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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악한 목소리 ㅣ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4
버넌 리 지음, 김선형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2월
평점 :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04
『 사악한 목소리 』
버넌 리 / 휴머니스트
악마의 목소리를 들어본 적 있는가? 인간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거부할 수 없는 것은 바로 '선택'이다. 물건을 사더라도 가격이나 성분을 비교하기도 하고 매번 끼니때마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장 어려운 선택은 인간관계다. 만나야 할까 말아야 할까, 얘기를 할까 말까 등등 알게모르게 원치않은 선택을 하게 되는 인간관계... 쉽게 예를 들자면 길을 걷다 떨어진 돈을 발견했다. 난감한게 그것이 큰 돈이면 경찰에 가져다 줄 것인데 적은 금액의 돈이면 내 주머니에 넣을지, 아니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자리에 다시 떨군다든지... 이 조차도 선택이란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한 평생 악마의 목소리와 싸우고 있다는 거... 악마의 선택은 타인에 의해 움직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내면에 의해서 정처없이 흔들리는 내면과의 싸움이기도 하다.
여성과 공포를 주제로 한 도서임에도 불구하고 '선택'이란 단어를 택한 이유는 <사악한 목소리> 속에 들어 있는 단편이 과거와 현재가 확연히 나눠져 있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두려움과 불안이 대물림되듯 과거와 이어져 있고 과거의 공포가 현재에 찾아와 사악함을 가중시켜, 인간은 선택의 기로에서 매번 헤매고 또 헤매이는 나약한 존재라는 걸 각인시키는 듯 했다.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사악한 공포... 이 책에서 그것을 맛 볼 수 있을것이다.
250년 전에 연인을 살해한 여인이 다시 태어난,누가 봐도 이승의 것이 아닌 기이한 존재라면,
그런 생명체라면
전생에 자신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인해 죽음을 맞은 남자를
제 곁으로 불러올 수도 있지 않겠어요?
<유령 연인>은 과거에 살았던 여인이 환생한 듯 현재가 아닌 과거에 현혹되어 있는 비극적인 여성이 그려져 있다. 어쩌면 그녀의 비극은 그녀 스스로가 자처했을 수도 있겠다. 이야기의 화자는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로 의뢰받은 오크허스트 부부의 저택에서 벌어진 일이다. 250년 전 오크부인의 연인 러브록이 남편에 의해 살해를 당했는데 현재의 오크부인 또한 과거의 그 사건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문제는 사랑이란 이름으로 남편 윌리엄의 집착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는 점...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대저택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끈질긴 사랑>은 현존하는 과거와 영혼의 교감을 나눈다는 스피리디온의 일기문이다. 기록 보관소에서 보았던 책 속의 여인... 넘쳐나는 아름다움으로 많은 남성들을 현혹시킨다는 메데아는 지나가는 길에 마주쳐도 순식간에 사로잡히고 노예처럼 부려져 명을 재촉시키는 요물이기도 한 그녀의 흔적을 찾기로 한다. 그렇게 찾은 편지와 초상화는 스피리디온마저 그녀에게 흠뻑 빠지게 되었고 그런 그녀가 눈 앞에 나타났다. 과연 그는 무사할 수 있을지...
<사악한 목소리>는 죽은 거장의 스타일을 완벽히 모방하는 망누스라는 작가의 이야기다. 하숙집 식탁에 둘러앉아 알비세 백작이 과거 '차피리노'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의 노래는 여성의 감정을 희노애락으로 물들이기도 하지만 세 번째의 노래는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전설이 있었다는거... 그런 그를 무례한 양아치라고 불렀던 밴드라민 고모는 결국 차피리노의 노래를 듣게 된다. 거장에 대한 경멸을 서슴없이 드러냈던 현재의 망누스는 어떤 공포를 맛보게 될지...
과거는 현재를 이끄는 발자취라고 했던가? 하지만 <사악한 목소리>는 과거의 과오를 다시 겪어내지 않기위한 노력으로 현재를 살아가야겠다는 다짐과 믿음을 무참히 밟아버리고 만다. 그렇게 또다른 공포를 예견하는 이야기는 인간이 지키고자 했던 내면을 무너뜨리고 무시와 경멸, 집착과 혐오 그리고 여성의 강함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마법의 숲'에선 선량한 장소의 정령을 불러내며 일상의 평화로움이 삶의 희망이 되길 바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