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라라와 태양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홍한별 옮김 / 민음사 / 2021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작년 가을 지인과 함께 방문한 어느 음식점에서 재미있는 경험을 했습니다. 음식을 주문한 후 한참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갑자기 멜로디 소리가 나면서 정체불명의 물체가 음식을 가져다주는 것이었죠. 자세히 보니 서빙을 하는 로봇이었습니다. 그야말로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의 영역을 빠르게 대체해 나갈 수 있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죠! 오래전 영화에서나 보았던 미래의 모습이 현실화되고 있음에 출처를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갑니다. 며칠 전 인공지능 로봇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을까 하는 작은 의문에 답하는 듯한 소설 한 권을 만났습니다. 거장 '가즈오 이시구로'의 신작 <클라라와 태양>은 바로 이와 같은 질문에 개연성 있는 답변으로 다가오는 저작이죠.

가까운 미래에 인류는 인공지능 로봇의 다양한 역할 수행을 극대화하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이루어냅니다. 소설 속 주인공 '클라라'는 AF(Artificial Friend) 즉, 인공지능을 가진 로봇으로서 인간 아이들과 함께하며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는 목적을 위해 탄생한 존재입니다. 소녀 로봇 클라라는 다른 AF들과는 달리 뛰어난 관찰력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파악하고 인간의 생각과 심지어는 외적 행동의 특징까지 그대로 모방해 낼 정도의 탁월한 지적 능력을 가졌습니다. 로봇 판매 대리점의 쇼윈도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의 모습과 그들이 보이는 행동 패턴, 바깥세상의 분위기를 그녀만이 가진 예민한 관찰력과 분석 능력으로 취합, 분석, 데이터화함으로써 다른 AF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독특한 내재적 능력을 소유한 것이죠. 어느 날 이러한 클라라만이 가진 고유의 능력과 아우라를 직감한 인간 소녀 '조시'는 클라라를 자신의 AF로 데려가길 원합니다.

다른 구매자에게 판매될 뻔한 위기(?)를 모면하고 지루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조시와 클라라의 운명적인 만남과 동반이 시작됩니다. 조시의 집에서 함께 살며 그녀의 곁을 마치 수행비서와 같이 지키는 AF 클라라는 조시가 여느 아이들과는 다름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조시가 매우 병약하다는 것이었죠. 자신의 주인인 여린 심성을 가진 소녀 조시에 대한 AF 클라라의 마음은 로봇이 가질 수 없는 애틋함의 감정으로 표출됩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신이 조시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고자 하는 강렬한 바램으로 이어지게 되죠. 클라라는 동력의 일정 부분을 태양광을 통해 얻는 로봇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렇기에 클라라에게 태양은 자신의 삶을 유지시켜주는 생명의 근원으로서 에너지원이자 때로는 신적 존재로서 숭앙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아픈 조시를 위해 클라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라고는 근교에 있는 헛간을 찾아가 그곳에서 지는 해를 바라보며 조시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일과 공사장에서 매연을 만들어냄으로써 햇빛을 가리는 건설 장비의 파괴라는 조금은 엉뚱한 시도들로 표현됩니다. 그러나 클라라의 조시를 향한 사랑과 어떻게든 그녀의 병이 나아져서 건강하게 되기만을 바라는 마음과는 달리 조시의 엄마가 가진 생각과 계획은 이야기의 결말을 예상치 못하도록 이끌어가는데요...

 

 

저자 가즈오 이시구로가 거장이라 불리는 이유를 알게 해 준 책입니다. 저자는 인공지능 로봇과 병약한 인간 소녀와의 운명적 조우를 통해 현대인들의 인간성 상실에 대한 민낯을 우회하듯 꼬집습니다. 서로를 죽고 죽이는 패륜과 광기의 현장, 인간성 말살의 현주소를 되짚으며 인간이라면 놓치지 말아야 할 타자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중요성을 저자만이 가진 과학적 상상력이라는 레토릭을 통해 훌륭하게 그려낸 것이죠. 그리고 현대 문명 속 AF 클라라는 이러한 작가의 메시지를 바르고 정확하게 투영해 낸 탁월한 문학적 소재가 되어 준 것이고요. 우리는 메마르고 건조한 현대인들의 일상 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리지 않은 채 누군가와 따뜻한 교분을 쌓고 서로의 정을 나눈다는 발상 자체가 넌센스인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리고 저자는 소설을 통해 바로 이 부분을 정확히 건드려줍니다.

 

어쩌면 인간은 전부 외로운 것 같아요. 적어도 잠재적으로는요. p379

 

위의 클라라의 말을 통해 알 수 있듯 저자는 누군가에게 사랑과 위로를 받으며 용납 받고 싶지만 그 누구에게도 받아들여질 수 없는 현대인들의 근원을 알 수 없는 극심한 고독과 존재의 외로움을 명확히 직시했습니다.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숨길 뿐 인간은 잠재적으로는 누구나 외로운 존재인 것이죠. 또한 저자는 인간이 만들어 낸 기계 문명의 부산물을 통해 피폐해진 인간 사회의 환부를 어루만지는 모순의 극치를 보입니다. 소설 속 과학기술의 총아로 대표되는 AF 클라라는 인간 소녀 조시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헌신합니다. 그렇기에 독자들로 하여금 차가운 기계 부속품으로 가득 찼을 클라라의 가슴 안에 따뜻한 심장이 뛰고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죠. 따스한 물과 피가 흐르는 인간조차도 같은 인간에게 줄 수 없는 지고지순한 사랑을 차가운 로봇이 기꺼이 내어줍니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에서 작가의 천재성에 탄식하며 온몸에 닭살이 돋는 듯한 소름을 경험합니다.

더불어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작가는 왜 책의 제목을 '클라라와 태양'이라고 지었을까라는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책의 내용을 상기하는 중 태양이 의미하는 메타포를 깨달았을 때 입에서 외마디 신음소리가 흘러나옵니다. 본서의 초반, 매장 진열대에서 햇살을 받아들이는 클라라에게 다른 소년 AF가 욕심이 많다고 꾸중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AF 클라라에게 태양이 의미하는 바는 로봇의 기능과 개체를 유지시켜주는 에너지원, 즉 생명과 같은 존재인 것이죠. 클라라는 이렇게 태양의 햇살을 갈망합니다. 그러나 소녀 조시를 만난 후 클라라의 사랑의 대상은 더 이상 햇살을 내려주는 물리적 태양이 아닌 자신의 주인으로서의 소녀 조시 자체였던 것이죠. 조시만이 자신을 AF로서 존재하게 만드는 유일하면서도 근원적인 이유로서의 태양이 된 것입니다. 이렇듯 클라라는 태양을 갈망하며 사랑했던 것과 같이 소녀 조시에게 자신의 대가를 바라지 않는 일방적 사랑을 보냅니다. 본서는 이처럼 기계와 인간이라는 조화되지 않을 것만 같은 상이한 존재의 간격을 부드럽고 아름다운 어울림의 필치로 가득 수놓은 명작입니다. 또한 현대 문명의 어두운 그늘과 인간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세계와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적 통찰을 통해 작가의 문학적 내공을 느끼기에 충분한 수작이기도 하고요. 요즘과 같이 눈부신 햇살이 찬란한 때에 만나본다면 마음마저 따뜻해질 작품이 되지 않을까싶네요!

<출판사로부터의 서평 의뢰를 통해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로 작성된 리뷰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퍼맨도 응가를 한대 토이북 보물창고 15
파라곤 북스 지음, 마술연필 옮김 / 보물창고 / 2021년 4월
평점 :
절판


 

결혼, 임신, 출산, 육아의 모든 시간들은 각각의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듯 행하는 pc 게임의 그것과는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각각의 과정들이 통합적으로 연결되어 있기에 현재의 시간은 과거와 미래의 타임라인 위에서 서로에게 깊은 유기적 연관성을 가집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아의 시간도 마찬가지라고 느껴지네요. 출산 후 선잠을 자는 아이로 인해 항상 잠이 부족해서 다크서클이 무릎까지 내려왔던 시기를 통과하고 나면 이유식과 기저귀 탈피의 시간이 옵니다.

둘째 아이가 이제 기저귀를 떼야 하는 시기가 좀 지났는데 쉽사리 기저귀를 벗어버리지 못합니다. 쉬야는 용케도 아기 소변기에 보도록 습관을 들였지만 문제는 응가였습니다. 멋진 그림이 그려져있는 팬티를 사줬고 본인도 평소에 신나게 입고 생활하지만 희한하게도 응가가 마려울 때는 새 기저귀를 갈아입고서야 편하게 응가를 하는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는 첫째 아이 때와는 전혀 다른 상황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난감한 상황을 타개해보고자 인터넷의 육아맘들이 올린 글들도 찾아보고 다양한 조언들을 들어봤지만 딱히 변화의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이 책<슈퍼맨도 응가를 한대>를 만납니다.

이 책은 유아들의 독립적인 배변 훈련을 위해서 만들어진 작은 그림책입니다. 예쁜 일러스트레이션과 몇 장 되지 않는 짧은 스토리로 유아들의 흥미를 끌도록 기획되었네요. 책에서는 본인이 슈퍼맨이라고 여기는 기저귀를 찬 유아가 자신의 집 강아지와 함께 망토와 가면을 쓰고 등장합니다. 자기가 이제 새로운 일을 시도하려고 하는데 그것이 바로 변기에서 응가를 보는 일인 것이죠. 그러면서 슈퍼맨 형아(?)는 이 책을 보게 될 아이들에게 "너도 한번 해 보지 않을래?"라며 변기 사용을 살며시 권합니다. 그리고 슈퍼맨 형아는 자신의 변기 위에 앉습니다. 그러나 즉각적으로 별다른 반응이 없자 일어나서 다시 밖으로 놀러 나가려는 순간 또다시 반응이 오는 것을 느끼고서는 다시 앉아 열까지 숫자를 세며 응가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곧이어 기저귀와의 작별을 외치며 이 책을 읽는 유아 독자들에게 큰 형아 팬티를 입는 즐거움과 환희를 느껴보길 권고하네요.

 

 

재미있습니다. 유아들에게 응가를 성공하면 '큰 형아 팬티'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이 마치 크나큰 명예의 훈장처럼 여겨지도록 적절한 보상기제로 설정되었죠. 일러스트레이션도 유아 독자들의 눈높이에 딱 맞습니다. 유아 그림책의 전형적인 특징인 두꺼운 하드보드 페이지와 선명한 컬러, 적은 글 밥 구성 등 모든 것이 완벽하게 구성된 배변 훈련 놀이북입니다. 책이 도착하고 둘째 아이에게 책을 보여주었습니다. 매우 좋아하고 즐거워하면서 몇 번을 읽어달라고 하네요. 책의 내용을 보며 매우 흥미로워하지만 사실 책 한 번을 읽었다고 그동안 본인이 고집하고 있는 기저귀 배변의 습관이 한순간에 고쳐지기는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잘 타이르기도 하고 약간의 협박(?)도 해보고 본인이 좋아하는 선물을 사주겠다고 보상을 제시해보기도 했지만 이러한 모든 당근과 채찍의 방법이 별반 소용이 없습니다. 쉬야는 화장실에 설치해놓은 유아 소변기로 달려가지만 응가는 그렇지 못함을 보면서 아이가 가진 무엇인가 말 못 하는 고민이나 어려움이 있지는 않을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아이에게 어떠한 불편함이 있기에 유아 변기에 앉는 것이 어려움으로 다가오는 것임을 이해하면서 아직은 좀 더 기다려보게 되네요. 아무튼 <슈퍼맨도 응가를 한대>는 아이의 흥미를 끄는 데 있어서는 일단 1차적으로 합격을 했습니다. 흥미 없는 책들은 별로 쳐다보지도 않는 아이들의 특성상 아이가 흥미를 가졌다는 것 자체로 이 책에 좋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아이의 시선과 손이 쉽게 닿는 곳에 이 책을 잘 꽂아 두었습니다. 언제든 본인 스스로가 책을 꺼내서 펼쳐볼 수 있도록 말이죠. 어차피 글을 읽을 줄은 모르고 그림으로 메시지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유아들의 특성상 예쁜 일러스트레이션을 자주 접하면서 슈퍼맨 형아가 변기에 앉아 있는 모습을 통해 전달하는 메시지를 '역하지각'의 그것과 같이 인지하기를 바랄 뿐이죠.

리뷰의 서두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육아는 정말 하나의 단계를 끝냈다고 보너스 점수가 주어지고 새로운 파워를 얻어 다음 단계의 미션을 수행하는 pc 게임의 성격과는 전혀 다름을 뼈저리게 느끼는 요즘입니다. 출산과 육아는 모든 단계가 통합적으로 인과관계 속에서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한 아이의 습관과 개성, 정체성이 형성되어 가는 일종의 예술입니다. 고통과 인고의 시간을 거쳐 하나의 훌륭한 예술작품이 탄생되듯 아이를 믿고 어느 정도 인내하고 기다려주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 일단 아이가 이 책에 대한 흥미를 가졌기에 언젠가는 책 속 슈퍼맨 형아가 하듯이 변기에 앉아 슈퍼 변기 파워를 외치며 기저귀 없이 볼 일 보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 욕구로서의 카타르시스를 만끽할 순간을 기대하면서 말이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 철학적 신학 시리즈 1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래전 손목시계가 수명을 다한 듯 시침과 분침, 초침이 멈춰있는 것을 보고 수리해서 살려내겠다는 생각으로 시계를 뜯은 적이 있습니다. 시계의 뚜껑을 열고 금세 괜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닫는 데는 단 5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톱니바퀴와 어지럽게 연결된 작은 기계장치들을 보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한 것이죠. 시계 수리공도 아닌 내가 그 복잡한 시계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뚜껑을 연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렇듯 시계 수리는 시계를 만든 사람이나 시계의 구조를 잘 아는 전문 수리공의 영역임을 깨달았던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시켜주는 책 한 권을 만납니다. 조국 교회의 몇 안 되는 탁월한 기독교 지성으로서 안양 열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남준'목사님의 저작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입니다.

이 세상이 정밀한 인과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한 우연성에 기인한 산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세상을 매우 편의적으로 보는 시각일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구상된 결과물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이러저런한 유기적 조합을 통해 탄생된 것이라는 무신론적 주장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분명한 목적과 목표에 의해 구상되고 창조되었음에 대한 신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연구와 사유의 총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도덕의지로써 인간을 다스리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선악 간의 모든 일을 판단하시며 인간이 지성과 의지로써 창조목적에 이바지하며 살도록 통치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고 부릅니다. 본문 中

 

저자인 김남준 목사님은 책을 통해 우선 통치의 근거가 되는 세계의 창조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본체적 영원으로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 자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초시간적인 아심을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세상에 대한 구상이 당신의 계획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 하나님은 굳이 세상을 창조하시려고 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천지창조의 목적을 기술하는 3장에서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심에도 그 충만하심을 창조세계를 통하여 증대하시려는 성향을 가지고 계십니다."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또한 "자신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를 통해 자신을 확장하시며 드러내시고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과 교통하시려는 속성의 결과로서 세상을 지으셨다는 것이죠.

저자는 이렇게 천지창조의 목적을 기술한 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을 이룹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인 '영광'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애매모호했던 영광의 개념을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가 가지는 본체적 영광,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가 주는 신성의 효과로서의 발산적 영광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인간을 비롯한 지성적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드러나는 효과적 영광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창조된 피조물들 특별히 하나님 당신을 닮은 지성적 존재인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덕적 의지로써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꼽는 이 책의 백미는 6장에 등장하는 도덕적 통치의 수단으로서의 '계시'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과 의지를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인데 양식에 따라서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나뉘고 접근성에 따라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됩니다. 특별히 계시와 오성을 설명하는 파트는 초대교회 위대한 교부이며 성학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인간 지성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숙고의 작업을 이뤄냅니다. 김남준 목사님께서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신 아우구스티누스와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장이기도 하죠. 저자는 인간의 지성을 오성과 이성으로 설명합니다. 오성(인텔레겐티아)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어떠한 사물과 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능력으로서 판단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 이성은 오성과의 좁은 의미의 관계에서 볼 때 주어진 지식을 갖고 추론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어내는 힘으로써 표현됩니다. 즉 오성은 직관(인튜이투스)에 관여하고 이성은 추론(라치오키나치오)에 관여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성령의 조명(일루미나치오)이라는 개념입니다. 조명은 바로 인간의 오성을 비추는 빛입니다. 즉, 타락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지성이 가진 능력만으로는 하나님과 신적 세계에 관련된 일들을 직관하거나 추론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조명이라는 거룩한 빛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 대한 신령한 지식들을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성령의 조명하심의 도움을 받아 오성의 변증작용(디아렉티케)과 이성의 추론작용(라치오키나치오)을 통해 계시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신자가 자신의 지성을 부단히도 갈고닦아 날카롭게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맹목적으로 "믿습니다!" 만을 연호하는 맹신적 믿음의 위험성과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른 신자라면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부지런히 성경과 묵직한 신학, 신앙 저작들을 읽어내며 동시에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고전, 역사, 철학서들을 멀리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이 계시를 이해함으로써 두 범주의 지식을 갖게 됨을 설명합니다. 즉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믿음의 규칙'(레귤라에 크레덴디)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생활의 교훈'(프리셉따 비벤디)이 그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통해 온전한 계시를 이해한 신자라면 두 가지의 지식을 갖고 생활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말씀과 삶이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이 따르는 개신교 신앙이 탁상공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실제적 영역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더 간략히 압축한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러한 신자의 삶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추구하는 목적이고 목표이며 신자는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이 땅의 가시적 시간 세계 안에 온전히 구현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만이 바로 하나님의 '효과적 영광'의 표현인 것입니다.

복잡한 시계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시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시계 수리공 밖에 없습니다. 복잡다단한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이죠.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춥기만 합니다. 들끓는 탐욕과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파괴하기에만 급급합니다. 바른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음의 규칙과 삶의 교훈을 실제적인 삶의 지평 속에 온전히 풀어낼 수 있는 신자들이 많아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자신의 삶으로 실현하고자 몸부림치는 신자들이 많아진다면 춥고 어두운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밝아지고 따뜻해지리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죠.

용어 자체가 생소한 다수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 등장하기에 사실 일반적인 신자들이 쉽게 접근해서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고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인 김남준 목사님도 책의 서문에서 이러한 부분을 염려하여 책을 읽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 말 다 했죠! 그러나 바른 신자의 삶을 추구한다면 분명 이 책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명저입니다. 공부하듯 옆에 노트를 끼고 앉아서 차근차근 읽어보십시오!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와 복잡한 개념들이 이내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지만 진득함과 인내로서 저자가 전해주는 진리의 정수를 조금씩 빨아들일 때의 그 지적 희열은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었을 때 대충 믿는 무식한 신앙의 안일함이 가져다주는 말초적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희로서 다가올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70세 사망법안, 가결
가키야 미우 지음, 김난주 옮김 / 왼쪽주머니 / 2018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70세 사망법안 가결!

 모든 국민은 70세가 되는 해의 생일을 기점으로

 30일안에 죽어야 한다. 단 예외는 왕족 뿐이다.

 

섬뜩한 법안입니다. 건강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모든 국민은 70세가 되는 해에 무조건 안락사를 당해야 한다는 강제 법안의 시행이 결정된 것이죠. 한국에도 다수의 마니아층 팬들을 보유한 일본 작가 '가키야 미우'의 작품 <70세, 사망법안 가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책의 주제가 너무나 자극적이고 생경하기에 서점의 프리뷰를 통해 꼭 한번 읽어보고자 다짐하다가 마침내 일독을 했습니다.

갈수록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경제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평균 수명의 연장은 노인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부추겼습니다. 이로 인해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 국민연금 보험 등 재정 파탄의 위기가 눈앞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이러한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정부는 모든 국민은 70세가 되는 해에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30일 안에 죽어야 하고, 편안히 죽을 수 있는 안락사 방법 몇 가지를 결정해서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종의 합법적 제노사이드 법안을 발의하고 가결시킵니다. 단 왕족,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들은 이 법안에서 예외이고요!

소설 속에는 '도요코'라는 55세의 평범한 주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3년째 와상으로 누워있는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고 있죠. 식사, 배설, 목욕 거기에다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행하는 도요코의 사생활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친구들은 자식들 다 키웠다고 여행 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침상에 꼼짝없이 누워 며느리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며 마치 하녀 부리듯 하는 시어머니의 성화 속 도요코에게는 꿈만 같은 일일뿐이죠. 올해 58세로 중견 기업을 다니는 남편은 집안 일과 특별히 어머니의 병수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기 밖의 모르는 이기적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급기야는 70세까지 12년 남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조기 은퇴를 신청하고 친구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겠다는 폭탄 발언을 하죠.

30세 맏딸, '모모카'는 노인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요양보호사입니다. 엄마인 도요코의 할머니 병수발 도움 요청에 기겁을 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와 독립을 하죠. 29세 아들, '마사키'는 명문 대학을 나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퇴사를 하고, 현재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거의 히키코모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입니다. 당연히 할머니 병수발이나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죠. 그리고 두 명의 시누이와 그들의 남편들이 있지만 어머니의 유산만을 탐낼 뿐 병수발 이야기만 나오면 진저리를 치는 전형적 출가외인 딸들입니다. 이렇듯 작가는 와상이지만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말짱하기에 누워서 100세까지는 거뜬히 살 것만 같은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며느리 도요코의 온전한 몫으로 설정해놓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가정의 상황은 마침내 독박 병수발이라는 삶의 무게에 짓눌린 며느리의 가출로 인해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는데요...

 

 

 

장수는 불행의 씨앗인가?

 

소설 한 권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며칠이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소설 버전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쉽사리 결론 내리고 답하기 어려운 딜레마로 가득한 책이었죠. 누구나 나이를 먹고 대부분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때가 오겠죠. 그런데 단지 병들고 거동할 수 없어 타인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고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제한한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위악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저출산 초고령화 시대가 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바라볼 때 경제인구의 감소와 부양해야 할 노령 인구의 증가는 다양한 국가 재정의 파탄을 의미하는 현실적 어려움의 결과를 예견하게 만듭니다. 또한 소설 속 주인공 도요코와 같이 노인시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병든 노부모를 직접 수발해야 하는 가족들의 육체적, 정신적, 재정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한 집안에 아픈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한 가정의 평안과 평화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환자를 돌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 

작가는 이러한 모든 상황들을 적절하게 믹스해서 독자가 쉽사리 결론 내리지 못하도록 마치 미궁과 같이 아주 기교하면서도 흥미로운 플롯을 설정해놓았습니다. 간혹 성미가 급한 독자가 쉽게 결론을 내려 버리면 이내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부비트랩에 걸리도록 기묘한 장치들을 곳곳에 숨겨 놓은 것이죠. 70세에는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해괴망측한 법안에 대해 현실적이고 경제적이며 이해타산적인 해석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윤리도덕적이며 인륜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 선택의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견해는 인간 생명을 저울에 올려놓는 것과 같이 실상 무리수를 던지는 생각이 아닐 수 없죠. 그렇다고 가족들의 삶을 담보한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범 사회적 문제를 간과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살아 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한 가정 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정 안에 먹구름이 드리워집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다양한 난제들이 발생하게 되죠.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인간을 향한 사랑과 사회의 공적 부조, 희생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말이 쉽지요! 그렇습니다. 막상 닥쳐보면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압니다. 작가는 이와 같이 쉽게 결정할 수 없고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소설은 며느리 도요코의 가출 이후 가족 안에 드러나는 반전의 기미를 보이며 끝을 맺습니다. 해피엔딩의 냄새도 살짝 맡을 수 있죠. 70세 사망 법안의 폐지라는 정치권의 움직임도 포착됩니다. 물론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마치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만 같이 인간 존엄이라는 윤리도덕적 문제와 저출산 고령화라는 사회경제적 문제라는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절묘하게 믹스한 작가의 기예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책입니다. 보통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소설을 읽죠. 그러나 본서는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로서의 독특한 묘미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 법안이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시행된다면 나는 앞으로 몇 년이나 남았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초판본 데미안 (리커버 한정판, 양장 블랙벨벳 에디션) -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이순학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근현대 독일 문학계의 한 획을 그은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헤르만 헤세'를 떠올립니다. <데미안>은 헤세가 이미 다수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후 자신의 글이 오로지 작품성으로만 인정을 받고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간된 책입니다. 헤세 본인의 자아성찰적 자기 성장의 과정을 기록한 글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 성장 소설은 아닙니다. 독일식 버전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소설 초반부의 내용이 등장하지만 이내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소 철학적입니다.

이야기는 작중 화자인 에밀 싱클레어의 소년기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다우며 질서정연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싱클레어가 목격한 또 다른 세계는 가난과 싸움, 저속한 욕설, 술 취함, 도둑질과 범죄가 가득한 소위 밑바닥 계층의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부잣집 도련님으로 고생 모르고 자란 싱클레어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덩치 크고 거친 불량배 소년에게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힐만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죠. 주인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가엾은 새끼 강아지처럼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주기적으로 돈과 물건을 상납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순간이 계속되던 중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에 '막스 데미안'이라는 학생이 전학을 옵니다. 어디를 보나 외모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여느 소년의 평범함 대신 조숙함과 사람의 눈길을 끄는 베일에 가려진 듯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인물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불가사의한 느낌의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크로머에게 붙잡혀 포로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싱클레어의 고통을 들춰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데미안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날부터 싱클레어에게 거머리와 같이 딱 붙어서 피를 빨아먹었던 크로머가 도리어 싱클레어를 피하는 일이 생기게 되죠.

이후 부유하고 아늑하며 따뜻한 선의가 가득한 부모님의 세계와 가난과 더러움, 폭력과 범죄가 들끓는 비참한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하층민의 세계라는 이원화된 세상의 접점에 서 있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기성 권위가 붙잡고 고수했던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발칙한 사유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동생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에 대해 살인자요 악인으로서의 카인이 아닌 힘과 용기,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카인이라는 기존 성경과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을 뒤집는 의견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 양옆에 달린 두 명의 강도 중 회개를 통해 구원받은 강도보다는 자신의 악을 끝까지 고수한 강도야말로 회개라는 유혹을 거부한 용기와 특별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식의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하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123

 

<데미안>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유명한 문장이죠. 본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이 문장 하나에 집약적으로 농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인식의 프레임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문장에 나오는 아브락사스는 초대교회 이단으로 유명한 영지주의의 신적 대상으로 신이자 악마이며 빛과 어둠의 세계를 동시에 가지는 존재입니다. 즉 싱클레어가 서 있었던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포괄하는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의 공존을 의미하며 어느 한쪽에 쏠려 있는 인간성의 본질로는 절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성찰할 수 없고,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일 또한 요원함을 의미합니다.

헤세는 본서를 통해 일정한 인식과 사회적 약속이라는 무형의 틀로 짜 맞추어져 있는 세상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암시합니다. 선과 악, 질서와 무질서, 부와 가난, 빛과 어둠과 같이 이원화되어 이미 판이 다 깔려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것이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어떤 학교를 가야 하고 어느 직장에 취직해서 어떠한 모습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일단의 인생 플랜이 부모님과 선생님으로 대변되는 기성 권위에 의해 짜여 있는 획일화되고 몰개성화된 현대인들에게 본서가 시사하는 바는 남다릅니다.

스스로의 자아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라는 인식의 프레임을 깨고 나오는 것! 헤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본서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의 진의를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내가 진짜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정한 탐구가 사라진 세대에게는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사유의 주제이죠. 물론 현실의 냉혹함 속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자들의 개똥철학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요.

아무튼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시작되어 전쟁이 끝난 후 출간된 본서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헤세는 국가 권력과 사회적 제약, 관습에 억눌리고 터부시되었던 독일 청년 세대의 집단화와 몰개성화에 대한 반발과 반동으로서 자신의 개성, 내면의 자아와 실존의 문제를 찾아가도록 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자극제를 투여해 준 셈이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싱클레어에게 있어 데미안의 존재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싱클레어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인식의 빗장을 열어젖히도록 도운 것은 외부의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 내면에 이미 살아 숨 쉬며 다른 삶을 갈망했던 제2의 또 다른 자아로서의 데미안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21세기, 문명의 최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자아 상실의 문제일 겁니다. 눈뜨고 일어나면 어제의 세상이 아닌 낯설기만 한 공간 속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철학적이며 근원적인 사유의 작업을 해내는 사람은 드뭅니다. 누군가가 짜 맞추어 준 획일성이라는 게토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어쩌면 대다수의 현대인들 또한 소설 속 데미안을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가는 지도 모르죠. 기존 질서와 권위가 말하는 "이러한 삶을 살아라! 이런 삶만이 옳다!"라는 정형화되고 공식화된 마치 수학 문제 답안을 보는 것과 같은 사회 속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기에 아마도 나치 정권이 헤세의 작품들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았을까요? 더불어 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 등 허무주의자들의 체취와 인식의 불꽃, 지식의 빛, 아브라삭스, 내면의 소리 등 소설 곳곳에 숨겨진 영지주의의 코드들을 찾아보는 것도 책이 주는 보너스이자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