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판본 데미안 (리커버 한정판, 양장 블랙벨벳 에디션) -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이순학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6월
평점 :
구판절판


 

근현대 독일 문학계의 한 획을 그은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헤르만 헤세'를 떠올립니다. <데미안>은 헤세가 이미 다수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후 자신의 글이 오로지 작품성으로만 인정을 받고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간된 책입니다. 헤세 본인의 자아성찰적 자기 성장의 과정을 기록한 글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 성장 소설은 아닙니다. 독일식 버전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소설 초반부의 내용이 등장하지만 이내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소 철학적입니다.

이야기는 작중 화자인 에밀 싱클레어의 소년기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다우며 질서정연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싱클레어가 목격한 또 다른 세계는 가난과 싸움, 저속한 욕설, 술 취함, 도둑질과 범죄가 가득한 소위 밑바닥 계층의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부잣집 도련님으로 고생 모르고 자란 싱클레어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덩치 크고 거친 불량배 소년에게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힐만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죠. 주인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가엾은 새끼 강아지처럼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주기적으로 돈과 물건을 상납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순간이 계속되던 중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에 '막스 데미안'이라는 학생이 전학을 옵니다. 어디를 보나 외모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여느 소년의 평범함 대신 조숙함과 사람의 눈길을 끄는 베일에 가려진 듯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인물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불가사의한 느낌의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크로머에게 붙잡혀 포로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싱클레어의 고통을 들춰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데미안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날부터 싱클레어에게 거머리와 같이 딱 붙어서 피를 빨아먹었던 크로머가 도리어 싱클레어를 피하는 일이 생기게 되죠.

이후 부유하고 아늑하며 따뜻한 선의가 가득한 부모님의 세계와 가난과 더러움, 폭력과 범죄가 들끓는 비참한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하층민의 세계라는 이원화된 세상의 접점에 서 있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기성 권위가 붙잡고 고수했던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발칙한 사유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동생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에 대해 살인자요 악인으로서의 카인이 아닌 힘과 용기,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카인이라는 기존 성경과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을 뒤집는 의견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 양옆에 달린 두 명의 강도 중 회개를 통해 구원받은 강도보다는 자신의 악을 끝까지 고수한 강도야말로 회개라는 유혹을 거부한 용기와 특별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식의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하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123

 

<데미안>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유명한 문장이죠. 본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이 문장 하나에 집약적으로 농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인식의 프레임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문장에 나오는 아브락사스는 초대교회 이단으로 유명한 영지주의의 신적 대상으로 신이자 악마이며 빛과 어둠의 세계를 동시에 가지는 존재입니다. 즉 싱클레어가 서 있었던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포괄하는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의 공존을 의미하며 어느 한쪽에 쏠려 있는 인간성의 본질로는 절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성찰할 수 없고,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일 또한 요원함을 의미합니다.

헤세는 본서를 통해 일정한 인식과 사회적 약속이라는 무형의 틀로 짜 맞추어져 있는 세상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암시합니다. 선과 악, 질서와 무질서, 부와 가난, 빛과 어둠과 같이 이원화되어 이미 판이 다 깔려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것이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어떤 학교를 가야 하고 어느 직장에 취직해서 어떠한 모습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일단의 인생 플랜이 부모님과 선생님으로 대변되는 기성 권위에 의해 짜여 있는 획일화되고 몰개성화된 현대인들에게 본서가 시사하는 바는 남다릅니다.

스스로의 자아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라는 인식의 프레임을 깨고 나오는 것! 헤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본서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의 진의를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내가 진짜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정한 탐구가 사라진 세대에게는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사유의 주제이죠. 물론 현실의 냉혹함 속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자들의 개똥철학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요.

아무튼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시작되어 전쟁이 끝난 후 출간된 본서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헤세는 국가 권력과 사회적 제약, 관습에 억눌리고 터부시되었던 독일 청년 세대의 집단화와 몰개성화에 대한 반발과 반동으로서 자신의 개성, 내면의 자아와 실존의 문제를 찾아가도록 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자극제를 투여해 준 셈이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싱클레어에게 있어 데미안의 존재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싱클레어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인식의 빗장을 열어젖히도록 도운 것은 외부의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 내면에 이미 살아 숨 쉬며 다른 삶을 갈망했던 제2의 또 다른 자아로서의 데미안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21세기, 문명의 최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자아 상실의 문제일 겁니다. 눈뜨고 일어나면 어제의 세상이 아닌 낯설기만 한 공간 속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철학적이며 근원적인 사유의 작업을 해내는 사람은 드뭅니다. 누군가가 짜 맞추어 준 획일성이라는 게토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어쩌면 대다수의 현대인들 또한 소설 속 데미안을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가는 지도 모르죠. 기존 질서와 권위가 말하는 "이러한 삶을 살아라! 이런 삶만이 옳다!"라는 정형화되고 공식화된 마치 수학 문제 답안을 보는 것과 같은 사회 속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기에 아마도 나치 정권이 헤세의 작품들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았을까요? 더불어 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 등 허무주의자들의 체취와 인식의 불꽃, 지식의 빛, 아브라삭스, 내면의 소리 등 소설 곳곳에 숨겨진 영지주의의 코드들을 찾아보는 것도 책이 주는 보너스이자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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