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하는 칼날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하빌리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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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세 소녀가 3명의 불량 청소년들에게 납치되어 몹쓸 짓을 당하고 살해된다. 주인공 '나가미네 시게키'는 10여 년 전 아내와 사별 후 하나밖에 없는 딸을 이렇게 잃는다. 어느 날 누군가의 제보로 딸을 납치하고 살해한 범인의 집에 숨어들어가 방에 있는 녹화 영상 비디오를 보게 된다. 곧이어 자신의 딸을 유린한 짐승들에 대한 아버지의 처절한 복수가 시작되는데...

'무라카미 하루키'와 더불어 현대 일본 문학의 양대 거장으로 불리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저작 <방황하는 칼날>이다. 저자는 단순한 '오징어 땅콩'식 추리, 스릴러 장르의 책을 쓴다기보다 작품 속에 사회적 메시지를 적절하게 녹여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주어진 현실을 한 번 더 반추하게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렇듯 명성이 자자하고 한국에도 두터운 팬층을 보유하고 있는 게이고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난다.

명불허전! 이번에 읽어보니 알 것 같다. 소설이 갖추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요소들에 매우 충실하다. 흡입력이 시쳇말로 장난 아니다. 한번 책을 펼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서 덮을 수가 없다. 500여 페이지의 스토리를 끌고 가는데 있어서 지루할 틈이 없다. 문장이 간결한 것도 장점이다. 배경 설명과 군더더기를 최대한 쳐냈기에 글 자체가 무겁지 않고 매우 라이트 하다. 그래서 극강의 몰입감을 선사하다. 더불어 추리 스릴러 장르가 갖추고 있어야 할 긴장감과 마지막 반전까지...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치밀한 구성을 보며 마니아들이 왜 그렇게 게이고를 연호하는지 알 것 같다.

사실 게이고를 만나는 첫 번 째 책이 조금 버거운 주제다. 우리 사회가 가진 '소년법'의 맹점을 부각시키며 피해자를 배려하지 않는 부조리한 사회 사법 시스템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책의 전면에 스며들어 있다. 책을 읽으며 슬픔과 함께 분노했다. 완독 후에는 무기력함을 느끼며 우울했다. 완독은 이틀 전에 했지만 감정을 정리하고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시간을 두고 리뷰한다.

 

오히려 법은 범죄자를 구원해준다. (중략) 소년법의 벽은 가해자를 보호한다.

그리고 거의 모든 법은 피해자에게 냉혹하다. p134, p375

 

가해자가 미성년이기에 상상할 수도 없는 범죄를 저질렀지만 갱생을 이유로 솜방망이 처벌을 받고 풀려나는 우리 사회의 허술한 법적 시스템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다. 피해자의 아픔은 어디에서도 치유받을 수 없는 부조리한 사법체계는 제2, 제3의 피해자만을 양산해낸다. 그리고 가해자들은 또다시 소년법의 그늘 아래 숨는다. 사람을 죽여도 술을 먹고 저지른 행위였기에 감형을 받는 요지경 같은 세상. 인권이라는 미명하에 피해자의 짓밟힌 인권보다는 한 사람과 그 가족들의 인권을 처참하게 짓밟은 가해자의 인권을 보호하고 중요시하는 미친 세상에 대한 일갈.

 

 

세상이라는 시스템이 만들어낸 괴물을 인간의 힘으로 인간으로 되돌린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생각뿐이다.

일정 기간 '보호'된 죄인들은 세상의 기억이 흐릿해질 무렵 다시 원래 세상으로 돌아온다. 그 대다수는 또 다시 법을 어긴다. 그들은 알고 있지 않을까? 죄를 저질러도 어떤 보복도 받지 않는다는 것을. 국가가 그들을 보호해준다는 사실을. 우리가 정의의 칼날이라고 믿는 것이, 정말 올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나? (중략)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 칼날은 진짜일까? 정말 '악'을 벨 힘을 가지고 있나? p508, p534

 

소설 속 주인공은 국가 사법체계의 무능함 속에 내리쳐야 할 방향을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칼날의 끝을 본인 스스로가 짐승들의 목을 향해 겨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고대 바벨론 함무라비 법전의 소환, 동해보복법의 현대판 버전이다. 법이 무능하기에 피해자가 가해자가 되어야만 하는 슬픈 현실.

소설이 재미를 선사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은 딱 킬링타임용으로 적당하다는 사고의 발현이다. 반면 소설과 문학이 재미라는 본연의 임무(?)와는 결이 다른 사회적 각성의 기능을 선사할 때 그것은 작가가 사회 구성원으로서 신성한 의무를 실행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까? 그동안 내가 현대 소설을 터부시하고 오해했던 것이 이런 부분이다. 시간이 아깝고 건질 게 없어서... 처음으로 만난 게이고의 작품이 나의 이런 편견을 한순간에 불식시킨다.

소설이 재미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파장과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야 얼마나 좋을까? 우리 사회가 가진 사법체계의 허술함과 소년법의 맹점, 피해자 보다 가해자의 인권을 더 중시하는 초점 잃은 인권 의식에 대한 반성이 사회 저변에서 거세게 일어나면 좋겠다.

먹고살기에 바쁜 세상 속에서 나와 내 가족이 당한 일이 아니기에 쉽게 망각해버리는 현실을 작가는 소설 속 주인공의 입을 빌려 말한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애쓰지 않을 때 누구나 다음번 희생자로 뽑힐 수도 있음을 말이다. 게이고의 경고가 섬찟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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