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만약 어느 날 잠에서 일어났는데 익숙한 풍경 속에서 사소한 디테일들이 변해있다면, 뿐만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에게서 너무나도 낯선 타인의 느낌을 받는다면 어떨까. 故 최인호 작가의 마지막 유작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는 자신이 믿어왔던 세계가 뒤틀리는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이 새로운 세계에선 사람과 관계들이 조금씩 어긋나고 뒤틀려 있다. 한순간에 내던져진 것만 같은 이 세계에선 금지되어 있지만 감추어져 있던 욕망들, 편집증적 의심, 증오가 감추어지지 않고 그대로 펼쳐진다. 주차장에서 카섹스를 하는 연인, 노출증의 여인, 아내의 간음 동영상, 매형이었던 대학교수의 여장 취향. 주인공 K는 이런 터부들을 목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도 그 터부에 다가선다. 이는 수년 만에 만난 누이에게 느낀 성욕과 키스방에서 세일러복을 입은 어린 여자와의 키스에서 절정을 이룬다. 


이처럼 몰래 금기를 욕망하던 사람들은 그저 타인이 아닌 모든 주변인이며 또한 나 자신이다. 그걸 깨닫는 순간 이 낯선 타인들은 결국 타인이 아니고 더 이상 낯설지 않다. 이 낯익은 타인들의 도시에서 주인공은 또 다른 자신을 찾아내게 된다. 같은 세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던 또 다른 자신과 그 가족은 누구에게나 같은 시간이 다르게 흘러갈 수 있음을 방증한다. 마치 해리된 자아같은 또 다른 나는, 순수를 상징하는 키스방의 세일러복 소녀를 구하는 장면에서 하나가 된다. 


내재적 관점의 해석도 분분할 수밖에 없는 마당에 외재적 관점의 해석은 더욱 무용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작품이 최인호 작가가 생전 마지막으로 쓴 소설임을 상기해보고자 한다. 삶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라지만 암 투병으로 그 마지막이 어렴풋이 보일 때의 심정이 어떨까. 상상하기 어렵지만 이 소설에서 일관되게 보이던 주인공 K의 염세적, 냉소적인 태도가 그것을 말해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인간이 행할 수 있는 극단적 이타심을(문장은 혼돈의 범벅일지라도) 보여준 것은 뒤틀린 욕망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자신이 바라던 것이 무엇인지를 이 마지막 소설에 남긴 게 아닐까 한다. 

알 수 없는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누가 누군지 모르는 타인들의 집합체 같았다. 잠시 시간을 내 연병장에 모인 오합지졸의 예비군 같은 모임이었다. 서로 피를 나눈 혈연관계라고는 하지만 친숙함이나 다정함 같은 것은 전혀 보이지 않아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모인 사기도박꾼 집단처럼 느껴졌다.
"자, 카메라를 보세요. 저 뒷줄 맨 오른쪽 분 바짝 더 다가서세요."
사진사는 오합지졸의 예비군들을 통솔하는 조교처럼 익숙하게 사람들을 다루었다. K는 너무 더워 땀이 났으므로 손수건을 꺼내 얼굴을 닦았다. K는 자신이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잘 팔리지도 않으면서 매대에 진열된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같다고 생각하였다. 가족이라는 슈퍼마켓에 아내는 아내라는 이름의 상표로, 장인은 신부의 아버지라는 라벨로, 처제는 신부의 역할을 맡은 신상품의 견본으로 이렇게 함께 서 있는 것이다.
p.8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