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같은 사람입니다 - 치매, 그 사라지는 마음에 관하여
린 캐스틸 하퍼 지음, 신동숙 옮김 / 현대지성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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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을 내가 통제할 수 없다는 두려움

우리나라는 2026년 초고령화 사회 진입을 앞두고 있다. 저출산 초고령화 사회의 다양한 문제 가운데 하나는 치매 노인의 증가다. 한국인 치매 유병률은 85세 이상 노인 중 40퍼센트로 3명 중 1명이 치매에 걸린다. 기억력을 잃어가며 가족과 지인들을 알아보지 못하고 결국에는 나 자신마저 잃어버리는 몹쓸 병! 알츠하이머병으로도 불리는 치매는 한 인간의 모든 기억 저장소를 점차적으로 포맷해버리는 머릿속의 지우개와 같다. 봄의 끝자락에서 모든 이들의 불청객, 치매에 관한 잔잔한 감동을 선사하는 책 한 권을 만난다. '린 캐스틸 하퍼'의 <여전히 같은 사람입니다>

저자는 현재 뉴욕의 한 교회에서 노인 담당 목회자로 사역하고 있다. 7년간 노인 요양 시설에서 치매 노인 담당자로 일한 자신의 경험과 활동적이었지만 치매에 걸린 외할아버지와의 아련한 기억을 넘나들며 자신이 바라본 치매인의 그 깊은 존재적 의미를 섬세한 필치로 부드럽게 그려낸다. 또한 부모에게서 치매 유발 위험 유전자를 한 쌍씩 물려받아 치매 유병률이 50%인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며 기록한 치매와 삶의 본질에 대한 깊은 성찰이 묻어나는 매우 인상 깊은 책이다.

책은 총 9개의 챕터로 구성된다. 현대판 고려장. 치매인이 기억을 잃어버리는 순간 세상 또한 치매인을 세상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다. 싱그럽고 탄력 있는 젊음과 활기와 건강, 역동성을 찬미하는 세상의 전당 속에 늙음과 병듦 더군다나 치매인의 공간은 없다. 이렇듯 나이 듦과 치매는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없는 암묵적 터부다. 치매인과 함께 지낸 시간 동안 그들의 내면 안에 숨겨진 존재의 본질과 삶의 의미를 발견해가는 저자의 이해가 깊다. 특별히 '우리 영혼을 밝히는 어두움'이라는 역설적 소제목이 눈길을 끈다. 어두움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통찰이다. 빛의 문명이 발산해내는 다양한 부작용에 반해 어두움이 주는 안식과 평안함의 상대적 인식 재고! 어두움은 틀렸고 빛만이 옳다는 정형화된 인식 속의 치매는 분명 어둠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나쁜 것이고 빨리 분리수거해버려야 하는 쓰레기이다. 그러나 저자는 치매인이 가지는 어두움의 개념을 빛과의 경계에서 접속한다. 자신의 삶을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그들의 내면은 깊은 어두움이 아닌 빛과의 경계에 서 있을 뿐이다.

 

 

어둠은 깊어졌지만 삶도 진해졌다

그렇다. 어두움이 다가올 때 삶의 본질은 더 뚜렷해진다. 저자는 행복에 겨운 밤의 시간에 자리를 내어줄 때가 찾아옴을 말한다. 그것이 누구에게는 평안한 죽음일 수도 있고 그 누구에게는 알츠하이머병과의 동행을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본질은 인간은 누구나 늙고 병들며 죽는다는 사실이다. 영원한 젊음과 싱그러움은 없다. 책은 마지막 10년을 치매인으로 살았던 미국의 탁월한 지성 '랄프 왈도 에머슨'의 이야기를 소환한다. 에머슨은 인간의 감각적 인식은 늘 경험을 방해한다고 말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파르메니데스' 또한 감각은 모든 오류의 근원이라고 했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가족과 지인 심지어 자신을 잃어버린 치매인들의 삶 속에 분명 보이지 않는 부분이 있다. 감각에 의존한 실존에 대한 끊임없는 지향이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갈망과 탐구를 가로막는다. 우리가 온전한 기억과 또렷한 감각적 인식만이 옳다고 여기는 세상 속에 있기 때문이다.

'떠났지만 사라지지 않은' 사랑하는 가족들의 모습 속에서 깊은 비애를 느낀다. 잃어버린 기억의 한 가닥을 부여잡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새로운 관계와 소통의 과정이 재정립되고 확장된다. 치매인과 그 가족에게는 낯섦이라는 판위에 흩어져있는 삶의 조각들을 퍼즐 맞추듯 정렬해가야 하는 숙제가 던져진다. 깊은 이해와 사랑, 헌신이 없다면 쉽지 않은 작업이다. 저자가 책을 통해 역설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치매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들이 여전히 우리가 사랑했고 지금도 사랑하는 같은 사람이라는 점이다. 책은 치매를 주제로 쓰인 한편의 잔잔한 에세이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역설의 공존을 성찰하고 밀도 있게 녹여낸 한편의 인문학 도서와 같다. 더불어 치매를 삶의 본질과 인간 실존이라는 그릇에 담아내려 한 저자의 애씀에서는 깊은 철학의 향기가 풍긴다. 가족 중에 치매인이 있거나 치매와 인간, 삶과 죽음에 대해 관심 있는 독자에게 권할만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저자가 글을 정말 품격있게 잘 쓴다.

<현대지성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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