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수용소에서 (양장) - 빅터 프랭클의
빅터 프랭클 지음, 이시형 옮김 / 청아출판사 / 2005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가능하면 매일 같이 면도를 하게. (중략)자네들이 살아남기를 바란다면 한가지 방법밖에는 없어. 일할 능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거야. (중략)그러니까 늘 면도를 하고 똑바로 서서 걸어야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p50

 

면도를 하고 뺨을 문질러서 혈색이 좋게 보이도록 해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처절하고 절박한 삶을 향한 의지가 위의 문장처럼 녹녹히 녹아져 있는 글도 없을 겁니다. 위의 글은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에 의해 인간 도살장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감 생활을 하며 그 참혹함의 상황을 지극히 담담하고 절제된 필치로 기록하여 전 세계 독자들의 관심과 호응을 이끌어 낸 베스트셀러, '빅터 프랭클' 박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한 대목입니다. 저자는 이곳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내며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속에 보이는 인간들의 삶을 향한 다양한 생각과 의지, 심리적 반응을 자신의 경험담과 적절히 혼합하여 한편의 훌륭한 정신심리학 보고서를 완성했습니다.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를 수 있는 행위 중 인류 역사상 최악이라 불리는 나치 홀로코스트의 중심부에서 벌어진 지옥의 참상을 오롯이 겪어내며 그 안에서 발견한 삶과 죽음의 의미를 기록한 책의 내용이 일상을 살아가는 독자들에게는 무척 충격적이면서도 생경하지 않을 수 없지요.

정신과 의사인 저자는 아우슈비츠라는 지옥에서 사람들이 보인 감정의 굴곡진 변화를 정신심리학적 단계에 맞춰 설명합니다. 나치 친위대 장교의 손가락이 오른쪽이면 작업장행이고, 왼쪽이면 가스실행이라는 삶의 죽음의 갈림길에서 사람들이 보이는 감정과 반응에 대해 저자가 자신만의 다소 직업적으로 느껴지는 사유를 행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놀라울 따름이죠. 아무튼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사람들의 첫 번째 반응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대한 충격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고트홀드 레싱, p51

 

이후 며칠이 지나면 사람들에게 정신적인 무감각의 단계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눈앞에서 감시병들에 의해 동료 수감자가 참혹한 린치를 당하는 장면을 목격해도 어떠한 혐오감이나 공포, 동정심도 느낄 수 없게 되는 상태인 것이죠. 저자 또한 두 시간 전에 본인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동료가 눈앞에서 시체가 되어 끌려나가는 현장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먹던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는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을 나눕니다. 인간 정신의 무감각함이 가져다준 감정 둔화의 전형을 보여 준 것이죠.

 

그런데 저자는 지옥의 상황 속에서도 자신보다 더 연약한 동료에게 자신이 가진 빵 한 조각을 기꺼이 내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동료 수감자의 고혈을 뽑아 먹음으로써 자신의 안위만을 챙기는 돼지 같은 짐승들이 있었다는 기이한 사실을 이야기하며 조금 독특한 인간 이해를 밝힙니다. 즉, 수면과 식량부족, 죽음의 공포로 인한 환경이 수감자에게 특정한 행동을 유도할 수는 있지만 최종적으로 그 사람이 어떤 종류의 사람이되는 가의 문제는 결국 그 개인의 내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점이죠. 이것은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많은 점을 시사합니다. 어린자녀를 끔찍하게 학대하고 죽음에 이르게 한 인면수심의 인간들도 결국은 그들의 내면이 살인마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 것이지 그들이 처한 환경의 영향은 아니라는 것이죠.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p233

 

 

또 한 가지 저자는 매일매일 죽음을 등에 업고 살아가는 수감자들 중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눈여겨볼 만한 사실은 사랑하는 대상에 대한 끊임없는 갈망과 자신의 삶에서 살아 남아야할 의미와 목적을 잊지 않았다는 매우 중요한 핵심을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이점이 바로 이 책의 나머지 2부와 3부의 내용을 이루는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입니다. 저자가 자신의 끔찍했던 수용소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연구의 결과를 도출해 낸 로고테라피는 미래에 환자가 이루어야 할 과제가 갖고 있는 의미에 초점을 맞춘다는 의미입니다. 지옥과 같은 아우슈비츠에서 도저히 살아나갈 수 없다는 절망 속에 자살을 선택하려는 사람들이 중도에 자살을 포기하는 이유도 바로 자신이 살아남아야 할 이유와 미래의 의미를 되새겼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일견 죽음에 이르는 병은 다름 아닌 '절망'이라고 말한 키에르케고르의 말이 생각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살아 돌아온 사람이 시련을 통해 얻은 가장 값진 체험은 모든 시련을 겪고 난 후, 이제 이 세상에서 신(神)이외에는 아무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경이로운 느낌을 갖게 된 것이다. p161

 

마침내 저자인 빅터 프랭클은 종전과 더불어 지옥에서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이처럼 인류가 결코 직접 체험하기를 꺼리는 끔찍한 비극 속에서 또 다른 미래의 인류를 위한 지적 유산을 잉태하고 출산했습니다. 저자가 1부의 끝에 남긴 위의 문장들은 특별히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깊은 통찰을 제공합니다. 지옥에서 생환한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들은 아마도 그들에게 주어진 남은 자유의 삶 속에서 정말 신(神) 이외에는 어떤 상황도, 어떤 사람도 두렵지 않은 삶을 살다 갔으리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아우슈비츠라는 생지옥을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사실 무엇이 두렵고, 어떤 인간들이 무서울 수 있을까요?

이 책은 죽음이라는 인간 실존이 맞부딪쳐야만 하는 궁극의 현실 앞에서 인간의 내면과 삶이 가진 진의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전라의 모습으로 까발립니다. 그러나 저자의 진술이 결코 가볍거나 천박하지 않은 이유는 매일 자신을 기다리는 죽음의 문턱 앞에서 삶의 실존과 운명의 민낯을 그가 직접 체험했기 때문이죠. 죽음과 삶의 외나무다리 위에서 그에 대한 깊은 고민과 사유로서 탄생된 본서는 매우 큰 가치를 지닙니다.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 속에서 자신의 삶을 너무나 쉽게(?) 내던지는 사람들에게 이 책이 말하고 있는 '삶의 의미'에 대한 개념은 남다르게 다가옵니다. 저자가 본서를 통해 전하는 저작의 총체적인 메시지는 바로 살아야 할 이유와 의미가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죠! 고난과 시련 앞에서 인간은 더 살고자 하는 생(生)에 대한 애착과 경향성을 가지는 존재임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살아야 할 이유와 목적이 없었기에 목을 매고 수용소의 고압전류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 삶의 이유와 목적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이유와 목적을 자신의 내면 안에서 발견하지 못했다고 표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삶과 죽음, 인생의 목적과 의미를 재조명해 볼 수 있었던 너무나 훌륭한 베스트 스테디셀러 <죽음의 수용소에서>는 역사가 존재하는 한 잊히지 않을 나치 홀로코스트와 함께 인류의 탁월한 지적 유산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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