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피쿠로스 쾌락 (그리스어 원전 완역본) 현대지성 클래식 47
에피쿠로스 지음, 박문재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쾌락주의로 대변되는 에피쿠로스 철학이 가장 많이 받는 오해와 누명은 이들의 사상이 현대의 질펀한 변태적 향락으로 이해되기에 그렇다. 하지만 철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관심 있는 독자라면 에피쿠로스 학파가 주장한 쾌락의 참된 본의를 손쉽게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쾌락의 관념은 모든 고통의 부재를 말하는 '아포니아'와 마음이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참된 평안을 갖게 되는 '아타락시아'로 표출된다. 세계와 인간 욕망, 고통에 대한 바른 지식을 통해 얻게 되는 아포니아와 아타락시아는 필연적으로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다.

고무적인 즐거움과 날아갈 듯한 기쁨, 미칠 것만 같은 환희는 동적인 쾌락이다. 하지만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인간 고통의 부재, 그냥 평안과 평정을 유지할 수 있는 상태에 대한 관점으로 기술했다. 매우 소극적이고 정적이며 수동적 의미에서의 쾌락 관념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의 불행은 어떻게든 외부적 고통에 기인하며 그것은 인간의 마음을 불안과 흔들림으로 인도하는 요인이다. 그렇기에 에피쿠로스에게 있어 참된 기쁨과 즐거움은 어떠한 고통도 없이 지속 가능한 평정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며 이것이 그가 추구한 참된 쾌락이며 최고 선이다.

본서 <에피쿠로스 쾌락>은 너무나 많은 오해 속에 가려져있던 에피쿠로스 철학의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저작이다. 이번에 에피쿠로스의 현존하는 8편 원고 전체의 헬라어 완역본이 독자들을 만났다.

주목할 점은 에피쿠로스 철학에 대한 이해다. 고대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받은 에피쿠로스는 유물론자다. 그렇기에 모든 것이 물질적인 것이라는 데 동의하며 모든 신화적 개념에 대한 배격이 그의 철학적 사유의 기저다.

신 존재에 대한 배제는 죽음 너머 내세에 대한 부정으로 표현되었고, 감각에 의한 인지, 지성에 의한 인식을 토대로 실제 눈에 보이고 피부에 와닿는 것만이 사실이며 진리임을 의심치 않았다. 어찌 보면 매우 인간 중심적이다.

또한 그는 쾌락, 즉 행복은 이성에 의해 절제되고 지도 받아야 함을 말한다. 관능적이며 방탕한 쾌락에 탐닉하는 것이 그의 쾌락주의가 가진 본의가 아님을 알기에 인간 이성은 더욱더 중요하다. 어찌 보면 그의 사상과 대척점에 있었던 인간 이성을 강조한 스토아 철학과 결을 같이 한다고도 느껴진다.

실제로 말년에 방광결석으로 인한 배뇨장애로 극심한 고통을 겪다가 죽음을 맞이한 그가 죽음의 침상에서 스토아적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었다는 이야기는 그가 추구한 쾌락주의의 일면이 스토아 철학과 완전히 이질적이지만은 않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고통 없이 마음이 평안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만이 진정한 즐거움, 쾌락임을 강조한 고대 철학자의 가르침은 불확실성의 시대 속 앞을 향해 달려가는 복잡한 현대인의 심성을 건드리기에 매우 매력적인 철학이며 세계관이다.



성경 사도행전 17장에는 사도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에피쿠로스, 스토아 철학자들과 변론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부활을 전하는 바울의 메시지가 신 존재와 내세를 배제한 이들에게는 충격이었다. 실존의 문제를 매우 라이트 하게 만든다. 이 세상에서 고통 없이 근심 없고 평온한 행복을 추구하라! 그것이면 족하다!

'소확행'이라는 말이 유행이다. 현대인이 추구하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에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가 녹아있다. 고통 없이 마음이 평안한 삶을 소박하게 추구하는 것.

이쯤 되면 인위적인 것을 거부한 채 무위자연을 설파한 노자를 소환케 한다. 서양의 노자, 에피쿠로스.

고통의 부재 속 마음을 지속적으로 평온케하는 쾌락주의가 무분별한 방종을 일삼는 향락의 추구가 아님을 배웠다. 하지만 안타까운 점은 인간사에 고통이 없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통은 인간 실존에 있어 필연이다.

우리는 모두 고통받게 되어있고, 고통받으며 죽을 것이다. 근본적인 고통의 부재는 없다.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의 문제다. 에피쿠로스는 고통과 죽음을 굳이 현세에 소환하지 않는다. 그것을 씻어낼 수 있는 사람은 평온을 얻을 것임을 말할 뿐.

적은 분량이지만 책을 펼친 열흘간 지적 고문의 시간이다. 머리를 바이스에 넣고 쥐어짜는 것만 같다.

쾌락주의는 분명 현대인의 소모적 욕심과 끝이 없는 물질적 욕망, 중독적 쾌락에 대해 바른 길라잡이가 되어 줄 수 있다. 가진 것에 만족하고 소박한 즐거움을 추구하는 <에피쿠로스 쾌락>은 현대인에게 깊은 생각거리를 던진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