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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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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무라카미 하루키의 <어둠의 저편>을 읽고

 


1. 서술기법


  영상기법으로 쓰였다. 시나리오를 읽는 것 같다. 심리묘사를 안 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것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인지 엄청 잘 읽힌다. 그런데 과연 이것을 ‘영상기법’이라고 부르며 당당히 소설의 한 기법으로 인정해줘야 할지는 의문이다.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을 그대로 쓰면 된다고 스티븐 킹도 말하고 있지만 글쎄, ‘보이는 것’이 마음속에 그려지는 것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영상기법으로 쓰면 작가는 인물들과 거리를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인물의 마음속에 든 것이 아닌 인물의 행동을 기록할 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인물의 심리를 생각하지 않는 건 아니다. 심리를 알지 못하면 행동도 상상할 수 없다.
  심리묘사를 한다는 것은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고, 심리묘사를 배제하고 행동만 묘사한다는 것은 심리묘사를 하지 않는 게 아니라 행동만 보고도 심리를 알 수 있게끔 행동을 더욱 치밀하게 묘사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표현의 한계는 있겠지. 그러나 소설의 궁극적 목적은 심리묘사가 아니라 인간의 정신이 삶의 과정을 통해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니 심리묘사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다.

 

 

2. 하룻밤 동안 일어난 일


  <빛의 제국>이나 <이반 데소비니치의 하루>처럼 하룻밤 동안의 일을 그리고 있다. 소설은 날이 밝는 것과 동시에 끝이 난다. 하루키는 어디서부터 소설을 시작한 것일까? 두 달 동안이나 깊은 잠에 빠진 언니를 둔 마리라는 여자아이가 도저히 집에 있는 것을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 밤 집을 나와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책을 읽으며 밤을 지새우기로 하는 것에서부터? 거기서 누군가를 만나겠지. 그는 마리에게 관심이 있는 남자아이일 것이다. 작가는 하룻밤동안 일어날 수 있는 무궁무진한 일을 상상하게 하고 보여주며, 그것이 우리의 삶과 세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한다.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는 별 감동이 없었는데, 지금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주인공 마리의 감정을 알 것도 같다. 하룻밤동안의 배회, 내면의 갈등. 날이 밝자 집에 돌아와 언니의 곁에 누워 눈물을 흘린다. 감수성이 예민한 마리는 깊은 잠에 빠진 언니 때문에 불안을 느끼고 자기 삶의 중심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는데 하룻밤 사이에 여러 가지 사건을 겪고 그리고 자신의 내부를 들여다보고 난 뒤 변화한다. 성장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까. 그것은 아무리 애를 써도 꼼짝도 않던 벽을 자신도 모르게 움직인 것이나 마찬가지다. 아주 미세한 변화이지만 중요한 것은 움직였다는 사실,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마리의 정신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킨다. 밤은 그러한 성찰의 시간인지도 모른다. 아주 소중한 것을 인간의 정신 속에 깃들게 해 치유해주는 시간. 그렇게 생각하니 제목을 참 잘 지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둠의 저편>. 표면적으로는 어둠에 불과하지만 그 어둠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것은,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굳이 표현해보자면, 재생의 에너지? 그 밤 동안의 사건들이 마리에게 스며들어 그녀의 내부를 재배열한다. 죽어있던 부분이 살아나기도 하고 살아서 머릿속을 지배하던 것이 눈 녹듯 사라지기도 하는 어둠의 시간.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우리는 다시 태어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우리는 날마다 시시각각 변화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문득 <밤에 쓴 편지>라는 시를 읽고 싶다.

 

  책을 읽고 이런 글을 쓰지 않는다면 책을 읽는 의미는 없을 것이다. 생각하고 고민해보지 않으면 아무 것도 얻을 수 없다. 그리고 이렇게 깨닫는 환희를 느껴야만 문학작품의 가치를 깨닫고 나도 그런 환희를 다른 사람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는 의지를 가질 수 있다. 독서 감상문을 쓰는 것은 문학의 가치를 발견하고 인간과 삶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는 즐거운 과정이다.

 

 

3. 인물, 대사


  소설 속 인물들의 대사는 읽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작가의 성격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대사들이다. 뭐랄까... 인물들이 하나같이 참 설명을 잘한다. 자기 생각을 잘 표현한다. 실제로 이렇게 똑 부러지게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그들의 대사는 서로 많이 닮아 있다. 그리고 굉장히 사교적으로 보인다. 처음 보는 사람한테 말도 잘 걸고 부탁도 잘 하고.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각자의 문제를 짊어지고 삶을 이끌어가고 있지만 그들 모두에게 다 공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표피적으로만 느껴지는 인물도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면 오토바이 남자라든가 카오루?

 

 

4. 환상성


  우리가 사는 도시인데도 왠지 신비로운 분위기다. 그것은 시간적 배경이 ‘밤’이기 때문일까? 밤에는 어쩐지 위험하고 큰 일이 벌어질 것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화장실 거울에 투영되었던 사람의 얼굴이, 실체가 나가고 난 뒤까지 거울에 남아서 스스로 움직이는 장면은 작가의 기발한 상상력을 입증해준다. 정말로 그럴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는 이미 화장실에서 나가고 없는데.

 

 

5. 작가


  1979년 등단해서 2006년까지, 27년 동안 81권의 책을 썼다고 한다. 1년에 3권을 썼다는 얘기다. 탁월한 작가적 역량과 억센 체력이 뒷받침된 덕분이라고 역자는 말하고 있다. 1년에 3권이라... 3달에 책 한권 쓴다고 보면 휴식시간은 3개월밖에 되지 않는 셈이다. 이런 사람은 글을 안 쓰는 시간을 더 힘들게 느끼는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읽은 하루키의 작품은 <렉싱턴의 유령>, <도쿄기담집>, <상실의 시대>, <지금은 없는 공주를 위하여>, <꿈에서 만나요>, <핀볼>,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그러나 즐겁게 살고 싶다>, <신의 아이들은 모두 춤춘다>, <해변의 카프카>, <TV피플> 등. 이 작가의 책을 가장 여러 권 읽었다! 하면 답은 하루키다. 나오는 족족 흥미를 끈달까. 그의 작품에는 우리를 현실에서 일탈시켜 미지의 세계로 진입가능하게 하는 힘이 있다. 그 맛에 중독되는 것 같다. 그 힘의 정체는 뭘까? 단순히 신비한 소재가 등장하기 때문에? 카프카를 몇 번이고 정독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그 영향 때문인가?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그의 작품에 몽환적인 요소가 깃들어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장님과 버드나무 잠자>였나? 그런 제목의 단편이 특히 그랬고, <도쿄기담집>에 실린 모든 단편들이 그러했다. 그리고 그 몽환성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다. 현실세계에서도 가끔 감지할 수 있는 성질의 몽환성.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우리는 우리를 감싸고 있는 세계가 아주 낯설게 느껴진다. 하루키는 세계를 낯설어 보이게 만드는 요소들을 좋아하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어느 날 갑자기 실종된 남편이 며칠 후 어느 기차역 대기실에서 깨어난다든가(그는 왜 자신이 거기에 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벽에 붙은 그림 속 여자와 매일 밤 만난다든가(해변의 카프카), 낮에 소파에 누워 자고 있는데 갑자기 이상한 사람들이 들이닥쳐 아무 말 없이 TV를 옮겨간다든가(TV피플), 윈드서핑을 하다 죽은 아들을 보러 매년 같은 해변으로 휴가를 오는 여자(도쿄기담집), 자신의 신분을 가르쳐주지 않고 어느 날 말도 없이 떠난 애인의 목소리를 몇 년이 흐른 뒤 우연히 차 안의 라디오에서 듣게 되는 남자(도쿄기담집). 이런 이야기들을 읽고 있으면 마치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가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


  나는 하루키 경우처럼, 작품 자체보다 작가가 더 유명한 현상을 이상하게 생각해왔다. 왜 작품을 놓고 말하지 않고 “하루키를 싫어하면서도 읽었는데 역시 싫다”라고 독후감을 쓰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하루키 작품 속에 공통적으로 녹아있는 ‘우리 눈엔 보이지 않는 다른 세계’에 대해 인지하게 되자 독자들이 그러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하게 됐다. 그가 쓴 어떤 소설에서나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개인의 내면세계가 담겨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선호하는 장치(주로 환상적인), 특유의 대화체, 유머가 있다. 그건 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시각에서 기초한 것들이다. 누구나 어느 정도 흉내 낼 수는 있지만 글쎄, 빌려온 것에 그치지 않고 ‘정말로 그런 세계가 존재한다는 느낌’을 독자에게 심어주려면 살짝 흉내 내는 것 정도로는 어림도 없는 일일 것이다. <어둠의 저편>을 읽으면서 나라면 남자주인공 다카하시를 하루키가 그린 것보다 위험하고 비루한, 하지만 동정심이 이는 사람으로 그릴 텐데, 하고 생각했다. 하루키가 그린 다카하시는 귀여웠다. 좀 가르치려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작품을 통해 그의 내적세계를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이상하게도 그가 귀엽게 느껴진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공상을 즐기는 40대 남자의 모습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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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stbeautmin 2007-02-07 14: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세계를 바라보는 그만의 시각에서 기초한 것들이다.
공감합니다. 하루키만의 세계, 그의 시각이라는 말 와닿네요.

헤이시 2007-07-28 0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감사합니다~^^*
 
나의 미카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5
아모스 오즈 지음, 최창모 옮김 / 민음사 / 199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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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 여자의 결혼생활
결혼생활을 하는 여자의 심리를 이토록 정밀하고 리얼하게 그려낼 수 있다니. 그것도 남자작가가. 그는 유부녀들을 만나서 대화해본걸까.
특별한 상황설정이 없는 소설이라는 점이 일단 신기했다. 궂이 소설적 상황을 짚어본다면 <어느 특정한 시대를 살아가는 한 여자의 결혼생활>정도?

 

2. 특별할 것 없는 지루한 삶의 풍경
고모님이 놀러오고, 가족이 놀러다니는 사건이 몇 차례 되풀이되는 것을 빼고는 특별할 것 없는 삶이 계속된다. 정말 진짜 삶은 이런 것이 아닐런지. 끝도 없이 지루함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던 것은 '우리의 삶'으로 생각하고 읽은 덕분이다. 나는 그 속에서 처절한 사건이 아닌 한 여자의 처절한 내면을 읽어냈다. 그것이 그 어떤 소설적 사건보다도 리얼하게 다가왔다.

 

3. 명확치 않은 결말-그래도 삶은 계속된다
미카엘이 대학동창과 혼외정사를 나누지만 한나는 그것을 가지고 이혼하겠다느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니 하는 식으로 소란을 피우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다른 여자들처럼 한나도 그랬을 수 있다. 그러나 소설에서는 명확하게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행동에 대해서 고백하기보다는 무의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것은 그래도 여전히 삶이 지속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만 같다. 남편이 혼외정사를 했다고해서 그녀의 내면이 크게 바뀌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그녀의 내적 독백은, 표면적인 삶은 끊임없이 색과 모양을 바꾸지만, 사람의 내면은 여전히 고독하고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

 

4. 구체적인 장소들
한나가 야이르와 함께 거니는 거리와 공원의 풍경들(분수대)같은 건 작가가 직접 본 것들이리라. 작가는 소설을 쓰면서 미카엘과 한나, 야이르를 실제로 있는 사람들이라고 상상했으리라. 어디를 가도 그들이 따라다녔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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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하늘연못 > 새로운 삶을 살고 싶다면 질문을 하세요.
질문의 7가지 힘
도로시 리즈 지음, 노혜숙 옮김 / 더난출판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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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의외로 재미있다. 난 한달동안 이 책을 들고 다니면서이리저리 생각하고 지혜로운 질문을 하루에 다섯개씩 기억해 두었다가 여러 번 활용해 보았다. 결과적으로지난 한달 동안 스스로 생각해도 엄청나게 변화했을 뿐 아니라 독서 등 모든 일에서 효율이 향상되었으니 이 책이야말로 내 인생을 바꾸어놓은 책이 된 셈이다. 특히 감명깊었던 네가지를 적어본다.

1) 질문을 하면 대통령도 대답해야 한다. 누군가 당신을 억압하고 상처를 주고있고 당신이 주눅들었다 생각한다면 이렇게 물어보자. 그것이 무슨 말입니까? 그것은 어떤 근거가 있습니까? 예를 들어주시겠습니까? 질문은 평등하고 열린 인간관계로 우릴 이끈다.

2) 당신은 단지 많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가? 적은 지식을 가졌음에도 통찰력 있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야말로 뛰어난 사람이 아닐까? 지식의 양이 아니라 질이 문제가 된다면 질문을 하자. 질문은 지식에 대해 다른 관점을 가지게 한다. 창조적이고 효율적으로 살고 싶다면 질문을 하자.

3) 당신이 초조하고 불안해져서 어리석은 실수를 계속한다면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이것이 피할 수없는 일인가?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인가? 만약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질문을 하자. 누가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쓸데없는 근심과 걱정이 당신의 평정을 깨뜨리고 있다면 질문을 하자.

4) 우수한 영업사원은 고객의 불평을 질문으로 바꾸어 듣는다고 한다. 예를 들어 이 물건이 왜 이리 비싸냐고 따진다면 '손님께서는 가격이 이만큼 차이가 나는 이유를 알고 싶으신 거군요. 이 제품은 이런 이런 기능이 더 뛰어납니다라고 말한다고 한다. 질문은 위기와 기회가 친척쯤 된다고 알려준다.

끝으로 나는 이제 책을 읽기 전에 내가 무엇을 가장 알고 싶은지 이 책이 내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 묻는다. 그리고 조금더 깊고 행복하게 책을 읽는다. 그렇다면 누군가 나에게 이 책은 좋은 책인가 묻는다면 내 대답이 무얼지 당신은 아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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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의 도시
폴 오스터 지음, 윤희기 옮김 / 열린책들 / 200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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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폐허의 도시>는 어디에나 있다, 는 점을 말해두고자 한다. 그것은 실제적인 의미 뿐 아니라 은유적인 의미로서도 우리 도처에 널려 있다. 실제적인 측면은 내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신문이나 뉴스를 조금만 보면 알 수 있는 것들이므로 생략하기로 한다.

고백하건대 나는 은유로서의 <폐허의 도시>속에 감금되었던 적이 있다. 돌이켜 보면 정말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아빠가 갑자기 불가피하게 가게를 오픈하게 된 바람에 내가 종업원으로 고용되어 규칙적으로 노동을 해야 했던 것이다.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내린 아빠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지만 그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인건비를 줄이는 것 역시 불가피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엔 정말,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폭이 좁았다. 아니, 한 가지 밖에 선택할 수 없었다.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가게로 달려와 일을 했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었다. 이제껏 해왔던 것처럼 친구들과 놀 수도 없었고 극장에 간다든가 하는 문화 생활을 즐길 수도 없었다. 수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단체 손님 예약이 있으니 지금 당장 오라는 호출을 받기도 했다. 때로는 도망치고 싶었다. 격하게. 순간적인 충동에 못 이겨 이성을 잃은 척 연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아빠의 절망적인 어조에 설득 당해 제자리로 돌아왔다. 물리적인 해방은 언제까지나 불가능할것처럼 보였다. 마치 소설 속 <폐허의 도시>처럼 그 당시 내 삶은 '가게'라는 견고한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아마 아무런 조치 없이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다면 나는 미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인간이 막다른 골목에 내몰렸을 때 탈출구를 찾으려 몸부림치는 것은 거의 본능적인 행위에 가깝다. 때로는 그 자신조차 알아채지 못할 만큼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나는 책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잔뜩 허기가 진 사람이 음식을 먹어치우듯 독서에만 골몰했다. 학교에서도 공강 시간에 친구들과 수다를 떨기 보다는 혼자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었고, 수업이 끝나고 지하철에 타면 사람들이 꾸역꾸역 밀려들거나 말거나 내 눈은 책 속의 활자를 쫓기 바빴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나는 그것이 내 나름의 생존 방책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원래 독서를 좋아하고 작가가 되는 것이 꿈이었긴 해도, 그 정도로 몰입하게 될 줄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개인적인 시간이 워낙 없다 보니 이러다가 내 꿈이 좌절되는 건 아닌가 하는 불안 심리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참 열심히 살았다. 그리고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이미 <폐허의 도시>의 시민으로 길들여져 있었다. 동시에 나는 더 이상 <폐허의 도시>속에 살고 있지 않았다. 그저 평온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었을 뿐. 그 고정된 일상에 몸을 맡긴 채 책 속에서 기쁨을 찾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존재여부를 알 수 없는 '끝'을 향하여 견디는 것, 그것이 바로 삶을 사는 궁극적인 자세가 아닌가 한다. 안나와 이웃들이 편지를 끝맺을 때까지 살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진정한 끝'이란 게 있는지 없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그들은 그들의 시간이 다 할 때까지는 쉼 없이 전진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삶 그 자체에 대한 근본적 열정! 아이러니하게도 생존을 위협받는 절대위기의 상황에서 그 열정은 더욱 불타오른다. 그것은 세상에서 가장 고귀하고 엄숙한 종류의 열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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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책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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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간 이 책을 읽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1주일인 것도 같고 2주일이 걸린 것도 같다. 환상의 책 속에 빠지면 이렇게 시간 관념도 흐릿해지나보다. 나는 '위대한 소설'이라고 감히 평하고 싶다. 인간의 삶과 내면을 향한 집요한 탐구 정신이 본받을만 했다. 그의 소설 속에 나오는 상호텍스트 매체들에도 관심이 갔다. 마지막 문장-나는 그 희망을 가지고 산다-을 읽고 나서, 나는 언젠가 오스터 노벨 문학상을 받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술자인 '짐머'의 추리력을 지켜보면서 작가가 왠만큼 명민하지 않으면 이런 소설은 절대 나오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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