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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의 아이히만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81
한나 아렌트 지음, 김선욱 옮김 / 한길사 / 2006년 10월
평점 :

'아돌프 아이히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의 친위대 장교다. 나치가 600만 유대인을 학살할 당시 조직적인 학살 계획에 동참한 장본인이다. 그는 전 유럽의 유대인과 집시들을 동부지역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하는 체계적인 이동 수단과 방법을 고안하고 실행한 업무의 책임자였다.
독일의 패전 후 전범 재판을 피해 아르헨티나로 도주하여 그곳에서 가명을 사용하며 전혀 다른 인물로 산다. 1960년 5월, 아이히만은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고 예루살렘으로 압송된다. 이후 법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는데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재판 전 과정을 지켜본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남긴 기록물이다.
히틀러가 집권한 나치 독일은 아리아인의 우수성을 내세우며 전 유럽에서의 유대인 절멸을 계획한다. 초기에는 추방, 수용의 다소 온건한 정책을 펼쳤지만 온전한 소개(疏開)가 뜻대로 되지 않자 '최종 해결책'이라는 이름의 홀로코스트를 시행하기에 이른다.
나치의 준 군사조직이었던 돌격대에 의해 시작된 유대인 린치가 조직적인 학살로 번져갔다. 군인들이 직접 총으로 사살하는 방식의 야만성이 가해자들에게도 정신적 충격으로 전해지자 이동식 가스차량이 등장했다. 이후 좀 더 많은 유대인을 빠른 시간 안에 처리할 수 있는 악명 높은 죽음의 수용소들이 지어졌다.
문제는 전 유럽에 산개한 유대인들을 한데 모아 유럽 동부지역에 있는 수용소로 이송하는 방법이었다. 아이히만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서유럽과 발칸, 중부 유럽의 유대인들을 동부 지역의 수용소까지 이송할 열차 운송의 기틀을 마련한다. 효율적(?)인 이송 수단 덕분에 수많은 유대인과 집시들이 동부 지역 죽음의 수용소로 가게 되었고, 가스실에서 집단적으로 최후를 맞이했다.
책에서 느끼는 하나의 감정은 숫자에 대한 무감각이다. 21년 12월 기준 서울 인구가 약 950만 명이다. 서울 인구의 약 1/3이 미치광이 정치인 한 명의 결정으로 끔찍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말이 600만 명이지 상상이 되는가? 활자화된 숫자가 역사상 전무후무한 제노사이드 현장이 뿜어내는 피비린내의 충격을 완충시킨다는 사실 자체에 소름 돋았다. 하지만 숫자로 만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는 역사 속 타자인 우리에게는 마취감으로 다가온다.
숫자의 피상성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대학살의 환장 파티를 주도적으로 기획한 아이히만이라는 인물 자체가 갖는 의외의 이미지다. 600만 명의 숨통을 좀 더 효과적으로 끊기 위한 사명에 열정을 발휘했던 사람치고는 너무나 상반된 이미지를 가진 아이히만의 모습이 보는 이들에게 사건의 충격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이웃집 평범한 아저씨의 모습, 누가 그를 600만의 생명을 죽음의 도가니로 몰아넣은 소시오패스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을 지켜보며 그가 유대 민족에 대한 증오와 도착적 가학성을 가진 사람이 아님을 발견했다. 그는 너무나 평범했다. 여기에서 아렌트의 그 유명한 명제 '악의 평범성' 개념이 탄생한다. 자신은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군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유대인 학살에 대한 어떠한 반성이나 죄책도 보이지 않았던 아이히만의 유일한 유죄 이유는 '사유의 불능성'이다. 즉 생각하지 않았기에 유죄다!
나치가 만들어 놓은 언어 규칙의 미로 속에 갇혀 모든 주체적 사유의 끈을 놓았다. 사유의 불능이 인간의 실존성을 결여했다고 말한다. 600만 명이라는 믿기지 않는 숫자의 생명이 생각하기를 포기한 한 사람의 결정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옳고 그름을 판별하고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의 부재 속 어떠한 범죄도 성립되지 않는다는 주장, 모든 독일 국민들이 유죄인 곳에서는 아무도 유죄가 아니라는 사실, 아이히만이 왜 괴물인지를 대변하는 말들이다. 사고의 주체성과 객관성을 포기할 때 인간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어떤가? 생각하지 않을 때 인간은 괴물이 된다. 사유의 불능이 무서운 이유다. 내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지르고 있는가에 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이 부재할 때 부모와 자식, 배우자를 내 손으로 죽인다.
인간 누구에게나 상존하기에 악은 평범하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타인에 대한 고통을 인지할 수 없는 도덕성의 결여, 말과 사고를 허용치 않는 무사유가 인간 내면의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크다는 두려운 교훈으로 끝난다. 생각하기를 포기할 때 우리 또한 제2, 제3의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예외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