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왕자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지음,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그림, 정연복 옮김 / 시공주니어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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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사물의 물성을 그대로 느낀다면 현실적이며 이성적으로 여긴다. 반면 사물의 이면을 기발한 상상 속으로 끌어들일 때 동심이 살아있다고 말한다.

중절 모자를 모자로 보는 것이 정상적인 세상 속에서 보아뱀이 코끼리를 삼킨 모습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자칫 비정상적인 모습으로 비친다. 그런데 여기 다소 엉뚱하지만 인생의 깊은 맛을 담고 있는 작은 책 한 권이 있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으며 만난 <어린 왕자, A. 생텍쥐페리 지음, 베아트리체 알레마냐 그림, 정연복 옮김, 시공주니어 펴냄>는 동심과 현실적 관점의 경계를 가르는 시금석과 같은 고전이다.



사막에 불시착한 비행사가 만난 작은 소년 '어린 왕자'는 B612 별에서 왔다. 활화산과 휴화산이 있고, 바오밥나무와 꽃 한 송이가 피어있는 작은 별에서 온 어린 왕자는 다양한 모습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별들을 방문한다.

홀로 왕으로서의 권위를 내세우며 살아가는 왕을 만난다. 왕으로서 무언가를 끊임없이 명령하고 요구한다. 그러나 따르는 사람은 없다. 둘째 별에서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바라며 살아가는 허영심 가득한 사람도 만난다. 술 마시는 것이 부끄러운데 그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서 술을 마신다는 술꾼의 별도 가보고, 아무 의미 없이 허망하게 바쁘기만 한 일중독자도 만난다. 자신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른 채 주어진 일에 몰두하는 가로등지기도 만나고, 경험이나 체험을 배제한 채 막연한 지식을 추구하는 지리학자도 만난다.

어린 왕자가 만난 모든 어른들은 세상이 가진 보편적 오류와 부조리를 그대로 담지한 인물들이다. 저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한 채 물결에 떠밀려 무의미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심상을 희화적으로 표현했다. 이들에 대한 수사가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자화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작은 별에서 찾지 못했던 인생의 참의미를 찾기 위해 떠난 어린 왕자의 여행은 결국 지구에서 만난 작은 여우와의 만남을 통해 완성되는 듯 하다. 여우는 길들임의 숨은 의미를 알려준다.

B612 별의 작은 꽃 한 송이가 지구에서 만난 수많은 꽃들과 비교할 수 없이 큰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작은 꽃이 어린 왕자에게 길들여졌기 때문이다. 길들임은 곧 누군가에게 특별한 의미가 됨을 말한다.

흔하디 흔한 존재가 아니라 누군가에게만 특별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어린 왕자가 깨달은 길들임의 진의다. 참된 관계는 의미 있는 관계이며 시간의 헌신이라는 자양분을 먹고 자란다. 더불어 진실한 관계는 책임이 요구되는데 사람들은 이점을 망각하며 살아간다.

오랜 시간과 성실한 책임의 무게를 저버린 현대인의 관계는 피상적일 수 밖에 없고, 그 안에서 쳇바퀴 돌듯한 관계의 공허함을 맛본다.

생텍쥐페리가 살다간 20세기는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과 더불어 두 번의 큰 전쟁을 통해 인간성에 대한 의심할 수 밖에 없는 회의가 물밀듯 차오른 시대였다.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의심이 팽배할 수 밖에 없던 시대 속에서 탄생한 <어린 왕자>는 과학이라는 신 앞에 맹종하는 현대인의 고갈된 인간성을 비추는 거울이다.



책을 덮을 때 쯤 마음을 울리는 명문이 눈에 들어온다.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아.''

그렇다. 정작 중요한 진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진실은 항상 자신의 모습을 사물의 이면에 감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이며 진리라고 여기는 사고가 팽배한 사람들에게 참됨을 발견하는 일은 요원하다.

오래 전 아직은 세상의 때가 덜 묻었을 적 읽은 <어린 왕자>와 세상의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는 지금 다시 만난 <어린 왕자>의 느낌은 사뭇 다르다. 서글프게도 중절모를 코끼리를 삼킨 보아뱀으로 볼 수 있는 눈은 이제 없다.

''다들 그렇게 살아! 제발 유난 떨지 마!'' 몸담은 세상이 익숙하고, 세상이 말하는 메시지가 정답처럼 들리는 시대 속에서 안간힘을 써본다. 속절없이 물결에 휩쓸리기 싫어서 발버둥을 쳐본다.

본질을 잃어버린 세상 속 <어린 왕자>가 우리에게 던지는 교훈은 결코 가볍지 않다. 무엇을 위해 살아가며 어떤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가 돌아볼 필요를 느끼는가? 그렇다면 <어린 왕자>의 속삭임에 귀 기울여봐도 좋다.

너무나 당연하기에 간과했던 수많은 삶의 장면들이 무성 영화의 필름과 같이 짙은 기억으로 되살아남을 경험할 수도 있다. 아동 도서로만 치부되었던 작은 고전이 가진 힘이 제법 크다. ''중요한 것과 아름답게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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