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도덕적 통치 - 철학적 신학 시리즈 1
김남준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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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손목시계가 수명을 다한 듯 시침과 분침, 초침이 멈춰있는 것을 보고 수리해서 살려내겠다는 생각으로 시계를 뜯은 적이 있습니다. 시계의 뚜껑을 열고 금세 괜한 짓을 저질렀음을 깨닫는 데는 단 5초도 걸리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톱니바퀴와 어지럽게 연결된 작은 기계장치들을 보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 지 도통 감을 잡지 못한 것이죠. 시계 수리공도 아닌 내가 그 복잡한 시계를 어떻게 해보겠다고 뚜껑을 연 자체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이렇듯 시계 수리는 시계를 만든 사람이나 시계의 구조를 잘 아는 전문 수리공의 영역임을 깨달았던 어린 시절 기억을 소환시켜주는 책 한 권을 만납니다. 조국 교회의 몇 안 되는 탁월한 기독교 지성으로서 안양 열린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김남준'목사님의 저작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입니다.

이 세상이 정밀한 인과관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단순한 우연성에 기인한 산물이라고 여기는 것은 세상을 매우 편의적으로 보는 시각일 것입니다. 이 책은 바로 세상이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구상된 결과물이 아니라 우연한 기회에 이러저런한 유기적 조합을 통해 탄생된 것이라는 무신론적 주장을 거부합니다. 오히려 분명한 목적과 목표에 의해 구상되고 창조되었음에 대한 신학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연구와 사유의 총체입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따라 도덕의지로써 인간을 다스리십니다. 이 일을 위하여 하나님은 인간이 행한 선악 간의 모든 일을 판단하시며 인간이 지성과 의지로써 창조목적에 이바지하며 살도록 통치하십니다. 이것을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라고 부릅니다. 본문 中

 

저자인 김남준 목사님은 책을 통해 우선 통치의 근거가 되는 세계의 창조 목적을 이해하기 위해서 시간과 영원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본체적 영원으로서 시간을 초월하시는 영원 자체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개념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초시간적인 아심을 통해서 세상이 창조되기 전부터 세상에 대한 구상이 당신의 계획 속에 있었음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왜 하나님은 굳이 세상을 창조하시려고 하셨는가에 대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 천지창조의 목적을 기술하는 3장에서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충족하심에도 그 충만하심을 창조세계를 통하여 증대하시려는 성향을 가지고 계십니다." 미국의 위대한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 또한 "자신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창조된 세계를 통해 자신을 확장하시며 드러내시고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과 교통하시려는 속성의 결과로서 세상을 지으셨다는 것이죠.

저자는 이렇게 천지창조의 목적을 기술한 후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인지를 설명합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영광으로 자연스러운 귀결을 이룹니다. 대다수의 신자들은 교회에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 중 하나인 '영광'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있는 경우가 드뭅니다. 그렇기에 저자는 애매모호했던 영광의 개념을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하나님 존재 자체가 가지는 본체적 영광, 하나님의 장소적 임재가 주는 신성의 효과로서의 발산적 영광 그리고 이 책에서 다루는 인간을 비롯한 지성적 피조물들이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임으로써 드러나는 효과적 영광이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고 창조된 피조물들 특별히 하나님 당신을 닮은 지성적 존재인 인간을 지으시고 그들과 교제하며 그들을 도덕적 의지로써 다스리십니다. 그리고 이러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받아들이는 인간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이죠.

개인적으로 꼽는 이 책의 백미는 6장에 등장하는 도덕적 통치의 수단으로서의 '계시'를 철학적으로 설명하는 부분이었습니다. 계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생각과 의지를 인간에게 드러내 보여주시는 것인데 양식에 따라서는 자연계시와 초자연계시로 나뉘고 접근성에 따라서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로 구분됩니다. 특별히 계시와 오성을 설명하는 파트는 초대교회 위대한 교부이며 성학인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적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인간 지성에 대한 상세한 고찰과 숙고의 작업을 이뤄냅니다. 김남준 목사님께서 크나큰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신 아우구스티누스와 청교도의 황태자 '존 오웬'의 향기가 물씬 묻어나는 장이기도 하죠. 저자는 인간의 지성을 오성과 이성으로 설명합니다. 오성(인텔레겐티아)은 인식의 대상이 되는 어떠한 사물과 일의 본질을 직관적으로 깨닫는 능력으로서 판단 작용과 관련이 있습니다. 반면 이성은 오성과의 좁은 의미의 관계에서 볼 때 주어진 지식을 갖고 추론하여 새로운 지식을 얻어내는 힘으로써 표현됩니다. 즉 오성은 직관(인튜이투스)에 관여하고 이성은 추론(라치오키나치오)에 관여한다는 것이죠. 그리고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바로 성령의 조명(일루미나치오)이라는 개념입니다. 조명은 바로 인간의 오성을 비추는 빛입니다. 즉, 타락으로 인해 어두워진 인간의 지성이 가진 능력만으로는 하나님과 신적 세계에 관련된 일들을 직관하거나 추론할 수 없으며 오직 성령의 조명이라는 거룩한 빛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고 그분에 대한 신령한 지식들을 밝히 깨달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인간은 성령의 조명하심의 도움을 받아 오성의 변증작용(디아렉티케)과 이성의 추론작용(라치오키나치오)을 통해 계시의 진리를 깨닫고 하나님에 관해 알 수 있게 되는 것이죠. 그렇기에 신자가 자신의 지성을 부단히도 갈고닦아 날카롭게 유지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더불어 맹목적으로 "믿습니다!" 만을 연호하는 맹신적 믿음의 위험성과 한계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또한 바른 신자라면 성경의 말씀을 바르게 깨닫도록 성령의 조명하심을 구하는 기도와 함께 부지런히 성경과 묵직한 신학, 신앙 저작들을 읽어내며 동시에 인간과 세상을 이해하기 위한 인문고전, 역사, 철학서들을 멀리해서는 안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저자는 인간이 계시를 이해함으로써 두 범주의 지식을 갖게 됨을 설명합니다. 즉 무엇을 믿어야 할지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믿음의 규칙'(레귤라에 크레덴디)과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지식으로서의 '생활의 교훈'(프리셉따 비벤디)이 그것입니다. 바른 말씀을 통해 온전한 계시를 이해한 신자라면 두 가지의 지식을 갖고 생활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는 말씀과 삶이 균형을 이룬다는 의미입니다. 즉, 자신이 따르는 개신교 신앙이 탁상공론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이라는 실제적 영역 속에서 구체적인 형상으로 표출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더 간략히 압축한다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겠네요! 그리고 이러한 신자의 삶이야말로 바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가 추구하는 목적이고 목표이며 신자는 자신의 삶으로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이 땅의 가시적 시간 세계 안에 온전히 구현해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만이 바로 하나님의 '효과적 영광'의 표현인 것입니다.

복잡한 시계를 고칠 수 있는 것은 시계를 가장 잘 이해하는 시계 수리공 밖에 없습니다. 복잡다단한 이 세상을 도덕적으로 통치하실 수 있는 분 또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이죠. 인간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춥기만 합니다. 들끓는 탐욕과 이기적인 인간의 마음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파괴하기에만 급급합니다. 바른 계시의 말씀을 이해하고 믿음의 규칙과 삶의 교훈을 실제적인 삶의 지평 속에 온전히 풀어낼 수 있는 신자들이 많아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의 도덕적 통치를 자신의 삶으로 실현하고자 몸부림치는 신자들이 많아진다면 춥고 어두운 세상이 조금씩이나마 밝아지고 따뜻해지리라는 점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죠.

용어 자체가 생소한 다수의 신학적이고 철학적인 개념이 등장하기에 사실 일반적인 신자들이 쉽게 접근해서 한 번에 이해하기에는 조금 어렵고 난해할 수도 있습니다. 저자인 김남준 목사님도 책의 서문에서 이러한 부분을 염려하여 책을 읽는 방법까지 친절하게 설명해 주고 있으니까 말 다 했죠! 그러나 바른 신자의 삶을 추구한다면 분명 이 책은 반드시 읽어봐야 할 명저입니다. 공부하듯 옆에 노트를 끼고 앉아서 차근차근 읽어보십시오! 도통 이해하기 어려운 명제와 복잡한 개념들이 이내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은 유혹을 불러일으키지만 진득함과 인내로서 저자가 전해주는 진리의 정수를 조금씩 빨아들일 때의 그 지적 희열은 책의 마지막 뚜껑을 덮었을 때 대충 믿는 무식한 신앙의 안일함이 가져다주는 말초적 즐거움과는 비교할 수 없는 환희로서 다가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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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사망법안, 가결
가키야 미우 지음, 김난주 옮김 / 왼쪽주머니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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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세 사망법안 가결!

 모든 국민은 70세가 되는 해의 생일을 기점으로

 30일안에 죽어야 한다. 단 예외는 왕족 뿐이다.

 

섬뜩한 법안입니다. 건강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모든 국민은 70세가 되는 해에 무조건 안락사를 당해야 한다는 강제 법안의 시행이 결정된 것이죠. 한국에도 다수의 마니아층 팬들을 보유한 일본 작가 '가키야 미우'의 작품 <70세, 사망법안 가결>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책의 주제가 너무나 자극적이고 생경하기에 서점의 프리뷰를 통해 꼭 한번 읽어보고자 다짐하다가 마침내 일독을 했습니다.

갈수록 저출산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경제 인구는 줄어드는 반면 의학기술의 발달로 인한 평균 수명의 연장은 노인 인구의 폭발적 증가를 부추겼습니다. 이로 인해 건강보험과 장기요양보험, 국민연금 보험 등 재정 파탄의 위기가 눈앞으로 다가오게 된 것이죠. 이러한 사회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 정부는 모든 국민은 70세가 되는 해에 자신의 생일을 기점으로 30일 안에 죽어야 하고, 편안히 죽을 수 있는 안락사 방법 몇 가지를 결정해서 본인이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일종의 합법적 제노사이드 법안을 발의하고 가결시킵니다. 단 왕족,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들은 이 법안에서 예외이고요!

소설 속에는 '도요코'라는 55세의 평범한 주부가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13년째 와상으로 누워있는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들고 있죠. 식사, 배설, 목욕 거기에다가 모든 집안일을 도맡아 행하는 도요코의 사생활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친구들은 자식들 다 키웠다고 여행 다니며 자유로운 생활을 만끽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는 침상에 꼼짝없이 누워 며느리에게 끊임없이 잔소리를 해대며 마치 하녀 부리듯 하는 시어머니의 성화 속 도요코에게는 꿈만 같은 일일뿐이죠. 올해 58세로 중견 기업을 다니는 남편은 집안 일과 특별히 어머니의 병수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자기 밖의 모르는 이기적 캐릭터로 등장합니다. 급기야는 70세까지 12년 남은 자신의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조기 은퇴를 신청하고 친구와 함께 세계여행을 떠나겠다는 폭탄 발언을 하죠.

30세 맏딸, '모모카'는 노인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요양보호사입니다. 엄마인 도요코의 할머니 병수발 도움 요청에 기겁을 하고, 일찌감치 집을 나와 독립을 하죠. 29세 아들, '마사키'는 명문 대학을 나와 선망의 대상이 되는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인간관계의 어려움으로 퇴사를 하고, 현재는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서 거의 히키코모리와 같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 인물입니다. 당연히 할머니 병수발이나 집안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죠. 그리고 두 명의 시누이와 그들의 남편들이 있지만 어머니의 유산만을 탐낼 뿐 병수발 이야기만 나오면 진저리를 치는 전형적 출가외인 딸들입니다. 이렇듯 작가는 와상이지만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 말짱하기에 누워서 100세까지는 거뜬히 살 것만 같은 시어머니의 병수발을 며느리 도요코의 온전한 몫으로 설정해놓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이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 보이는 이 가정의 상황은 마침내 독박 병수발이라는 삶의 무게에 짓눌린 며느리의 가출로 인해 악화일로로 치닫게 되는데요...

 

 

 

장수는 불행의 씨앗인가?

 

소설 한 권이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 며칠이었습니다.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의 소설 버전이라고 불러도 될 만큼 쉽사리 결론 내리고 답하기 어려운 딜레마로 가득한 책이었죠. 누구나 나이를 먹고 대부분은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을 필요로 하게 될 때가 오겠죠. 그런데 단지 병들고 거동할 수 없어 타인의 도움을 받는 처지가 되었다고 살아 숨 쉬는 인간의 수명을 인위적으로 제한한다는 발상 자체가 참으로 위악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편 저출산 초고령화 시대가 되어가는 우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바라볼 때 경제인구의 감소와 부양해야 할 노령 인구의 증가는 다양한 국가 재정의 파탄을 의미하는 현실적 어려움의 결과를 예견하게 만듭니다. 또한 소설 속 주인공 도요코와 같이 노인시설의 도움을 받지 못하는 병든 노부모를 직접 수발해야 하는 가족들의 육체적, 정신적, 재정적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한 집안에 아픈 사람이 한 명만 있어도 한 가정의 평안과 평화는 이미 물 건너 간 것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환자를 돌보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죠.

​ 

작가는 이러한 모든 상황들을 적절하게 믹스해서 독자가 쉽사리 결론 내리지 못하도록 마치 미궁과 같이 아주 기교하면서도 흥미로운 플롯을 설정해놓았습니다. 간혹 성미가 급한 독자가 쉽게 결론을 내려 버리면 이내 반대편에 도사리고 있는 부비트랩에 걸리도록 기묘한 장치들을 곳곳에 숨겨 놓은 것이죠. 70세에는 모든 사람들이 죽어야 한다는 해괴망측한 법안에 대해 현실적이고 경제적이며 이해타산적인 해석으로 접근할 것인가 아니면 윤리도덕적이며 인륜적이고 종교적인 관점으로 접근할 것인가? 선택의 문제는 오롯이 독자들에게 던져진 질문입니다.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이라는 공리주의적 견해는 인간 생명을 저울에 올려놓는 것과 같이 실상 무리수를 던지는 생각이 아닐 수 없죠. 그렇다고 가족들의 삶을 담보한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과 범 사회적 문제를 간과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살아 있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깊은 상념에 빠집니다. 한 가정 안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가정 안에 먹구름이 드리워집니다. 사회경제적으로도 다양한 난제들이 발생하게 되죠. 그러나 이러한 문제의 해결은 결국 인간을 향한 사랑과 사회의 공적 부조, 희생의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습니다. 말이 쉽지요! 그렇습니다. 막상 닥쳐보면 쉽게 내뱉을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압니다. 작가는 이와 같이 쉽게 결정할 수 없고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에 대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뒤흔들어 놓습니다. 소설은 며느리 도요코의 가출 이후 가족 안에 드러나는 반전의 기미를 보이며 끝을 맺습니다. 해피엔딩의 냄새도 살짝 맡을 수 있죠. 70세 사망 법안의 폐지라는 정치권의 움직임도 포착됩니다. 물론 소설은 열린 결말로 끝을 맺습니다.

 

마치 신발을 짝짝이로 신은 것만 같이 인간 존엄이라는 윤리도덕적 문제와 저출산 고령화라는 사회경제적 문제라는 어울리지 않는 주제를 절묘하게 믹스한 작가의 기예에 박수를 보내게 되는 책입니다. 보통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소설을 읽죠. 그러나 본서는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로서의 독특한 묘미가 있습니다. 그나저나 이 법안이 폐지되지 않고 그대로 시행된다면 나는 앞으로 몇 년이나 남았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계산기를 두드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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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데미안 (리커버 한정판, 양장 블랙벨벳 에디션) -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헤르만 헤세 지음, 이순학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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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독일 문학계의 한 획을 그은 작가를 꼽으라면 단연코 '헤르만 헤세'를 떠올립니다. <데미안>은 헤세가 이미 다수의 작품으로 명성을 얻은 후 자신의 글이 오로지 작품성으로만 인정을 받고 성공할 수 있는지를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에밀 싱클레어'라는 가명으로 출간된 책입니다. 헤세 본인의 자아성찰적 자기 성장의 과정을 기록한 글이라고 하지만 단순히 청소년 성장 소설은 아닙니다. 독일식 버전의 <호밀밭의 파수꾼>과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소설 초반부의 내용이 등장하지만 이내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소 철학적입니다.

이야기는 작중 화자인 에밀 싱클레어의 소년기부터 시작됩니다. 모든 것이 풍족하고 아름다우며 질서정연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싱클레어가 목격한 또 다른 세계는 가난과 싸움, 저속한 욕설, 술 취함, 도둑질과 범죄가 가득한 소위 밑바닥 계층의 세계였습니다. 그리고 어느 날 부잣집 도련님으로 고생 모르고 자란 싱클레어의 인생을 바꾸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프란츠 크로머라는 덩치 크고 거친 불량배 소년에게 자신의 인생을 저당 잡힐만한 실수를 저지르게 된 것이죠. 주인에게 목덜미를 붙잡힌 가엾은 새끼 강아지처럼 싱클레어는 크로머에게 주기적으로 돈과 물건을 상납하는 상황에 처합니다.

이러한 고통의 순간이 계속되던 중 싱클레어가 다니는 학교에 '막스 데미안'이라는 학생이 전학을 옵니다. 어디를 보나 외모에서 풍기는 아우라가 여느 소년의 평범함 대신 조숙함과 사람의 눈길을 끄는 베일에 가려진 듯 신비스러움을 간직한 인물이었죠. 그러던 어느 날 불가사의한 느낌의 데미안이 싱클레어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크로머에게 붙잡혀 포로와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는 싱클레어의 고통을 들춰냅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데미안이 무슨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모르지만 다음날부터 싱클레어에게 거머리와 같이 딱 붙어서 피를 빨아먹었던 크로머가 도리어 싱클레어를 피하는 일이 생기게 되죠.

이후 부유하고 아늑하며 따뜻한 선의가 가득한 부모님의 세계와 가난과 더러움, 폭력과 범죄가 들끓는 비참한 인간 군상이 살아가는 하층민의 세계라는 이원화된 세상의 접점에 서 있었던 싱클레어는 데미안을 통해 기성 권위가 붙잡고 고수했던 기존의 질서에 대한 발칙한 사유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예를 들어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동생을 죽인 인류 최초의 살인자였던 카인에 대해 살인자요 악인으로서의 카인이 아닌 힘과 용기, 개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카인이라는 기존 성경과 전통적 교회의 가르침을 뒤집는 의견을 말합니다. 또한 예수의 십자가 양옆에 달린 두 명의 강도 중 회개를 통해 구원받은 강도보다는 자신의 악을 끝까지 고수한 강도야말로 회개라는 유혹을 거부한 용기와 특별한 개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식의 그야말로 발상의 전환을 이야기하죠.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p123

 

<데미안>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도 한 번쯤은 보았을 법한 유명한 문장이죠. 본서가 말하려고 하는 핵심이 이 문장 하나에 집약적으로 농축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 모든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인식의 프레임을 깨고 나와야 한다는 것이죠. 문장에 나오는 아브락사스는 초대교회 이단으로 유명한 영지주의의 신적 대상으로 신이자 악마이며 빛과 어둠의 세계를 동시에 가지는 존재입니다. 즉 싱클레어가 서 있었던 전혀 다른 두 세계를 포괄하는 아브락사스는 선과 악의 공존을 의미하며 어느 한쪽에 쏠려 있는 인간성의 본질로는 절대 자신의 내면을 정직하게 들여다보며 성찰할 수 없고, 자신의 참된 자아를 찾아가는 일 또한 요원함을 의미합니다.

헤세는 본서를 통해 일정한 인식과 사회적 약속이라는 무형의 틀로 짜 맞추어져 있는 세상 속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해내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암시합니다. 선과 악, 질서와 무질서, 부와 가난, 빛과 어둠과 같이 이원화되어 이미 판이 다 깔려 있는 상태에서 그것을 벗어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며 웬만한 용기가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것이죠.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전에 이미 나는 어떤 학교를 가야 하고 어느 직장에 취직해서 어떠한 모습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일단의 인생 플랜이 부모님과 선생님으로 대변되는 기성 권위에 의해 짜여 있는 획일화되고 몰개성화된 현대인들에게 본서가 시사하는 바는 남다릅니다.

스스로의 자아와 인생의 의미를 찾기 위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라는 인식의 프레임을 깨고 나오는 것! 헤세는 "인간이 자기 자신을 향해 나아가는 일보다 더 하기 싫은 일은 없다"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본서를 통해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의 진의를 잘 녹여내고 있습니다. 내가 진짜 되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가에 대한 진정한 탐구가 사라진 세대에게는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만한 사유의 주제이죠. 물론 현실의 냉혹함 속 입에 풀칠하기도 바쁜 사람들에게는 배부른 자들의 개똥철학 같은 소리일 수도 있지만요.

아무튼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가운데 시작되어 전쟁이 끝난 후 출간된 본서의 시대적 배경을 염두에 둘 때 헤세는 국가 권력과 사회적 제약, 관습에 억눌리고 터부시되었던 독일 청년 세대의 집단화와 몰개성화에 대한 반발과 반동으로서 자신의 개성, 내면의 자아와 실존의 문제를 찾아가도록 하는 데 있어 효과적인 자극제를 투여해 준 셈이죠.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싱클레어에게 있어 데미안의 존재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아마도 싱클레어의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진 인식의 빗장을 열어젖히도록 도운 것은 외부의 데미안이 아닌 싱클레어 내면에 이미 살아 숨 쉬며 다른 삶을 갈망했던 제2의 또 다른 자아로서의 데미안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21세기, 문명의 최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는 자아 상실의 문제일 겁니다. 눈뜨고 일어나면 어제의 세상이 아닌 낯설기만 한 공간 속에서 한 명의 인간으로서 자신이 누구이며 어디로부터 와서 무엇을 위해 살다가 어디로 가는가와 같은 철학적이며 근원적인 사유의 작업을 해내는 사람은 드뭅니다. 누군가가 짜 맞추어 준 획일성이라는 게토 안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현실 가운데 어쩌면 대다수의 현대인들 또한 소설 속 데미안을 마음속 깊은 곳에 품고 살아가는 지도 모르죠. 기존 질서와 권위가 말하는 "이러한 삶을 살아라! 이런 삶만이 옳다!"라는 정형화되고 공식화된 마치 수학 문제 답안을 보는 것과 같은 사회 속에서 이 책이 가지는 의미가 남달랐기에 아마도 나치 정권이 헤세의 작품들을 금서로 지정하지 않았을까요? 더불어 프리드리히 니체, 쇼펜하우어 등 허무주의자들의 체취와 인식의 불꽃, 지식의 빛, 아브라삭스, 내면의 소리 등 소설 곳곳에 숨겨진 영지주의의 코드들을 찾아보는 것도 책이 주는 보너스이자 빼놓을 수 없는 재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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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일상이 예배가 되다
토니 라인키 지음, 오현미 옮김 / CH북스(크리스천다이제스트)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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삐삐, 시티폰을 기억하시나요? 2천 년대 태생들이 아니라면 기억하고 있을 추억의 물건들이죠. 이후 2G폰을 거쳐 지금의 5G 스마트폰까지 인류의 통신 기술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습니다. 더불어 스마트폰과 함께 우리의 실생활에 깊이 파고들었던 콘텐츠는 단연 사회관계망 서비스(SNS)라고 볼 수 있죠. 이미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pc 기반 1세대 토종 SNS인 싸이월드를 대신해 스마트폰의 보급과 더불어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블로그,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트위터,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들입니다. 이처럼 스마트폰은 우리의 일상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21세기 최고의 발명품 중 하나가 되었네요. 그런데 이 스마트폰은 현대인들에게 동전의 양면과 같이 유용함과 부작용이라는 두 가지 얼굴을 내밉니다. 며칠 전 스마트폰과 기독교 신자들의 일상과 신앙의 문제와의 연관성을 고찰한 아주 독특하고 흥미로운 주제의 책 한 권을 읽었습니다. 이 책은 스마트폰이 가진 장점과 폐해를 기독교인의 관점에서 상세하게 고찰합니다. 책을 읽다가 "이 사람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라는 생각을 하며 저자의 이력을 유심히 살펴보게 만든 책이었죠. 그만큼 개인적으로 내용과 문체에서 있어서 탁월함을 느꼈을 정도로 글을 맛있게 썼습니다.

책은 '스마트폰이 나를 바꾸는 12가지 방식'이라는 원제에서도 드러나듯이 신자들의 삶과 스마트폰과의 관계를 성경적, 철학적, 인문학적, 과학기술적으로 흥미롭게 설명해 줍니다. 저자는 '테크놀로지 신학'이라는 생소한 용어를 사용합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은 스마트폰이라는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신적 존재를 탄생시켰죠. 스마트폰은 지혜롭게 사용한다면 우리의 종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의 경우에는 우리의 우상이며 신(神)이 될 수도 있음을 경고합니다. 8천 명의 신자를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약 73%가 눈만 뜨면 경건의 시간보다는 밤새 나에게 온 카톡과 SNS의 알림 들을 살펴보는 것이 일상의 첫 번째 일정임을 말합니다. 폰의 알람으로 잠을 깨우고 날씨와 그날의 일정을 확인하며 밤새 사건사고, 주가 폭락과 같은 소식을 전달받고 친구가 가족 여행을 가서 SNS에 찍어 올린 맛집 사진을 보며 키득거리며 '좋아요'와 댓글을 답니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행하는 우리의 일상적인 모습이죠.

저자는 폰에 집중할 때 신자의 삶은 참된 것에 집중하지 못하게 되며 실제 피와 살을 지닌 이웃들의 삶에 무관심하게 된다고 말하죠. 이제 사람들은 몸은 한 공간 안에 있지만 정신과 마음은 전부 폰의 세계 속에서 각자의 관심사를 향해 무한 나래를 펼칩니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군중 속의 고독이 이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 같아요. 또한 저자는 인정 중독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SNS에 올린 나의 게시물의 '좋아요'와 댓글, 팔로워 숫자의 증감을 보며 누군가에게 인정받고자 갈망하는 인정 중독에 걸린 사람들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변덕스러운 지지에 의해 우리의 삶이 지탱되지 않음을 일깨워 주신다. 우리의 삶은 만사에 미치는 하나님의 주권으로 지탱됨"을 말합니다.

 

 

나는 접속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p54

 

저자는 모든 사람들의 마음 안에는 "혹시 내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멀어지면 어쩌나, 사람들에게 잊히면 어쩌나, 이제 별 볼 일 없는 인물이 되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다"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내면을 정확히 꿰뚫어 본 통찰이 아닐 수 없네요. 과학기술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그에 상응하는 내면의 토양이 가진 비옥함이 없기에 현대인들의 마음은 닻을 잃은 배처럼 안정감 없이 이리저리 흔들립니다. 스마트폰에 접속할 때 나의 존재 이유가 생기는 것만큼 불행하고 끔찍스러운 일도 없죠.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님 안에서 찾지 못할 때 신자는 전지전능하며 무소부재한 스마트폰과 SNS가 투여해 주는 '좋아요'와 댓글이라는 빨간색 1회분 마약을 게걸스럽게 구하는 삶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 나가 다른 모든 영광보다도 그분의 영광을 귀하게 여기면, 인간의 인정이라는

소란스러운 쾌감을 버릴 수 있다. 우리 삶의 진정성 여부는 인간의 박수갈채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p90~91

 

아직 유아인 둘째 아이가 스마트폰의 액정 화면을 두 손가락으로 확대하고 스크롤을 내리는 모습을 보며 경악을 금치 못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도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단 몇 번의 관찰과 조작으로 완벽하게 스마트폰 유저가 되어버리는 아이의 모습을 보며 순간 소름이 돋았습니다. 빅데이터, 알고리즘은 어떻습니까? 사용자의 클릭과 방문, 시청 시간 등을 데이터화해서 관심도를 분석하여 나의 눈앞에 관련 상품과 사이트 등을 설탕 뿌리듯 뿌려줍니다. 과학기술에 의해 완벽하게 셋업 된 인간 구상을 지켜보며 무서움을 느낍니다. 마치 '조지 오엘'의 소설 <1984> 빅브라더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요.

 

또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전설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SNS는 인생의 낭비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죠. 얼마 전 10년간 사용했던 페이스북 계정을 탈퇴했습니다. 현재는 서평을 목적으로 블로그와 인스타그램만 사용하고 있는데요 책 사진을 찍고 서평을 올리면서 퍼거슨 경이 말이 느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책의 저자는 절제와 고독의 미를 이야기하며 절제를 통한 균형감을 유지할 수 있는 절제 괴물이 되라고 말합니다. 아울러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이 오직 한 가지 사실, 즉 이들이 자기 방에서 조용히 머물지 못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라고 말한 '블레즈 파스칼'의 말을 인용하며 영혼을 채우는 참된 고독의 중요성과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는 세대의 민낯을 고발합니다.

 

집중력 결여, 현실과의 괴리, 인정 중독, 과학 기술의 인간 지배, 시간 낭비와 같은 화두를 비롯해 많은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스마트폰과 SNS의 문제는 신자들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을 예배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여전히 코로나19의 맹위가 수그러들지 않는 시간 속에서 스마트폰은 분명 신자들에게 있어 훌륭한 비대면 예배의 도구로써 쓰임 받고 있습니다. 신자에게는 무엇을 찍어 올려야 하고 순간을 기록해야만 한다는 강박감 없이 지금 나의 주변 가족과 친구, 이웃을 그 실제와 현존으로 사랑하는 삶이 필요합니다. 스마트폰과 SNS를 우상으로 삼을 것인가,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도구이자 종으로서 삼을 것인가의 선택은 우리에게 던져진 문제인 것이죠!

 

우리는 믿음으로 현재 삶을 누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

즉, 삶의 매순간을 '포착해야' 한다는 강박감 없이 그 순간을 즐기는 법을 알아야 한다.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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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시학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35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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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믹 캐릭터로 유명한 짐 캐리가 주연한 '트루먼쇼'와 명배우 브루스 윌리스가 주연한 '식스 센스'라는 영화의 공통점은 탄탄한 시나리오와 관객들의 영혼을 뒤흔드는 소름 끼치는 반전의 요소를 갖췄다는 점이죠. 이렇듯 좋은 이야기들은 예나 지금이나 설득력 있는 전개를 위해서 '플롯'이라는 극에 있어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개념을 탑재합니다. 그런데 이 플롯은 이미 기원전 4세기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서 '시학'이라는 이름의 철학과 학문으로 연구되었습니다. 소피스트들에 의해 '테크네'로서의 실용적인 지식이 유포되었던 당시 상황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철학과 합리적인 원칙 없이 실용성만을 강조했던 테크네의 본질과 원리를 규명합니다. 그러면서 당시 사람들에게 인기 있었던 '비극'을 연구하며 시학을 탄생시키게 되죠.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시학은 비극, 희극, 서사시, 서정시 모두를 포괄하는 의미입니다. 본서 <아리스토텔레스 시학>은 총 26장으로 구성됩니다. 원래는 총 2권으로 1권에서는 비극과 서사시, 2권에서는 희극을 다루었는데 현재는 1권만 전해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전반부에서는 시 일반의 내용을 다루고 본론에서는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비극에 대해 이야기하며 마지막 3부에서는 서사시에 대해 말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모방하는 일에 있어 큰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인간이 선한 인격과 미덕을 고양하는 데 있어서 바른 감정을 느끼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했죠. 그런데 이러한 바른 감정의 표출은 당시 유행했던 비극이라는 공연 도구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소피스트들에 의해서 실용적인 기술에 지나지 않았던 것을 당당한 철학과 학문의 분야로 승격시킨 것은 바로 아리스토텔레스가 이 분야에 대해서 큰 의미를 두었다는 반증입니다. 대중 예술인 비극을 통해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감으로써 그들에게 바른 감정의 표출을 이끌어 낼 수 있다면 이로 인한 건강한 감정과 판단은 사람들의 고매한 인격과 미덕, 선한 인품을 보장한다고 여겼던 것이죠.

비극은 양념을 친 온갖 언어를 곳곳에 배치해, 낭송이 아니라 배우의 연기를 통해, 훌륭하고 위대한 하나의 완결된 사건을 모방하여 연민과 공포를 느끼게 함으로써 그 감정의 정화를 이루어내는 방식이다. p26

그러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의 6가지 특성을 말하는데 그중에서 비극의 몸통을 구성한다고 볼 수 있는 플롯을 위해서 많은 지면을 할애하죠. 쉽게 말해서 플롯은 행위나 사건을 구성하는 뼈대가 되는 이야기입니다. 다양한 정황과 사건들이 서로 인과관계 속에서 필연성과 개연성을 갖고 톱니바퀴처럼 맞물려서 서로에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극의 상황을 치달리게 하는 것이죠. 그리고 그 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반전과 인지, 수난의 요소가 포함됩니다.

 

 

 

 

서두에서 영화 트루먼쇼와 식스 센스 이야기를 꺼냈는데 이번에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영화 한 편이 책의 내용과 계속 오버랩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난해 전 세계를 놀라게 한 아카데미 시상식 4개 부문을 석권한 영화 '기생충'이었습니다. 본서에서 말하는 탄탄한 플롯과 역대급 반전, 인지, 수난의 모든 요소가 이처럼 잘 녹아져 있는 영화가 드물죠. 우선 "가장 훌륭한 비극은 플롯이 단순하지 않고 복합적이어야 하고,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나 사건이 있어야 한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염두에 둘 때 영화 기생충은 이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듯합니다. 사실 유머 코드를 영화 곳곳에 적절히 배치한 봉준호 감독의 센스와 탁월한 배우들의 열연이 영화를 비극이라기보다는 희비극에 가깝게 만들었죠. 하지만 플롯은 러닝타임 내내 마치 외줄타기를 보는 듯 적당한 텐션을 유지하며 관객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애간장을 졸이게 만듭니다.

그리고 숨겨져 왔던 지하방의 진실이 밝혀진 영화의 중간과 마지막 장면에서는 반전과 인지의 요소를 매우 휼륭하게 투여함으로써 다시 한번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영화의 묘미를 선보입니다. 더불어 수난의 장치 또한 적절하게 사용함으로써 훌륭한 비극이 갖추고 있어야 할 반전, 인지, 수난의 기법을 진득하게 녹여낸 작품이 아닐 수 없죠.

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은유를 잘 사용할 줄 아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이것만은 다른 사람이 가르쳐 줄 수 없으며 천재의 징표다. 은유를 잘 사용한다는 것은 유사성을 찾아내는 능력이 탁월하다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영화의 제목이 은유하는 기생충은 다른 개체에 기생하며 영양분을 빨아먹는 존재죠. 봉준호 감독은 부잣집에 들러붙은 한 가족과 이미 오랜 시간 그 집의 지하방에서 존재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생충으로 은유했죠. 이러한 모습을 볼 때 봉준호 감독은 이미 천재성을 지닌 연출자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마지막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가능하긴 하지만 믿을 수 없는 일보다는 불가능하지만 개연성 있는 일을 선택해야 한다. 믿을 수 없는 일로 플롯을 구성해서는 안 된다."라고 강조합니다. 사실 영화 기생충은 이 조건에 딱 들어맞습니다.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인데 어쩌면 가능할 수도 있겠네!라고 생각할 수 있는 충분한 개연성을 지녔다는 말이죠.

서평에 웬 영화 이야기?

240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전해져오는 탁월한 철학자의 메시지가 최근 우리의 일상에서 만난 너무나 훌륭한 영화 한 편에 녹록히 녹아져 있다는 사실에 흥분해서 주저리 늘어놓아봤습니다. 그런데 책을 덮으며 생각해 보면 기실 우리네 인생 자체가 비극이요 희극이며 삶의 발자취가 새겨진 서사시가 아닐까요? 어린 시절 '왕년에 내가", "라떼는 말이야"를 호기스럽게 외치셨던 동네 어른들의 막걸리 입담 속 이야기들이 어쩌면 어설프지만 반전과 인지, 수난의 요소를 두루 갖춘 훌륭한 인생극의 표본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수사학>과 더불어 단순한 유흥거리로서 전락할 수 있었던 비극, 희극, 서사시를 일종의 철학 체계와 학문으로서 승화시킨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적 역량을 살펴볼 수 있는 저작이었습니다. 더불어 매일 아침 눈 뜨면 맞닥뜨려야 하는 우리의 일상이 비극임과 동시에 희극이라는 아이러니컬한 현실을 볼 때 한편의 비극을 관람하며 그 안에서 불러일으켜진 공포와 연민을 통한 감정의 정화(카타르시스)라는 인지적 메커니즘은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도 필요한 요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책을 통해 오늘도 살아내야 하고 버텨내야만 하는 타자가 아닌 본인의 굴곡진 반전과 인지, 수난의 희비극적 일상의 터전 속에서 철학자가 건네는 진정한 행복의 단면을 발견할 수 있다면야 이 작은 책은 자신의 소임을 다한 것이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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