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여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소미미디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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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일본 문학의 거장 '히가시노 게이고'하면 범죄 추리 소설의 장인 이미지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그만큼 히가시노 게이고가 범죄 추리물을 많이 남겼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간혹 그의 작품 중 인간 심성에 대한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꽤 있다.

가령 작가 데뷔 35주년을 맞아 출간한 <녹나무의 파수꾼>과 같은 작품은 죽고 죽이는 범죄 추리 장르와는 거리가 멀다. 얼마 전 <녹나무의 여신>이 출간되었다. 전작 <녹나무의 파수꾼>이 호평 속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른 이후 4년 만이다.

사실 전작을 읽어본 적이 없기에 망설였다. 스토리 연결에 있어 접점을 놓치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이었지만 기우였다. 전작을 몰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스토리의 개별성이 잘 지켜진 작품이다.

월향신사에 있는 영험한 능력을 지닌 녹나무를 중심으로 다양한 인간 군상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펼쳐진다. 각기 출발점이 다르지만 결국에는 하나의 목표점으로 수렴된다.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에 사람들이 녹나무에 자신의 소원과 마음을 맡기는 예념을 한다. 누군가의 예념을 수념함으로써 상대방의 마음을 받기도 하는 일련의 과정이 마치 입력된 정보를 또 다른 시냅스에 전달하는 신경 전달 체계와 같다.

주인공 레이토는 녹나무의 파수꾼이다. 월향신사의 종무소에서 일하며 녹나무에 기념하기 위해 신사를 찾는 이들을 돕는 역할을 한다. <녹나무의 여신>에는 어딘지 모르게 연약하고 아픈 이들이 적지 않게 등장한다. 레이토의 이모이며 전직 녹나무의 파수꾼이었던 치후네 여사는 경도인지장애를 앓고 있다.

우연찮게 알게 된 여고생 유키나의 집안은 너무나 가난하다. 이러한 그녀의 배경이 스토리의 전체적 얼개를 이루어가 사건의 중심에 서게 한다. 모토야라는 남자 중학생은 뇌종양으로 인해 단기 기억 상실 증세를 지닌 채 살아간다. 그렇기에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기억이 깨끗하게 포맷된다.

이처럼 <녹나무의 여신>은 제각기 아픔과 약점을 지닌 인간들의 삶이 한데 어우러져 묘한 하모니를 이룬다.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고 싶어서 예념을 하고 그 마음을 알고 싶어서 수념을 한다. 이러한 일련의 모든 과정을 통해 게이고 작가는 인간의 심상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작가만의 기예를 펼친다.

인간은 누구나 어떠한 절대적인 존재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기 원하는 예탁의 심리가 있다. 작가는 이 부분을 정확히 직시했고, 그것을 소설의 훌륭한 모티브로 사용하는 능력을 발휘했다.

게이고 작가가 범죄 장르만 탁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은 그가 일반적인 사람들이 가진 보편적 성정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그만의 심리 묘사를 통해서 잘 증명된다. 선한 사람들에 대한 게이고 식 접근은 한 없이 따뜻하다.

녹나무에게 자신의 미래를 위탁하는 모토야의 모습은 그가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와 겹쳐져 심정적 모순을 일으킨다. 앞을 장담할 수 없는 사람에게 미래란 무슨 의미일까?

더불어 소설 곳곳에 숨겨진 코드는 기억이며 추억이다. 경도인지장애를 앓는 치후네 여사의 사라져가는 기억, 뇌종양으로 단기기억상실증을 가진 모토야의 모습을 통해 작가는 현재의 중요성과 함께 공유하는 시간이 가진 가치의 밀도를 짙게한다.



책을 덮으며 생각한다. 인간은 누구나 혼자 일 수 없으며 그것은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상념이라는 씨줄과 날줄에 의해 타인과 엮어진다. 사람들이 녹나무를 찾는 이유는 저마다의 깊은 고민에 의해서다. 타인에게 함부로 털어놓을 수 없는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생각을 녹나무에게만은 내비칠 수 있다.

그런데 또 다른 모순은 자신의 마음을 혈연으로 맺어진 사람이 수념할 수 있다는 점이다. 알리기 싫은 그 무엇을 누군가가 알아주었으면 하는 그 알 수 없이 복잡 미묘한 심리적 역설이 녹나무라는 중립적 대상물에 효과적으로 투사되었다. 작가는 현대인이 가진 공허함과 불안함의 심리 기제를 정확히 간파했다.

그러나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가족과 인생이라는 더 근본적인 주제로까지 연결시켰고, 삶의 깊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 우리에게 왜 중요한지에 관한 깊은 철학적 물음 또한 던진다.

녹나무의 여신에게 미래를 신탁하고 싶어 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무엇인가? 현재는 우리에게 벼락처럼 쏟아진 축복이다. 현재성을 지닌 모든 것은 예쁘다. 현재 내가 숨을 쉬고 있다면 삶의 조건과는 상관없이 인생은 아름답다.

<녹나무의 여신>은 어쩌면 게이고 식 '카르페 디엠'의 한 버전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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