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북쪽 - 한국의 땅과 사람에 관한 이야기 대한민국 도슨트 9
현택훈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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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박이가 쓰고, 입도민이 읽는다!"

 

10여 년 전 4개월간의 제주 생활이 내가 제주도와 첫 인연을 맺은 시작이다. 다소곳한 새색시의 수줍음을 간직한 듯 태곳적 신비를 머금은 제주도는 내게 터전 이상의 곳이다. 사람을 끌어당기는 원초적 매력의 땅. 이런 이끌림이 나와 우리 가족을 이곳 제주도, 그중에서도 제주 북쪽에 자리 잡게 했다.

이제는 각종 SNS로 인해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제주도 곳곳의 핫플레이스들이 세상에 드러났다. 그러나 진짜 제주를 만나려면 눈을 돌려야 한다. 관광객의 발길이 닿지 않는 작은 깡촌 바닷가 마을의 구멍 난 현무암 돌담길을 걸어보았는가? 시간이 멈춰진 듯 온몸을 휘감는 고즈넉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깡촌 포구에 앉아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볼 때 찾아오는 평화로움과 고요함이 낯설다.

이렇듯 리얼 200% 제주의 속살을 마주할 수 있는 특권은 먹고 마시며 진탕 소비만하고 돌아가는 관광에는 없다. 얼마 전 화장기 없는 제주의 민낯을 마주하게 만드는 책 한 권을 만났다. <제주 북쪽>은 제주 토박이가 쓴 진짜 제주에 관한 이야기다. 서점 매대에 가득한 제주도 관광 가이드북과는 결이 다르다. 한 지역을 바로 알고 싶다면 먼저 그 땅의 사람들과 그들이 살아온 삶의 발자취를 배우는 것이 좋다. 이 책은 바로 제주도가 품은 사람과 삶에 관한 일종의 인문 에세이다.

 

 

한라산을 중심으로 제주의 동서남북 중 북쪽 5개 동네, 내가 사는 고장의 숨은 이야기가 사뭇 친숙하고 정겹다. 저자는 단순 여행 정보가 아닌 땅과 사람 이야기를 푼다. 아름다운 제주도 이면에 숨겨진 아픔의 역사와 그것을 오롯이 한 몸에 짊어지고 억척스럽게 살아온 이들의 체취가 깊고 아리다.

제주의 중심 북쪽 지역 28개의 다양한 이야기가 어우러져있다. 저자는 4.3으로부터 어렵사리 말을 꺼낸다. 진짜 제주도를 알고 싶다면 먼저 4.3과 마주해야 한다. 천혜의 관광지로서의 제주에 새겨진 4.3의 끔찍한 기억을 제주시 봉개동 4.3 공원에서 만난다. 이념과 색깔 다툼의 틈바구니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무참히 죽임 당했다. 불과 70여 년 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주의 하늘 아래서 일어난 일이다. 제주도 전역에 4.3의 핏물이 고여있다.

'다크 투어리즘'이라고 들어봤는가? 아우슈비츠나 킬링필드와 같은 제노사이드 현장을 방문하는 프로그램이다. 4.3의 비극을 품은 제주에도 있다. 슬픔은 묻어둘수록 저며온다. 아픔을 직시할 때 회복과 상생의 활로가 보인다. 70여 년 전 눈부시게 아름다운 제주에서 자행된 인간성의 끝단을 마주할 때에야 만 지금의 빛나는 제주를 누릴 자격이 생긴다. 제주항, 금오름, 진아영 할머니 삶터, 곤을동 등의 이야기들이 독자를 4.3이라는 삭힌 비애의 현장으로 안내한다. 

 

 

그러나 어둡고 슬픈 이야기 일색은 아니다. 저자는 종종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맛집에 대한 질문을 받는단다. 그런데 토박이들은 관광객 맛집은 꺼린단다. 비싸고 화려한 곳은 찐 맛집이 아니라는 반증이다. 진정한 토박이 맛집에 관한 이야기가 다수 등장하기에 입도민으로서 반가웠다.

책장을 넘기다 보면 서문시장 삼복당을 만난다. 50년간 한자리를 지키고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제주의 명물 빵집이다. 지금도 빵 한 개의 가격이 500원이라니 믿기지 않는다. 동문시장의 빙떡, 오메기떡, 모닥치기 떡볶이, 상외떡, 수애라고 불리는 보성시장의 베지근한 순대 국밥,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헌책방인 책밭서점 등 이야기 속 사람 냄새가 구수하다.

 

 

저자는 한 권의 책을 통해 제주 북쪽이 간직한 천혜의 관광지와 역사, 신화와 설화, 사람 살아가는 이야기를 골고루 버무렸다. 제주도는 삼성 건국 신화에서 보이듯 외부에서 온 사람들과 문물을 받아들이고 그들과 함께 어우러져 공생했다. 제주도의 텃새 문화라고 알려진 '괸당'도 시간 속 어우러짐 속에서 볼 때 외지인들까지 괸당으로 받아주는 넉넉한 인심의 확장을 포함한다.

고려 시대 말을 관리하는 원나라 목호, 조선 시대 유배인들, 6.25 피난민들, 21세기 입도민들까지... 제주도는 오는 사람을 막지 않고, 가는 사람을 붙잡지 않는다.

"먹엄직이 살암직이" 어떻게든 살려고만 하면 살 수 있다는 제주 어르신들의 말이란다. 나는 아직 여기 사람들에게 새댁이라고 불리는 입도민이다. 배 타고 가다가 폭풍 만나 죽어도 상관없기에 극악한 죄인들을 유배 보냈던 조선 시대 유배지에서 나름 잘 적응하고 살아가고 있다. 낙향해서 뭐 먹고살지 하는 걱정이 완전히 가시지는 않았지만 막상 내려와보니 정말로 먹엄직이 살암직하다.

내가 발붙이고 살아가는 제주 북쪽의 숨결을 토박이의 입을 통해 직접 전해 들을 수 있어 반가웠다. 어디서도 쉽게 들을 수 없는 제주의 숨은 이야기들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 한편을 울린다. 제주도를 여행하며 '찐 제주'를 만나고 싶은 독자들에게 캐리어에 이 책 한 권 담아 가길 권한다.

슬픔과 환희가 공존하는 신비의 땅, 제주도는 오늘도 말없이 고요하다. 오늘 유난히 보룸이 많이 분다. 일어나 바당 보룸이나 맞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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