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스크바의 신사
에이모 토울스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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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6월 21일, 성 안드레이 훈장 수훈자이며 경마 클럽 회원이고 사냥의 명인인 서른세 살 알렉산드르 일리치 로스토프 백작은 내무 인민위원회 소속 긴급 위원회에 출두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출간 된 시 ‘그것은 지금 어디 있는가?‘에 대한 질문을 받습니다.

비신스키 :
왜 그 시를 썼습니까?

로스토프 :
시가 절로 써진 겁니다. 시가 나오려고 내 안에서 꿈틀거리던 날 나는 그저 어느 특정한 날 아침에 특정한 책상 앞에 앉아 있었을 뿐입니다.

이 문답의 끝에 위원회는 로스토프 백작에게 지금 머물고 있는 메트로폴 호텔에 구금하는 조치를 내립니다. 물론 지금까지 호화롭게 머물던 전망 좋은 스위트룸이 아닌 과거엔 호텔을 방문하는 손님들의 수행 집사나 하녀들이 사용하던 다락방 이었다가 지금은 잡동사니와 부서진 가구, 갖가지 물건 잔해들을 보관해두는 창고로 쓰이는 곳이 백작의 새로운 주거공간으로 지정 되었습니다. 기득권을 가진 부유한 귀족이었다가 한 순간 이동의 자유를 박탈당하고 정당한 이유도 없이 핍박을 받는다면 누구라도 화를 내고 부당함을 호소했겠지만 백작은 차분히 자신이 머물었던 방으로 내려가 이제부터 지내게 될 공간에 꼭 가져가야 할 물건들을 선별하고 이 호텔에 머무는 지난 4년 동안 알게 모르게 도와 주고 있던 직원들에게 자신은 괜찮다는 것을 몸소 보여줍니다.

어이없는 사건으로 한쪽 콧수염을 깎여버리고 나머지 수염까지 밀어버린 후 좌절하고 있던 로스토프 백작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9살의 소녀 니나 쿨리코바 였습니다. ‘공주‘에 대해 관심이 많은 이 소녀는 콧수염이 사라진 백작에게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어른들이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 호텔 이곳저곳을 숨어들어 이야기를 듣고, 백작이 호텔에 머물며 다양한 장소들을 잘 알고있다는 착각에 빠져있었음을 깨닫게 만들었습니다.

소녀와 아쉬운 이별을 하고 백작은 자신이 손님이었던 식당 보야르스키에서 웨이터로 일하며 구시대의 인물로 잊혀가면서도 호텔 곳곳에 일하는 이들과 우정을 쌓고 스위트룸에서 좁은 다락방으로 모조리 가져왔던 책들-대부분이 아버지가 읽은-을 읽으며 아름다운 배우와 연인관계를 유지합니다.

소설 [모스크바의 신사]는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의 굴곡진 삶을 통해 1920년대, 30년대, 40년대, 그리고 50년대 중반의 러시아를 직접 살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만듭니다. 책속에 인용되는 러시아 대문호들의 작품들, 발레 공연과 음악들, 역사의 숨겨졌던 비화들, 백작의 어린시절과 대비되는 혁명 이후의 세대인 니나와 같은 소녀, 소년들이 살아낸 세월들, 니나의 딸 소피야를 맡아 키우면서 깨닫게 되는 진화에 필요한 시간 개념들이 의미있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소설은 그가 메트로폴 호텔에 구금 된지 30여년이 지난 1954년 6월 21일 KGB 요원 두 명이 알렉산드르 로스토프 웨이터 주임을 찾아왔다가 그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장면 뒤로 ‘그후‘라는 챕터에서 60대의 키 큰 남자가 니즈니노브고로드 주의 사과나무들 사이, 높게 자란 수풀 속에 서 있는 모습과 허름한 선술집 뒤편의 낡은 방 한쪽 구석에 놓인 2인용 탁자에 호리호리한 몸매의 여인이 막 도착한 기다리던 이를 반기는 장면으로 끝이 납니다. 행동(?)을 촉구하는 듯한 시를 썼다는 이유로 호텔에 평생 구금 되었던 로스토프 백작, 그러나 그는 그로인해 살아남았습니다. 러시아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재산을 몰수 당하고 처형을 당하던 시절을 버텨냈고, 호텔 밖에서 자유를 누리던 바른말 하는 문학인들이 강제 노역을 가거나 소리소문 없이 사라질 때 ‘모스크바의 신사‘는 살아남았습니다.

책을 다 읽고 옮긴이의 말을 읽다가 그제야 소설을 쓴 작가가 러시아나 모스크바와는 전혀 상관 없는 미국 보스턴 인근에서 나고 자라 예일대학과 스탠퍼드대학교를 졸업하고 뉴욕 맨허튼 투자 자문회사에서 일을 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으며 [모스크바의 신사]가 그의 두번째 책이라는 엄청난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가 에이모 토울스야 말로 소설의 주인공 로스토프 백작에 버금가는 인물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러시아의 귀족사회와 시대를 꿰뚫는 통찰력, 고전과 근대, 현대를 아우르는 필력에 정말 감탄합니다. 이 책을 읽어 본 분들이라면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저 감탄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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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운
티파니 D. 잭슨 지음, 김하현 옮김 / 한겨레출판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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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래하길 좋아하는 한 마리 새, 전생에 인어였던 흑인 소녀 인챈티드 존스는 친구 가브리엘라의 도움을 받아 BET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뮤직 라이브 오디션‘에 참가하게 되고 비록 오디션에선 떨어졌지만 월드 스타이자 심사위원인 코리 필즈가 그녀의 재능을 높이 평가한다면서 정식으로 레슨을 받고 실력을 갖춰 자신의 월드 투어도 함께 참여하며 개인 앨범 제작까지 하자는 제안을 했을 때 그야말로 꿈을 이룬 것만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건 그때 일 뿐, 지금 인챈티드는 온통 비트 주스 범벅인 현장에 자신이 왜 그런 모습으로 있었는지 기억해 내지 못하고, 누군가가 현관문을 쾅쾅쾅 두드리는 소리에 굳어버렸습니다.

백인 중심 도시 카운티의 유일한 복장 규정이 없는 사립학교 파크우드 고등학교에 다니는 인챈티드는 넉넉지 않은 가족의 희망이 모두 자신에게 걸려있음을 느끼며 백인들의 차별과 부유한 흑인 아이들의 또다른 차별에도 자신이 좋아하는 바다에서의 수영을 대신해 수영선수로 활동하고 자신을 이 학교에 보내기 위해 고분분투하는 부모님을 대신해 넷이나 되는 동생들을 보살피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신보다 어린 나이에 이미 스타의 반열에 올라 전세계적인 인지도를 갖춘 코리 필즈에게 노래실력을 인정 받았다는 사실에 고무된 인챈티드는 물을 떠난 인어가 되고, 열려 있는 새장의 문 안으로 걸어들어가 벗어날 길을 찾지 못합니다.

책 제목 ‘그로운 Grown‘에는 덧씌워진 어른들의 잘못된 시선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스타가 되기 위해 어린 흑인 소녀들이 스스로 피해자가 되길 자처했을 것이라는 호도와 그녀들의 부모 역시 돈을 목적으로 자식을 미끼 삼아 코리 필즈와 같은 스타들을 유혹하고 협박해 이득을 취하려다 실패하니 성범죄자로 몰고 갔으리라는 여론몰이를 통해 2차, 3차에 이르는 가해를 저지르지만 본인들은 이를 인식하지도 못합니다. 그루밍 성범죄의 피해자들은 가해자의 의도 된 범죄행위로 인해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관계를 모두 단절 당하고 가해자에게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갈 희망이 없다는 세뇌에 가까운 가스라이팅을 당해 정신적으로나 신체척으로 지배를 당하는 가운데 한쪽에서는 그들(피해자)의 행동이 그런 범죄를 불러일으켰다는 어처구니 없는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소설은 불편한 만큼 사회의 어두운 면들을 파헤치고 있습니다. 무심결에 내뱉는 말 한마디가 피해자들에게 더큰 상처를 줄 수 있다는 사실과 본인이 가스라이팅을 당하는 동안엔 결코 기분이 나쁜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피해를 입는 당사자들이 자각하는 게 말처럼 쉽지 않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출판사 제공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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