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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
마리아나 엔리케스 지음, 엄지영 옮김 / 현대문학 / 2020년 6월
평점 :
https://hestia0829.blog.me/222019647651

불이 붙은 장미는 나락으로 떨어지듯 자신의 존재를 잃어가고 있다. 처음 이 책에 호감을 느꼈던 이유는 이른 더위와 장마가 찾아온 요즘같은 날, 습한 뜨거움으로 무더위를 달래줄 소재인 공포와 호러라는 소개에 읽게 되었다. 미신과 주술에 얽혀 섬뜩하고 오싹하게 만들어 더위를 해소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감말이다. 문제는 단편으로 구성된 이 책은 결말이 없다. 다만, 그 뒤에 숨겨진 독자가 이루어내는 상상속의 결말은 끔찍하고 참혹하며 소름이 돋을정도로 공포에 휩싸이게 될 것임이 분명하다.
마지막 단편에 포함된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부조리한 차별속에서 무너져가는 여인들의 세뇌적 이상을 그렸다. 주인공 실비나는 열차를 타고 이동하는 중에 대면하게 되는 지하철 여인의 문제에 대해 말한다. 지하철 여인은 불 속에 뛰어들어 몸 전체에 심한 화상을 입었고 얼굴은 형상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녹아내렸다는 표현이 가장 상상하기 쉬울 것이다. 어쨌든 지하철 여인은 그런 모습으로 앉아있는 승객의 뺨에 입을 마추며 당당하게 구걸을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다. 결혼한지 3년째에 바람을 피웠다는 이유로 잠든 자신에게 알코올을 뿌려 이렇게 만들었다고... 사실 그 전에 루실라 사건이라고 아름다운 모델 루실라와 축구선수인 마리오 폰테가 공식으로 연인임을 선포한 후 지하철여인이 말한대로 다툼후 똑같은 일이 벌어진 사건이 있었다. 비슷한 사건이 하나씩 일어나면서 여성들은 부조리한 사회에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지만 의미가 변질되면서 분신의식이 시작되는데...
많은 단편중에 가장 충격적이였던 작품은 더러운 아이로 과거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였지만 지금은 깡패와 여장남자, 마약상들의 소굴로 변한 그곳에 혼자 살겠다며 나선 그녀를 가족은 미친사람 취급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동네만 가면 정신이 맑아지고 대담해지는 자기 자신때문에 그곳으로 간다. 파라과이와 아르헨티나 북부지역에서 그들이 숭배하던 해골인 '산 라 무에르테'를 신봉하던 그들의 어두운 의식은 그 더러운 아이를 만나면서 밝혀지는데, 잔혹하게 베어진 어린아이의 시신은 과연 어떤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쉼없는 의문에 휩싸일 것이다.
저자는 청소년 시기를 괴물이라 표하며 심각한 경제위기 속에 자란 청소년은 하루 아침에 존재가 사라질거란 불안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질풍노도의 시기이기도 하지만 이렇게까지 어두운 면을 드러내는 저자는 단편속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대담함을 보여준다. 마약을 한다거나 하지말라는 일을 골라가며 사건을 일으키고 결국 수렁에 빠져 헤어나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는데 미신과 주술에 얽혀 최악의 상황을 재현한다. 게다가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은 여성성을 불태워 욕망의 대상을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모시키려는 외침을 충동적인 의식으로 되돌리면서 스스로를 괴물로 만드는 모습을 그려낸다. 마지막에 연상되는 결말은 독자의 몫이나 결코 가볍지만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