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쓴 것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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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 럭 클럽>, 아주 오래전 나의 심상에 인상 깊이 눌어붙은 한편의 영화다. 20세기 중반 격동의 시대를 살았던 네 명의 어머니들과 네 명의 딸들이 만들어내는 갈등과 회상, 화해의 이야기를 담았다. 각기 다른 시대와 공간의 간극 속에 펼쳐지는 파란만장한 여성들의 삶을 통해 받은 깊은 감동이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내 마음 안에 이른 봄 담벼락 밑 잔설 마냥 녹지 않고 남아있다.

그런데 최근 이런 느낌의 책 한 권이 베스트셀러 <82년생 김지영>의 저자 '조남주' 작가에 의해 전해졌다. 민음사 0판 1쇄로 만난 <우리가 쓴 것>은 서론에서 언급한 영화와 같이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작가 특유의 담백하고 플랫한 느낌의 필치로 그려냈다. 작가의 글이 들뜸이 없고 차분하다.

초등학교 5학년 소녀부터 죽음을 눈앞에 둔 여든이 넘은 치매 할머니에 이르기까지 스토리의 스펙트럼이 제법 넓다. 책은 짤막한 단편 소설 여덟 편을 하나로 묶었다. 각 이야기의 주인공이 전혀 다르기에 같은 인물, 다른 이야기의 전형적 옴니버스식 구성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형식의 느낌은 옴니버스적이다.

책을 덮고 나면 일면식도 없는 소설 속 인물들이 마치 하나의 가족 친지와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도 어쩌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의 모양이 대동소이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다. 여덟 편의 이야기 모두 조남주 작가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독자에게 전하는 조남주 작가에게 온 이야기다. 그렇기에 어느 것 하나 손쉽게 털어버릴 수 없는 와중에 두 편의 이야기를 어렵사리 끄집어냈다. 

 

 

사람 죽는 일이 너무 가깝고도 태연하다. 게다가 나는 남편도 보냈고 아들도 먼저 보내 봤다. 그때는 정말 못 살 줄 알았는데 또 그럭저럭 살아진다. p25

 

'매화나무 아래'는 요양원에서 죽음을 눈앞에 둔 치매 언니를 바라보는 여동생 동주의 이야기다. 동주의 시선과 감정의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인생의 허무함과 모진 생명에 대한 연민이 가슴 시리게 다가온다. 여유를 허락지 않는 우리네 삶의 여정 속에 힘겹게 달려왔을 인물들의 꺼져가는 삶이 마치 한철 아름답게 피었다 지는 매화의 그것처럼 아련하다. 암으로 먼저 떠난 둘째 언니와 치매로 사그라져가는 큰 언니 그리고 그 뒤를 따라가는 주인공의 모습 속에서 여성들이 느끼는 진득한 삶의 비애가 사뭇 깊다.

더불어 삶과 죽음이라는 보편적 주제가 친근하게 잇대어 있다. 남편과 아들을 먼저 보내고 못 살 줄 알았는데 그럭저럭 살아진다는 문장 속에서 삶을 향한 애증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죽음을 생각하기에 애통한 것이 아니고 삶을 생각하기에 소망함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삶과 죽음이 종이 한 장 차이와 같이 친근한 인생 속에서 한철 피었다 지는 매화와 같이 우리네 인생이 나와 어울려 치대는 그들에게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의미로서 선물되면 족하다.

주인공 동주가 언니들의 삶과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 그와 같다. 자매로서 한 나무에서 아름답게 피어 서로를 빛내주다가 소박하게 지는 것. 상처와 아픔의 기억일랑은 잊고 또 새롭고 찬란하게 피어나는 것. "겨울이 봄이고 봄이 겨울이다. 언니야." 자연의 순환성 속에 숨겨진 인생의 깊은 의미를 성찰하도록 독려하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작가가 그만큼 인생의 진한 맛을 안다. 매화는 내년에도 핀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을 살아내야 한다.

 

 

성실하고 꾸준하게 자기 일을 해 나가는 것. 그 평범한 일상이 삶을 버티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얼마나 중요하고 가치 있는지도, 누군가에게는 싸워 얻어내야 하는 어려운 일이라는 것도. p258

 

'오로라의 밤'은 중년의 고교 교감인 주인공 '나'와 시어머니, 직장맘 딸이 엮어가는 3대에 걸친 여성 서사다. 남편은 10년 전 교통사고로 죽었다. 지금은 시어머니와 단둘이 산다. 죽기 전 버킷 리스트인 오로라 직관을 위해 주인공 '나'는 시어머니와 함께 캐나다로 향한다. 고부간의 해외여행이라는 우리네 정서 속 불가능한 일이라 여겨지는 설정 자체가 낯설다.

그러나 작가는 이러한 미션 임파서블한 삶의 정황을 파서블함이 가득한 삶의 체취로 가득 채운다. 영하 30도의 찬 바닥에 누워 숨 막히게 펼쳐지는 오로라 쇼의 장관을 볼 때 이들은 이미 고부가 아닌 인생의 동반자요 친구임을 확인한다. 아들, 남편을 먼저 보낸 시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어린 아들을 키우느라 고군분투하는 손녀이자 딸의 삶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이 가지는 중첩된 역할과 감정의 그림자를 여과 없이 보여준다.

여성들의 인생은 무엇인가 말하고 싶지만 고구마 한 개를 먹은 것 마냥 가슴 언저리에 꽉 막힌 답답함이 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우리 시대 여성들의 삶이 가지는 모양과 의미는 비슷하다 못해 같다. 그러나 그녀들은 그것이 일상이라는 가면을 쓰고 다가오기에 오늘도 살아가는 것이고 내일도 살아내려고 몸부림친다. 책의 구절과 같이 평범한 일상이 우리의 삶을 버티게 해주기에 그렇다. 그리고 너무나 평범한 그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를 알기에 그렇다.

책은 여성들의 삶이 가지는 의미를 잔잔한 수채화와 같이 인생이라는 캔버스에 다채롭게 채색했다. 또한 인생의 씨줄과 날줄이 질서 있게 얽히고설켜 화려하지는 않지만 정갈하게 짜인 직조물의 그것과 같다. 작가는 다양한 연령층의 주인공들을 통해 시대를 아우르는 평범한 여성들이 가지는 고유한 생각과 멈춰진 삶의 회로를 가동한다. 날선 페미니즘적 투쟁은 없다. 그저 지금의 시대를 살아가는 여성들이 가진 고민과 그녀들의 잊힌 시간을 삶이라는 일상의 현장 속에 자유롭게 풀어놓는다. 그것이 이제 막 인생의 꽃을 피우는 10대부터 석양을 향해 낙화하는 80대의 삶을 일관성 있게 관통하는 책의 주제다. 책은 다양한 역할의 옷을 입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여성들에게는 공감, 그녀들과 함께 살아가는 남성들에게는 이해라는 이름으로 다가온다. 삶은 복잡한 듯하지만 단조롭다.

<민음사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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