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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82
다자이 오사무 지음, 유숙자 옮김 / 민음사 / 2021년 7월
평점 :

20세기 초 일본 청춘문학의 신호탄을 쏘아 올린 전위적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창작집 <만년>은 정확히 한 세기가 지난 21세기 초 지금의 우리에게 있어 일종의 데자뷰다. 흔들리는 청춘들의 삶과 존재에 관한 실존적 고민을 순백의 원고지 위에 오사무 특유의 암울하지만 위트 있는 문체로 수놓았다.
코로나 블루라는 말이 지금 우리네 삶을 대변하는 단어이듯 전후 일본에 진하게 드리웠던 절망의 그림자는 당시 일본 사회의 자아상을 보여준다. 시대의 아픔과 고뇌의 흔적은 오사무가 연인과 함께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으나 자신만 살아남았다는 충격적인 사건 속에 여실히 드러난다. 이 사건은 이후 그의 작품 세계에 고스란히 반영되어 오사무 세계관의 전형을 이룬다.
<어린광대의 꽃>은 그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일종의 비망록과 같다. 삶의 의지와 의미를 상실했기에 버리기 원했지만 원치 않게 다시 주어진 삶에 대한 비애가 세 젊은이들의 플랫한 대화 속에 건조하게 담겨있다. 누구를 탓하거나 자책하는 것이 아니지만 주어진 상황 자체가 이들에게는 수수께끼다. 오사무는 주사위 판에 던져진 도박과 같은 인생의 가벼움을 자신의 경험에 빗대어 밀도 있게 녹여냈다.
잡힐 줄 모르는 청년 실업률, 사회에 나와서도 갈 곳 없어 방황하는 지금의 젊은 세대야말로 기성의 권위가 독차지한 세상이라는 무대 속에서 어설프고 과장된 몸짓으로 우스꽝스러운 연기를 해야만 하는 어릿광대와 같다. 웃고 싶지 않지만 웃어야 하고 울고 싶어도 마음껏 울 수 없는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무대에서의 인생 공연이 그들에게 주어진 오늘의 일상이다. 거기에 더해진 초유의 팬데믹은 청년 세대의 미래를 더욱더 불투명하게 만든 요인이다. 광대 가면을 쓰고 가뜩이나 숨쉬기 어려운 삶의 무대 위에서 코로나 마스크까지 더해진 지금의 시대가 마치 오사무가 살았던 모순적 시대의 속편과 같다.
<그는 옛날의 그가 아니다>는 책에서 볼 수 있는 가장 재미있지만 역설 가득한 작품이다. 작중 화자는 아버지의 유산으로 월세를 받으며 살아가는 소위 '조물주 위에 건물주'다. 그의 집에 '세이센'이라는 남자와 그의 아내가 세 들어온다. 세이센은 번번한 직업이 없다. 수시로 바뀌는 아내와 처가에 기생하듯 살아간다. 화자는 거의 1년이 지났지만 임대료를 받지 못했다. 무엇에 홀린 것만 같다. 시간은 그렇게만 흘러간다.
세입자에게 집세를 받아내려는 집주인이 번번이 세입자의 꾀에 빠져 빈손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만 본다면 그냥 재미있는 단편 소설이다. 그러나 이야기는 역설 가득한 의미로 채워졌다. 화자의 마지막 대사 속 세이센의 모습 속에 집주인의 모습이 투영된다.
"...어슬렁 헤매고 다니는 저 남자, 그리고 여기 있는 나. 서로 다른 구석이 한 점이라도, 있나?"
아내와 처가에 들러붙어 연명하는 세이센이나 아버지의 유산으로 받은 집 한 채로 월세를 받아 연명하는 작중 화자의 삶이 누군가에게 기생하듯 살아가는 게으른 자들의 전형임을 비꼰다. 세상이 그렇다. 누군가에게 붙어 기생하는 사회. 나의 모습을 성찰하지는 않고 다른 이를 비난하는 세상.
15편의 단편들이 끊어지듯 토막 쳐 있다. 각기 다른 주제와 심상을 전하지만 작품을 관통하는 의미는 하나다. 암울했던 시대속 방황하는 청춘들의 세상을 바라보는 흐릿한 관점에 투명함을 선사했다. 모순과 역설 가득한 세상에서 작가 본인은 결국 다섯 번의 시도 끝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작품에는 오히려 삶을 향한 간절함과 애절함이 묻어난다. 더 치열하게 살고 싶었고 단단하게 뿌리박고 싶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인생이었기에 그의 작품 안에 드러난 메시지가 더 구슬프고 역설적이다.
호불호가 갈린다. 극단적 선택을 한 그의 삶의 마지막과 세상을 바라보는 다소 비딱해 보이는 관점은 불호(不好)일 것이다. 반면 모순과 역설로 가득한 전후 일본 사회의 암울했던 현실 속에서 오사무가 긁어 준 시원스러움이 당시 주눅 들어있던 일본 청년들에게는 열광적인 반응을 일으켰다고 하니 이것은 호(好)일 것이다.
작품의 평가를 오롯이 독자에게 던져주는 책을 오랜만에 만난다. 일본의 천재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존경하는 작가 '다자이 오사무'의 <만년>. 색안경을 벗고 독자와 저자의 만남으로만 독대해보라! 인간을 이해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편협한 인식의 외연을 확장 시켜줄 만한 저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