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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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이 아닌 맞사랑은 대개 축복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이 그렇다. 짝사랑의 경우 사랑이 이뤄지지 않은 현실이 지옥이다. 사람들은 그 지옥에서 벗어나길 갈망하고, 사랑을 이룬 순간 모두의 축복을 받는다. 반면 금지된 사랑의 경우 사랑을 이룬 순간에도 그들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다. 세상은 금기를 깬 그들에게 복수할 것이므로. 행여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해도 현실은 이미 지옥이다. 이 경우 사랑이 확실하면 확실할수록 고통은 커진다. 사랑을 포기하는 것만이 지옥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소설에선 사랑을 너무 늦게 깨달아서 이어질 수 없었던 이들이 나온다. 다이스케와 미치요다. 다이스케와 미치요는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미치요는 다이스케의 친구 히라오카와 결혼한다.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결혼생활은 히라오카의 방탕한 생활과 미치요의 병세로 점점 불행해진다. 미치요가 어려운 경제 사정으로 다이스케에게 금전적 도움을 청하고, 다이스케는 미치요 부부를 돕는다. 그러는 중에 다이스케는 자신이 미치요를 사랑하고 있음을 그제야 비로소, 천천히 깨닫는다.

 

다이스케는 서른 살인데 일을 하지 않고 아버지로부터 생활비를 받는다. 집에는 가사를 도와주는 서생과 아주머니도 있다. '감자를 다이아몬드보다 소중히 여기게 된다면 인간은 끝장'이라고 생각하기에 일을 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취미 생활에만 몰두한다. 편하게 보이는 삶은 그에게 짖궂은 질문을 던진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해도 되는가? 백합향이 진동하는 방에서 다이스케는 미치요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미치요도 다이스케를 사랑하고 있었다. 다만 이미 늦어버렸을 뿐.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 순간 세상은 견딜 수 없는 지옥이 된다. 다이스케의 아버지는 경제적 지원을 끊고 히라오카는 절교를 선언한다. 친구의 아내를 사랑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마음을 그대로 따르는 것은 '자연으로서의 사랑'이다. 그러나 '자연으로서의 사랑'을 좇는 순간 그동안 쉽게 누렸던 나머지 것을 모두 포기해야 한다. 자신이 그토록 무시했던 '감자'를 스스로 구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금지된 사랑에 대한 형벌이다.

 

아, 그럼 어쩌란 말이느냐. 다른 문답이었지만 왠지 통하는 대답인 듯한 데라오의 말을 빌리면 이렇다. "누구에게 묻더라도 그다지 잘 알지는 못할 걸세" 그러나 분명, 은방울꽃을 담가 놓은 수반의 물을 마시고 난 후 "괜찮아요. 향기도 난걸요."라고 말하는 여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이스케도 독자도 이 순간 사랑에 대한 윤리는 잠시 미뤄놓고 꽃향기에 취할 수밖에 없다. 이런 걸 소설이 지닌 마술적 힘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그 후'가 되어버리고 나서 회한에 젖지 말고, 바로 지금 당신 곁의 그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는 게 최선일지어다.

비는 저녁 무렵에 그쳤고 밤이 되자 구름이 연이어 흐르고 있었다. 씻은 듯이 맑은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다이스케는 달빛에 빛나는 뜰의 젖은 잎을 오랫동안 툇마루에서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게다를 신고 뜰로 내려섰다. 원래 넓지도 않은 뜰인 데다가 나무가 상당히 많아서 다이스케가 걸을 만한 공간은 별로 없었다. 다이스케는 그 한가운데에 서서 드넓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윽고 객실에서 낮에 사왔던 백합을 가지고 와서 자기 주위에 뿌렸다. 흐트러진 하얀 꽃잎이 달빛을 받아 선명하게 보였다. 어떤 것은 나무 밑의 어둠 속에서 희멀겋게 보였다. 다이스케는 별생각 없이 그 사이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는 잘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다시 방으로 올라갔다. 방 안에는 꽃향기가 아직 가시지 않고 있었다. 29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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