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 종교와 과학의 관점에서
석영중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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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토옙스키 깊이읽기 』

종교와 과학의 관점에서

석영중 / 열린책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옙스키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면서 다시 대두되고 있는 그의 작품성은 그 누구도 넘나들 수 없는 세계관을 그려내고 있다. 읽은 작품은 '백야'뿐이지만 그 한편으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세계에 빠져들었다니 그 깊이는 작품을 만나지 않고서는 무엇이라라 논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오랫동안 도스토옙스키를 연구하고 강의했던 석영중 교수는 이를 기념하여 과학과 소설을 접목시켜 연구한 논문을 출간하게 됐다. 그것이 바로 <도스토옙스키 깊이읽기>다.

이 책을 만나면서 다소 어려움도 있었지만 결국엔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본질적 인간의 모습을 과학적 근거에 의한 허구와의 연결이 목적이 아니었을까 싶다. 더 쉽게 말하자면 강한 자에겐 약하고 약한 자에게 강한 '강약약강'의 모습을 하고 있는 보편적 인간이, 사실은 강한 자에겐 더 강하고 약한 자에겐 한없이 더 낮은 아량을 가지게되는 인간의 참된 모습을 말이다. 어떻게 보면 <도스토옙스키 깊이읽기>는 마치 종교가 유사과학인 것 마냥 과학적 근거없지만 마치 존재하는 것 처럼 도스토옙스키 작품 안에서 그 신념을 찾은 듯 했다.





<지하로부터의 수기> : 신경 과학자냐 (지하 생활자)냐


우리의 모든 사고와 행동은

무의식적이든 의식적이든 결국 뇌의 활동에서 비롯된다.

이것들은 자아와 뇌라는 두 개의 다투는 실재가 아니라

통합적 전체의 일부이다.

당신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은 뇌이다.


과거 도스토옙스키가 모스크바 푸시킨 동상 제막식 축제에서의 강연을 계기로 그는 '예언자'라 불리게 됐다. 미래를 예견한다기보다 신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예언자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의 작품 <지하로부터의 수기>를 보면 인간의 끊임없는 자유의지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이 논리를 뇌과학으로 풀이한 석영중 교수는 인간의 뇌가 어떤 행동을 실행하기 이전에 뇌에서는 이미 결정이 내려진 상태다. 그렇게 결정에 대한 행위의 책임은 본인에게 있으며 더 나가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 또한 자신의 몫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작품 속의 지하 생활자는 앞에서 언급한 뇌과학과 상반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벌레가 되고 싶어도 벌레가 될 수 없고, 지하에서 나가고 싶어도 결정할 권리조차 얻지 못했던 운명적인 노예로 스스로의 자유의지를 부정한 삶을 살고 있다.

어떻게 보면 적자생존이 아닌가? 환경에 적응해야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인간... 약육강식에 물들어 거침없는 세상속에 있는 듯 없는 듯 물들어가는 인간의 삶 또한 우리의 몫... 결국 리자의 포옹으로 평안을 얻었다고 하는 지하 생활자는 어쩌면 작은 세상에 갇혀있는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죄와 벌> : 신문의 (뉴스)와 복음서의 (영원한 뉴스)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도,

그 어떤 최악의 부자유한 상황에도 적응할 수 있는 대단히 탁월한 존재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유에 대한 열망을 완전히 상실하지는 않는다.


도스토옙스키가 4년간의 유배는 성서와 함께였고 그렇게 태어난 자신만의 복음서가 바로 <죄와 벌>이다. 죄와 벌은 욥기에서 요한 묵시록까지 구신약에 포함된 구절을 삽입해 문학의 토대가 되기도 했는데 가난함에 범죄를 일으킨 라스콜니코프가 훔친 돈을 하나도 쓰지 못했고 범죄에 대한 논문을 써내면서 일시적 정신착란에 의한 범죄로 만들어 냈으니 이는 자아의 죽음과 다름없다고 말한다.

지금도 별반 다를 것이 없는 게... 범죄 소설을 읽다보면 현재 벌어지고 있는 사건과 크게 다르지 않고, 거기에 사실인지 아닌지 모를 사건에 카더라 소식까지 더하면 우리는 너무나 많은 일들을 간접경험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는 신문 뉴스와 복음서의 영원한 뉴스도 모두가 진실일까? 아니면 알리고자 하는 목적만을 기술한 것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악령> : 역설의 시학


즉, 그는 용서받는 게 목적이 아니라

증오받고 증오하는 것이 목적이다.


잉태와 출산이 기본적인 테마라고 소개한 악령은 스타브로긴의 악마적 속성에 대해 논한다. 그리스도의 비움이 인간의 구원이라면 스타브로긴은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흉내내 혁명에 대한 열정이나 비합리적 주의라 알려진 종교적 민족주의를 주입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모방과 비극을 얘기했다면 그에 대한 역설은 조금 다를 것이라 생각했는데 석영중 교수가 말하는 <악령>은 더 따질것도 없는 악마였다. 뒷 이야기 '권태라는 이름의 악'을 보더라도 기분 전환 삼아 행했다는 관망과 살해는 그야말로 치욕적인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것으로도 권태를 해소하지 못한 그도 끝은 좋지 못했다고 하니 왠지 통쾌함마저 들었다.

석영중 교수의 논문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인데 추후에 만날 독자들을 위해 언급하지는 않았다. 우리가 잘 아는 물리학자 아인슈타인도 언급한 소설이 바로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종교가 없는 과학은 절음발이고 과학이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라고 말한 것을 보면 원하고 갈구함에 있어 무언가를 찾아내는 것이 종교적인 힘이라면 발견된 것에 근거를 찾고 정의하는 것이 과학의 힘이 아닐까 싶다. 한층 더 깊이 만날 수 있는 도스토옙스키... 그의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이 책 또한 만나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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