 좋지 않겠니고 물었고, 미주는 그럴 생각없으니 선생님이 하시라고 잘라 말했다. 
(중략)
정윤아가 미주의 자리에 앉아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강사실에서 미주는 정윤아를 찾아가는 일이 없었고, 정윤아의 자리가 어디인지도 정확히 몰랐다. 그런데도 정윤아는 서운해하지 않고 항상미주의 자리에 찾아와 수다를 떨곤 했다.
"그래?"
미주는 모르는 척했다.
"샘 경제관에서 수업하지 않아? 한희 샘도 경영관에서 수업하다가 그랬다는데, 아무튼 임신 초기인데 무리했나 봐."
미주는 한희가 임신한 것을 알지 못했다. 그런 소문이 미주에게 들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주는 알고 싶지도 않았으니까. - P105

미주는 여기가 상점이냐고 되묻고 싶었다. 교육기관으로 알고 있는데 아니냐며 비꼬고 싶었다. (중략)
"교육도 서비스입니다. 학생들이 돈을 내고, 여러분은 그 돈으로 일자리가 보장된다는 것을 잊지 마세요. 학생이 갑이고 여러분이 을입니다. 학생이 없으면 여러분은 여기서 일할 수도 없어요."
미주는 안에서 치밀어 오르는 온갖 말을 간신히 삼켰다. 당신은 틀렸어, 우리는 정이야. 학생이 갑이고, 당신이 을이고, 바로 옆에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책임 강사들이 병이고, 나와 같은 평강사들은 정이야. 그러니까 당신이 강평으로 우리를 자르겠다고위협하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는 거고, 여기 있는 강사들은 위협당하면 위협당하는 대로 당신 비위에 맞춰 멍청한 이야기만 하고 있는 거야. (중략)
"그리고 학생 관리는 학생을 자르는 것이 아니라 상담을 통해서하는 게 맞지요. 제가 학기 초에 드렸던 편지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상담을 강화할 예정입니다."
미주는 그 자리에 있는 30명 남짓한 강사들을 둘러보았다. 누구도 상담과 같은 시간 외 업무는 시간강사의 몫이 아니라는 걸 지적하지않았다. 절반쯤은 원장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이기까지 했다.
(중략)
그들은 모두 정이었으니까. 갑을병정의 정. - P121

원장은 뜨거운 토론을 기대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침묵하는 강사님들은 조직의 발전에 관심이 없는 것으로 간주겠습니다. 우리 어디 한번 치열하게 씨워봅시다."
 원장의 말에 책임 강사들이 웃고 다른 강사 몇몇도 따라 웃었다. 미주는 웃지 않았다. 원장의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 사람은 없었다. 원장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회의록을 작성하는 행정실 직원을 시켜 이름을 써놓는다는 건 모두에게 알려진 일이었다. 정윤아는 미주에게 오늘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여러 번 주의를 주었다. "어제 원장한테 대든 선생님들 다 블랙리스트에 올랐대." 정윤아는 간담회에서 어차피 바뀌는 건 없다고, 그냥 반대하는사람들을 색출하려는 것뿐이라고 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강사들은 모두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주 역시 침묵하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원장은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이라고 되뇌었다. 소모적인 실랑이를 하느라 직장에서 잘릴 수는 없었다. - P118

학생들을 위한 이벤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숙제에 시험에 발표에 외국까지 와서 공부만 하니까 얼마나 재미없겠어요. 운동회나 말하기 경연 같은 이벤트가 있으면 훨씬 좋을 것 같아요."
원장은 가은의 말에 크게 끄덕였다. 회의록을 작성하는 직원에게 제대로 적었냐고 다시 묻기도 했다.
- P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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