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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 '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지운 나의 뿌리를 찾아서
잉그리드 폰 울하펜.팀 테이트 지음, 강경이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4월
평점 :

단연코 뿌리뽑힘은 인간 사회가 경험하는 가장 위험한 병폐다.
시몬 베유
저자 잉그리트는 책을 통해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에 의해 점령된 유고슬라비아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생후 9개월 된 아기였습니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에리카 마트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아이가 된 것이죠. 다소 부유한 독일인 가정에서 자신이 독일인으로 태어나 독일인 부부의 아이로만 알고 살아왔던 그녀는 열 살 무렵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위탁 양육된 아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후 그녀는 자신의 출생과 어린 시절 잃어버린 기억의 퍼즐 조각을 맞추기 위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합니다. 그러는 과정 중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라는 결코 믿을 수 없는 경악할만한 나치 우수 인종 프로그램의 숨겨진 내막을 알게 되죠. 나치 히틀러의 아이가 되어 잉그리트 폰 욀하펜이라는 독일인으로 살아왔던 지난 50여 년의 삶을 회고하며 잃어버린 뿌리에 대한 아픔, 정체성의 혼란이 가져다 준 슬픔, 모든 비극의 원흉인 나치 독일과 사실을 끝까지 무덤까지 가지고 간 그녀의 독일인 어머니에 대한 분노는 그녀가 진실을 찾아가는 여정의 대부분을 메우는 감정들이죠.

이 책은 한 사람의 뿌리를 찾아가는 회고록인 동시에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의해 자행된 천인공노할 비극의 숨겨진 현장에 대한 역사고발서이기도 합니다. 아리아인의 어휘적 의미는 '존귀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히틀러가 얼마나 인종과 혈통에 대해 사이코 패스적으로 집착했는지에 대해 보여줍니다. 또한 열등 종족의 청소라는 미명 하에 600만 명이 넘는 유대인 홀로코스트, 인종적 순결과 경제적 이유로 장애와 정신질환, 불치병을 앓는 자국민 8만 명을 안락사 시킨 이른바 T4 작전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컬한 사실은 레벤스보른이 우등 종족의 번식이라는 정반대의 개념으로 탄생했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어느 한쪽의 피는 더럽기에 죽여야 하고 또 다른 쪽의 피는 깨끗하기에 살려야 한다는 우생학적 모순과 극도의 광기 어린 인종적 오만함의 극치를 보여준 20세기 최대의 비극이었던 것이죠.
전후 수많은 유럽의 아이들이 나치에 의해 지워져버린 자신의 정체성과 뿌리로 인해 혼란스러운 삶을 살았습니다. 내가 누구이며 나의 진짜 부모는 누구인지에 대한 존재의 근원을 흔드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난 것이죠. 마치 리뷰의 서두에서 말한 캄보디아의 집단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아이들과 기존의 아이들, 집단 결혼의 당사자들이 얽히고설켜버린 가족 관계 안에서 느끼는 감정의 그것과 같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저자는 자신의 내장을 끊어놓는 것만 같이 고통스러웠던 뿌리를 찾는 지난한 여정의 끝에서 독자의 마음을 울리는 깊은 깨달음을 선사합니다. 오랜 세월 독일인으로 살아온 자신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아직까지 생존한 자신의 혈육의 흔적을 만났을 때 느낀 감정은 반가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는 것이죠. 오히려 그녀는 자신과 더 많은 시간을 '가족'이라는 끈으로 함께한 독일인 동생과의 관계에 더 큰 친밀감을 느끼는 자신을 보며 나치가 고수했던 피의 이데올로기를 무너뜨리는 깨달음을 말합니다. '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미치광이 한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끼친 말할 수 없는 역사적 비극의 현장 속에서 자신의 뿌리를 찾아가는 저자의 감정의 곡선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보는 이의 마음도 숙연해집니다. 저자는 자신이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아이로 키워졌지만 지금 자신의 삶은 결코 나치가 결정한 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님을 말합니다. 물리치료사로서 수많은 장애 아동의 삶을 치료하고 돌보는 지금의 잉그리트 폰 욀하펜의 삶은 그녀 자신이 선택한 것이라는 고백이 깊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나치는 그녀를 유전학적, 우생학적 순수 혈통의 시험관 속에서 규정하려 했지만 자신의 참된 정체성은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의 선택의 결과였음을 고백하는 그녀의 용기에 박수를 보냅니다. 더불어 그녀는 이 여정의 끝에서 과거를 이해할 뿐 아니라 용서하는 법도 배워야 한다는 깨달음을 말하며 자신의 뿌리를 찾아 헤맨 15년의 기나긴 과거로의 여행의 마침표를 찍습니다.
지난 주말 영국에서 활약하고 있는 한국의 유명 축구 선수가 인종 차별을 당했습니다. 지난해에는 미국에서 비무장한 흑인이 백인 경찰의 과잉 진압으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것이 21세기 문명의 정점 한가운데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차별과 혐오의 현주소입니다. 우리 사회 깊숙이 뿌리박혀 있는 광기 어린 인종 차별주의와 혐오의 망령은 깊기만 합니다. 인간을 인간 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혈통과 피부색, 생김새로 재단하고 분류하는 이 오만스럽고 야비한 인종 차별의 역겨운 행태는 언제쯤 막을 내릴까요? 저자 잉그리트가 말한 그대로 피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더 똑똑한 인종도 없고 더 멍청한 인종도 없습니다. 그것은 개별 민족성의 차이일 뿐 그것을 그렇게 분류하고 구분하는 관점 자체가 문제인 것이죠. 책은 뿌리를 찾는 모험으로 시작해 삶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되새겨보는 결말로 끝맺습니다. 더불어 20세기 중반 제대로 미친 한 사이코패스 집단에 의해 자행된 유럽 역사의 비극은 차별과 혐오가 일상이 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크나큰 경종이 되어 돌아옵니다. 그리고 그 반향이 너무나 크기에 이 책을 집어 들고 읽을 독자들에게는 기나긴 심호흡이 요구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