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가메시 서사시 - 인류 최초의 신화 현대지성 클래식 40
앤드류 조지 엮음, 공경희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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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 종교와 관습의 단면을 볼 수 있는 가장 오래된 작품 중 하나는 <길가메시 서사시>이다. 이제 사어로서 쐐기문자인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통해 고대 바빌로니아의 신화와 전설을 접할 수 있는 이유는 지금도 이야기의 원형이 되는 토판이 계속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에 현대지성 출판사에서 런던대학교 고대 근동 언어 전문가인 '앤드류 조지' 교수에 의해 편역된 길가메시 서사시의 몇 가지 판본을 한 권의 책으로 엮어 출간했다. 세계사 수업 시간 이름만 듣던 '길가메시'라는 인물이 우루크 지역의 폭군이었음을 책을 통해 알았다. 그리고 드디어 길가메시를 만난다.

<심연을 본 사람>이라는 바빌로니아 길가메시 서사시가 표본이다. 그 외 수메르어와 더 오래된 파편들이 동일명으로 전해져 온다. 하지만 현대 독자는 표본을 통해서 서사의 대략적인 내용을 파악할 수 있다. 서사시의 세계관은 다신의 종교관을 베이스로 한다. 다양한 신들의 세계와 지상 인간의 세계가 중첩되는 영웅 신화의 분위기가 짙다.

길가메시 또한 반신반인이다. 그의 대항마인 '엔키두'가 길가메시와 싸우지만 이윽고 이들은 친구가 된다. 둘은 힘을 합쳐서 신들이 만들어 놓은 삼나무 숲의 괴물 훔바바를 죽인다. 이후 여신 이쉬타르의 구애를 거절한 길가메시를 죽이기 위해 내려온 천상의 황소 또한 죽인다. 마침내 길가메시와 엔키두가 신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고 엔키두는 신들에 의해 죽임 당한다. 친구 엔키두의 죽음을 보며 자신 또한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임을 자각한 길가메시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 모험을 떠나게 되는데...

저작의 기록 형식이 행과 구로 나누어진 시의 형태다. 특징은 역시 점토판 출토의 불완전성에 있다. 모든 토판이 완벽하게 발굴되고 복원된 것이 아니기에 이야기의 흐름 또한 군데군데 구멍 뚫린 듯 빈 공간이 많다. 편역자가 앞뒤 문맥을 다른 토판에서 발견된 공통된 어구를 대입시키는 노력으로 대략의 줄거리를 이었다. 편역자의 수고로 현대 독자들은 그나마 전체적인 메시지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다.

 

 

배를 지으라! (중략) 모든 살아있는 것의 씨앗을 배에 실으라! 서사시 표준 판본 XI-25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창세기 6:14

 

흥미로운 독자 포인트가 있다. 본문의 몇몇 내용들이 기독교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와 유사하다. 특별히 신들이 인간을 멸한다는 대홍수 이야기는 성경 창세기 6장에 등장하는 노아의 홍수 이야기와 너무나 유사하다. 연대를 따지면서 길가메시 서사시의 대홍수 이야기가 창세기 노아 홍수 이야기의 근원 설화라는 주장과 그에 따른 기독교의 반론이 팽팽하다. 그러나 역자 해제에서도 볼 수 있듯 여러 문명 신화 전승 방법과 기원의 다양성을 감안할 때 상황이 다른 전승이 공존할 수 있다.

 

한 친구는 혼자지, (중략) 비록 그들이 약할지라도, 둘은......(중략) 둘은 [성공하리!] 세 겹 밧줄[은 쉽게 끊어지지 않네.] 서사시 표준 판본 V-75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전도서 4:12

 

구약 성경 지혜 문학인 전도서의 한 구절이 길가메시 서사시에도 비슷하게 등장한다. 폭군 길가메시는 인생의 심연을 바라보며 지혜자로 거듭난다. 어쩌면 시대를 초월한 인류의 공통적 고민에 대해 말하는 일종의 지혜서다.

길가메시가 직시한 인간의 연약함과 필멸의 운명에 대한 고뇌가 서사시의 전체 분위기에 녹아있다. 그렇기에 신과 인간, 죽음과 영생, 성공과 좌절 등 모든 세대를 뛰어넘는 인간의 근원적 질문이 현재성을 띠고 다가오는 인상 깊은 작품이다. 즉, 죽고 사는 문제, 성공에 열광하고 실패에 좌절하며 신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기다가도 어느새 신에 대항하여 싸우는 인간의 이율배반적 삶의 모습이 표본 서사시의 BC 10세기나 인간이 우주를 여행하는 21세기의 지금이나 대동소이하다.

코로나 팬데믹의 기세는 여전하다. 이제 우리는 '위드 코로나'라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가게 된다. 인생은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부루마블 게임판 같다. 누군가는 걸근대는 신들 앞에 자신의 운명을 내맡기고 인생의 주사위를 던진다. 또 다른 사람은 길가메시와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에 순응하기보다 그 운명을 개척하고 변화시키기 위한 모험을 감행한다. 오랜 시간 땅속에 묻혀있던 고대인들의 지혜가 현대인들의 냉랭한 사유의 장에 불을 붙이는 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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